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리안 웰던 그 무시무시함
폭탄같이 위험한 이 녀석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은 바야흐로 2010년 싱가포르에 방문했을 때였다. 벌금의 나라라고도 불리는 싱가포르는 질서 유지에 대한 법이 엄격하다. 일례를 들자면 도로에 쓰레기를 버리거나 침을 뱉으면 한화로 25만 원, 대중교통에서 생수 포함 음식을 섭취하면 85만 원, 입국 시 껌을 반입하는 것도 불법이며 껌 대량 적발 시에도 같은 비용의 벌금을 내야 한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평상시에 껌을 씹지도 않지만 혹시 베란다에 자고 있던 캐리어에 껌 같은 것은 없는지 출발 전부터 탈탈 뒤졌다.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당연히 잘못된 일이지만 혹시나 실수로라도 흘리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마음을 잔뜩 가지고 입국했다. 지금은 동남아시아 국가 중 가보지 않은 나라가 더 적지만 처음으로 동남아시아의 땅을 밟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날씨의 습기가 가득한 11월, 싱가포르 공항에서 내려서 대절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신기한 표지판을 발견했다. 가시 모양이 그려진 밤송이 같은 것을 금지한다는 표지판이었다. 아래를 보니 두리안 금지 표시였다.
지금도 두리안이 생소한 음식이며 수입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데, 그때는 더더욱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몰랐다. 일단 나는 두리안이라는 녀석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안심한 상태로 잠을 청했다. 첫 방문한 동남아시아의 위용은 대단했다. 낮에도 밤에도 에어컨 없이 밖을 돌아다니는 일은 힘들었고 동남아 비기너 레벨이었던 나는 향신료가 강한 음식이나 생소한 음식이 힘들어 액체로 배를 채웠다.
잔뜩 힘없는 상태로 마리나 베이 샌즈를 구경하고 물을 토해내는 사자상도 구경하고 트와이닝 홍차도 구경하고 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가스 냄새가 나는 것이다.
'이상하네.. 여긴 시장인데 왜 가스 냄새가 나지?'
의아해했지만 범인은 바로 시장 좌판 매대에 가득 쌓여있는 두리안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먹어볼 수 없는 음식이라 레어템이라지만 과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괴하게 생긴 저 모양에, 냄새까지 사상 초유의 냄새를 자랑했던 저것을 나는 도저히 도전해 볼 용기가 없었다. 두리안 냄새가 얼마나 강하면 심지어 1km 밖에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말 다했다. 호주에서는 두리안 냄새를 가스 누설로 오해해서 단체로 사람들이 대피한 적도 있다고 한다. 두리안의 냄새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다양한데 같이 있던 친구들도 하나같이 다른 표현을 구사했다.
양파 썩는 냄새 같다, 화장실 냄새 같다,
아무튼 거지(?) 같다.
7년 뒤 사람도 땅도 익어가는 6월, 나는 이열치열이라는 마음으로 방콕으로 향했다. 더운 동남아시아는 겨울에 가야 효율적인 것 아니냐는 생각을 곱게 접어 놓고 제철 과일도 먹어보자는 생각에 정한 일정이었다. 그동안 항상 겨울에 동남아시아를 갔기에 과일 맛이 영 별로였다. 과일 킬러인 나는 석가, 잭 푸룻, 망고, 망고스틴, 람부탄, 구아바, 스타 푸룻, 용과, 파파야, 패션푸룻 등 다양한 과일을 도전해봤지만 망고나 망고스틴 정도나 평타 정도였지 다른 것들은 맛이 부족했다.
5~8월이 두리안 제철이라고 하니 이번엔 제대로 두리안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맛있는 두리안을 먹으면 입에서 살살 녹는 아주 부드러운 크림 맛이 난다는 말을 들은 터라 정말 무슨 맛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가 두리안을 먹게 된다면 꼭 가장 최고의 맛을 가진 두리안을 찾아낼 거라고 투지를 다지고는 길거리에서 두리안을 발견하면 저걸 사볼까 이걸 사볼까 하다가도 진짜 맛있는 걸 찾겠다며 방콕의 시암 파라곤 고메 마켓을 방문했다.
고메 마켓이란 우리나라로 따지면 아마 갤러리아 백화점의 고급 슈퍼마켓 정도 될 거다. 이것저것 과일이 많이 쌓여있었지만 내 목표는 바로 하나! 밤송이 같은 저 녀석이었다.
요리조리 둘러보다 발견한 두리안은 마치 임금님 진상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어마어마한 상품(上品)의 형태로 떡하니 황금 보자기에 올려져 있었다. 참고로 저 가격표 3600바트면 한화로는 13만 원 정도다.
아무리 그래도 13만 원짜리 두리안은 좀 그렇지..
맛있는 두리안을 먹겠다고 해도 저 모닝스타 같은 것을 통으로 사는 건 좀 그렇지. 아무래도 작은 조각으로 잘려 있는 것을 구입하는 것이 나 같은 초보자에게 걸맞다 싶었다. 마침내 적절한 크기로 잘라 랩핑 해둔 두리안을 발견하고는 어떤 것이 맛있을까 골라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포장지 라벨에 웰던, 미디엄 같은 것이 쓰여있는 것 아니겠는가. 스테이크도 아니고 과일에 이런 단어를 쓰는지 처음 알았다.
두리안은 숙성 정도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익히지 않은 두리안은 생밤처럼 단단하고 연한 맛이 나지만 잘 익은 것은 크림같이 부드럽고 진한 맛을 자랑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역시 웰던으로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백화점에서 꼼꼼하게 잘 포장된 두리안이어서 그런지 냄새도 별로 나지 않고 초보자가 도전하기에는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으로 저 덩어리 한 개에 2만 원 넘는 거금을 지불하고는 도시철도 BTS를 타러 갔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대부분 더운 날씨와 낮은 물가로 택시나 우버, Grab을 많이 타지만 방콕의 러시아워는 생각 이상으로 엄청나기에 도시철도는 필수다.
아무 생각 없이 비닐봉지에 담긴 두리안을 들고 티켓을 사고 개찰구로 들어가 어느 방향인지 살펴보고 있는데 역무원이 우리를 불러 세운다. 응? 그의 손에는 플래시가 들려져있었고 그것은 내가 들고 있는 봉투를 강렬하게 비추고 있었다. 꺼내보라는 얘기다. 그렇다. 나는 지상 최고의 두리안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어서 공공장소에서 두리안이 금지라는 것을 까맣게 잊었던 거다!
아니 이거 13만 원짜리 두리안을 샀으면 차라리 억울하지라도 않지 이 작은 것을 샀다고 벌금을 몇십만 원 내는 건 아니겠지? 싱가포르랑 태국이 좀 비슷한 성향인가? 두리안 하나 먹으려다가 개털 되는 거 아닌가?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니야 13만 원짜리 두리안은 어차피 들고 가자마자 바로 걸려. 그리고 그것도 뺏기고 벌금도 왕창 내느니 차라리 작은 거 뺏기는 게 낫지. 어쨌든 망했다. 지상 최고의 두리안을 먹는 것은 이번 여행에서도 안되려나보다.
응? 그런데 역무원이 우리를 티켓 판매 부스로 데려가더니 표도 환불해주고 두리안은 들고 타면 안 된다고 친절히 설명해 주고 돌려주는 것 아니겠는가?
방콕 짱!! 알럽 태국!! 유후!!
한 시름 놓고 두리안을 들고 신나게 걸어 나왔다. 지금 시간은 오후 5시, 러시아워가 최고조에 일렀는데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도 햇살의 뜨거운 열기는 가실 줄을 몰랐다.
결국 러시아워가 심한 이 시간에는 우버도 잡히지 않았고, 겨우 잡은 우버는 길이 너무 막힌다며 취소를 해 줄 테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고 해서 내렸다. 더위를 이겨내기 위해 거의 헐벗은 옷차림이었지만 3km에 달하는 리조트까지 걸어가는 길은 땀이 줄줄 났다.
아무것도 뺏기지 않고 석방당한 처음의 기분은 잊어버린채 마침내 기진맥진한 상태로 숙소에 도착했다. 와 도착이다! 드디어 맛을 보자! 그런데 호텔에서도 역시 두리안 금지 표시판이 우릴 반기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나와 친구는 실성한 듯 웃어젖혔다. 그리고 로비의 직원에게 우리 두리안 좀 먹을 곳 없니? 라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리조트였기에 오픈된 장소의 의자나 수영장 등 공간이 여유로워서 다행히 그 곳에서 시식을 할 수있게 됐다.직원은 객실 내 반입을 안 하면 괜찮다고 했다. 먹고 남은 쓰레기는 꼭 외부의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신신당부했다. 역시 이 얼마나 대단한 음식인가. 모든 장소 다 금지! 얼마나 맛있으면 이렇게 금지인데도 먹느냐 말이야.
마침내 영접한 두리안의 맛은.. 이 험난한 여정에 비해서는 영 싱거웠다. 심지어 마지막 날 친구는 체한 건지 반나절 동안 일어나지도 못해서 레이트 체크아웃을 해야 했다. 이건 무슨 건강과 바꾼 두리안 탐험대도 아니고. 아무려면 어떠한가. 싱가포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 어디인가. 하지만 앞으로도 맛있는 두리안을 찾는 일은 나에게 아직도 어려운 숙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