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곰돌이빵 Sep 25. 2020

이 버스 오스트리아 가나요?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벌써 2시간 째다.


밤 9시. 한 손에는 캐리어, 다른 한 손에는 몇 번이나 접었다 폈다해서 접힌 자국이 꾸깃꾸깃해져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만 같은 버스 티켓을 들고 있다. 얼굴빛은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다. 캐리어를 끌며 플랫폼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목에 끼워진 목베개는 이리저리 휩쓸려 반 바퀴 회전한 상태인 것도 모른 채 헉헉거린다.


분명히 2시간 전만 해도 한 손에는 커피,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어제 찍은 풍경 사진을 감상하며 폴란드의 마지막 밤을 아름답게 장식며 세상 행복해있지 않았던가.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탑승 시간 30분 전쯤 타게 될 버스의 플랫폼 번호를 체크하러 전광판을 보러 갔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WIEN Central Station' 같은 건 쓰여 있지 않는 거다. 아, 우리나라 고속버스도 보통 타기 5분이나 10분 전에 버스가 오지. 여기도 이렇게 혼잡하니까 아직 정해지지 않은 건가?


무슨 소리야. 여긴 지하철 3호선 경부 고속터미널이 아니라고. 처음 온 곳이라고. 난생처음 온 폴란드란 나라의 크라쿠프라는 생소한 도시라고! 우리나라랑 똑같을 리가 없잖아. 서둘러 왼쪽 손목을 들어 시계를 봤다. 걸음수를 재주는 스마트워치가 스마트하지 못하게 화면을 내보내 주지 않는다. 신경질적으로 오른손으로 탁탁 시계 화면을 치니 이제야 말을 듣는다. 제 버스 출발 시간은 24분 남았다.


안 되겠다. 전류를 흘리는 차가운 저런 전광판이 아닌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에게 물어봐야 될 것 같다. 저 녀석은 미리 입력된 데이터가 아닌 출력은 뽑아내지 못하겠지. 뭔가 내가 탈 버스에 문제가 생긴 것일지도 모르잖아? 고장 수리라 던가 사고라던가.


직원에게 가보니 줄이 길다. 이런 젠장. 아까 여유 부리지 말고 빨리 물어볼걸. 그때는 알았냐고. 아니 처음에도 물어봤었다. 그때는 시간에 맞춰 플랫폼 번호가 정해지니 기다리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얌전히 기다린 거고.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뭔가 잘못되가고 있다. 앞사람들왜 이렇게 용무가 긴지 좀처럼 내 차례가 오지 않는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속이 탄다. 드디어 내 차례. 티켓을 보여주고 플랫폼 번호가 안 나온다고 설명했다. 직원의 표정이 영 좋지는 않다.


"음.. 이건 2층의 사무실에 가서 물어봐"


와 나 진짜 팔짝 뛰겠다. 지금 계랑 사람을 번갈아가면서 만나려고 이 커다란 터미널을 캐리어를 들고 얼마나 오르락내리락했는지 당신이 아냐고요. 하지만 그런 신세 한탄할 시간은 없다. 땡큐를 외치고 무작정 2층으로 뛴다. 다행히 2층 안내 데스크의 줄은 크게 길지 않다. 하도 뛰어서 나오는 기침을 삼키고 잽싸게 소리를 가다듬고 예매한 티켓을 직원한테 보여주면서 플랫폼을 묻는다. 응? 처음 물어봤을 때랑 똑같은 대답을 하네? 그냥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이 사람들아 이제 10분 남았다고! 이거 한두 시간 가는 버스 아니라고. 국경 넘는 심야버스라고!!


<500km, 약 7시간의 여정>

문득 내가 왜 이 밤에 폴란드에서 오스트리아를 가려고 했는지 자아 성찰을 하게 된다. 8박 9일의 일정 동안 폴란드만 가기는 아쉬워서 근처 다른 나라를 갈 곳이 없을까 알아보다가 07년도와 12년도에 방문해서 좋았던 나라인 오스트리아가 떠올랐다. 07년도에는 한 달 배낭여행이라 정신없이 다니느라 빈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고, 12년에는 헝가리 출장에 갔을 때 주말에 잠깐 구경 가듯이 간 거였다. 하지만 둘 다 쇤부른 궁전이라는 곳에 갔었는데 그곳이 난 참 좋았다. 우리나라에서 가깝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곳을, 똑같은 나라를 3번 가보는 것이 뜻깊을 것 같아 정한 여행지였다.

<07년과 12년, 17년이 추가될 기회는?>


결국 버스 출발 시간보다 1시간이 지났다.


이 버스는 이미 끝났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 그래도 기차를 타고 갈 수 없을까 싶어 기차역에도 갔지만 빈에 가는 기차는 없다. 지금은 밤 10시 반. 난 어떻게 해야 하지?


<크라쿠프의 밤>

처음에는 막막했다. 눈물도 조금 맺혔다. 빈에 다시 꼭 가고 싶었다. 자연사 박물관에도 꼭 다시 가고 싶었는데. 그런데 이미 버스 시간은 지났다. 잠은 자야 한다. 이성을 붙잡고 스마트폰 앱으로 급하게 역 근처의 숙소를 구하고 체크인을 했다. 빈 중앙역 앞 2박을 예약해둔 숙소에는 노쇼가 아니라고 내일 가겠다고 메일을 보냈다. 할 일을 마치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다 보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났다. 피곤했는지 금방 잠도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밥맛이 없다면서 조식도 먹었다.


<하루 종일 뭘 해볼까>

마음을 비우니 없던 휴가가 생긴 기분이었다. 실컷 하루를 더 보내고 빈에 가는 버스를 탔더니 오늘은 참 착착 버스가 잘 오더라. 어젯밤에 버스가 왜 안 온 건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7시간 버스를 타고 가니 담이 걸릴 것 같았지만 어느새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느낀 건 참 더웠다. 캐리어를 힘겹게 끌며 어제 버스가 안와 하루 비용을 날려먹은 호텔에 가서 체크인을 하는데 로비가 정말 시원했다.


그런데 방에 들어가니


응? 에어컨이 없네.


하하하 직원 복지가 참 좋은 호텔이구만. 어쩐지 역세권 호텔 가격이.. 납득할 만했어. 심지어 상온에 둔 물이 5유로라니. 2박 할 것을 1박만 해서 다행이다.

 

결국 오스트리아에 가서 쇤부른 궁전도, 자연사 박물관도 가지 못하고 에어컨 없는 방에서 하루를 보내귀국했다. 그럼 대체 오스트리아에서는 뭘 했냐고?


스타벅스 컵 사러 국경 정도는 넘어야지.

이전 02화 노르웨이를 백팩 하나 메고 왔다고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