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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돌이빵 Nov 09. 2020

쿠알라룸푸르 택시 안에서 새해를 맞을 뻔 했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지금은 12월 31일 저녁 8시 40분, 쿠알라룸푸르 시내 어딘가를 달리고 있는 택시 안이다.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을 훌쩍 넘긴 지 오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연말을 맞이한 쿠알라룸푸르의 도로 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차들을 보면 오늘 안에 호텔로 돌아갈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했다. 구글 지도를 아무리 봐도 목적지와 계속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여행 계획을 짜 온 나는 태연한 척 친구를 보면서 어떻게든 갈 수 있을 거라고 안심시켰지만 내 등 뒤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택시기사와는 설상가상으로 대화도 잘 통하지 않는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그저 새해 전날, 맛있는 저녁이 먹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대에는 이십 대가 되면 어떨지 기대감이 가득했다. 미성년자가 아닌 성인이 된다는 기분이 좋았다.하지만 삼십 대를 맞이하는 새해의 1 1일이 다가오자 나는 기대  걱정 반이었다. 서른은 뭔가 어른이 되어가는 관문 같았고 삼십 대에는 무언가를 뤄야 된다는 강박관념에사로잡혔다. 이제  서른!  어른이야! 라고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는  아니지만,   어른이 된다는 생각에 설렜다.


그래서 결심했다. 서른이 되는 1월 1일을 아주 특별히 보내야겠다고. 어딘가 멋진 장소에서 맞아야겠다고. 끈질긴 영업 끝에 동갑내기 친구와 해외여행 일정을 맞추는 데에 성공했다. 일정상 먼 곳은 어려웠고 추운 겨울이니 따뜻한 동남아시아가 어떻겠냐는 결정을 내렸다. 거기에 난 또 어이없는 근거까지 갖다 붙였다.

"게다가 우린 남들보다 한 시간이나 더 늦게 나이를 먹을 수 있다고!"

그랬다. 말레이시아는 한국과 시차가 1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가보지 못한 도시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겨울에 따뜻한 나라로 여행을 가는 것이 오랜만이라 두근거렸다. 우리는 두꺼운 겨울 외투를 공항에 맡길 것인지, 캐리어에 넣을지부터 고민하면서 행복한 여행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연말 성수기에도 불구하고 저렴한 물가여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힐튼 호텔도 예약했다. 수영장에 미끄럼틀도 딸려있어서 하루 종일 수영장에 있어도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호텔에서는 1월 1일을 맞아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는 파티도 열리고 있었다. 바로 내가 원하는 곳이 여기야!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한 쿠알라룸푸르는 덥고 습하고 흐렸다. 하지만 날씨가 무엇이 중요한가? 지금 우린 외국에 있다고. 유심도, 환전도, 호텔까지의 이동도 수월했고 처음 가본 힐튼 호텔의 수영장 뷰도 훌륭했고 카운터의 직원도 친절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이제 여행 책자에서 본 맛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현지 음식을 마음껏 탐닉하면서 12월 31일의 밤을 불태워보기로 했다.


<너무 좋았던 수영장>


저녁을 먹으러 가기 위해서는 택시를 잡아야 했다. 처음 와본 나라여서 바가지를 쓰면 어떻게 하지 하며 걱정을 했다. 그런데 마침 택시를 잡으려던 곳이 센트럴 역이었고, 그곳에는 목적지를 말하면 미리 가격을 책정해서 딱 그만큼만 받는 정액제 선불 택시가 있었다. 길에서 잡는 택시보다는 훨씬 믿음이 갔기 때문에 줄을 서서 목적지를 이야기하고 납득할 만한 가격의 돈을 지불하고 티켓을 끊었다. 우리는 습한 바깥공기에서 벗어나 택시의 시원한 에어컨을 맞으며 창밖을 구경하면서 쿠알라룸푸르의 도시를 눈으로 탐험하며 드라이브를 즐겼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나 싶어 구글 지도를 켜 보았는데 목적지와 왠지 한참 멀어져 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동선을 추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나라의 지리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인가 하고 보고 있었는데 계속 봐도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나는 친구에게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친구도 같이 지도를 보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택시기사의 내비게이션을 봤다.


도로가 층층이 쌓여있으면 내비게이션이 내가 가장 맨 위에 있는지 아래에 있는지 잘 잡지 못한다. 게다가 이 택시기사는 왜인지 방향감각을 상실해도 한참 상실한 듯했다. 우리는 3층과 2층, 1층 도로를 번갈아가면서 계속 왕복하고 있었다. 나는 이러다가는 밥은커녕 길바닥에서 새해를 맞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택시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이 방향이 아니라고, 이렇게 가면 안된다고 온갖 모든 말을 총동원해서 설명했다. 그 사람도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기도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설상가상으로 12월 31일의 도로는 너무도 차가 많아서 한번 잘 못 빠져나올 때마다 점점 더 느려지는 차들 속에 갇혀야 했다.


아무래도 더 멀리 가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전에 차라리 먼저 내리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택시기사에게 우리를 적당한 곳에 세워달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택시기사는 절대로 안된다고 고개를 마구 저으며 내려줄 생각이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무사히 내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이. 아니 그건 당신이 똑같은 도로를 몇 번씩 빙글빙글 돌기 전의 얘기라고! 선불 택시라 돈도 지불했겠다,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택시를 계속 타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 여기서 서른 살 맞이 하는 거 아니야?"라고 처음에 주고받은 농담이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나는 결단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택시는 답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택시기사가 된 건지 의문이 들었다. 혹시 GTA처럼 다른 사람이 이 택시를 훔쳐서 택시 기사인 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 더 위험한 것 아닌가? 아니야. 그럼 마음대로 가겠지, 이렇게 빙글빙글 돌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성이 마비되어 정상적인 사고를 못하게 될 무렵 나는 친구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우리, 다음 신호에 멈추면 내리자."

친구의 동공이 잔뜩 흔들렸다. 길 한복판에서 내리자는 내 얘기가 제정신으로 들리지 않았겠지. 하지만 다음 신호쯤 가면 옆에 바로 인도와 연결된 상가도 있어서 내가 앉아있는 오른쪽으로 내린다면 달리는 차에 치일일은 없다고 친구를 설득했다. 게다가 지금 도로는 완전 꽉 막혀 있어서 차들이 달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친구도 나의 절박함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신호에 정차했고, 우리는 택시기사에게 큰 소리로 말하면서 동시에 문을 열었다.


"바이 바이! 아임 쏘리!!"


우리는 잽싸게 달려서 상가 쪽으로 이동했고 무사히 안전지대에 안착했다. 나는 인도 위에 튀어나온 요철 부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왜 여기까지 온 건지 생각해봤다. 그래도 12월 31일이고 나름 새해 기념으로 여행을 온 건데 맛있는 걸 먹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에 맛있는 해산물 집을 책자에서 찾아냈을 뿐이었고 그곳은 도대체 천국에 가야 있는지 나오지 않을 뿐이었다.


일단 더 이상은 우리에게 저녁 식사를 할 기운이 없었다. 일단 오늘 자정 안에 호텔에 돌아가 새해 파티라도 해야 이 분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길 한복판에서 택시를 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들어도 빈차가 없었고 심지어 도로도 꽉 막혀 있었다. 나는 온갖 웹서핑을 단행하여 말레이시아에서 사용할 수 있는 택시 어플을 몽땅 다운로드하였다. 그리고 힐튼 호텔을 목적지로 쳤지만 그 어떤 택시도 잡히지 않았다.


절망감에 휩싸인 순간 택시 어플의 아랫부분에 '팁'을 주는 칸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래 이거다. 막히는 시간이니 팁을 줘야 오는구나. 일단 처음에는 조금만 팁을 책정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잡히지 않았고 지친 나는 결심했다. 에라 모르겠다. 팁을 맥시멈으로 때리자!!


드디어 택시가 잡혔다.


정말 지옥같이 막히는 길이었지만 우리는 밤 11시, 무사히 호텔에 도착했다. 새해를 안 넘겨서 다행이지. 배가 너무 고팠지만 우린 해피 뉴 이어 파티를 하러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파티 장소인 클럽으로 갔다. 온갖 나라 사람들이 모여 카운트 다운도 하고 나눠준 뾱뾱 소리가 나는 피리도 불고 다 같이 외쳤다.


Happy new year!


이제야 서른 기념 여행의 목적을 달성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좋아 옆자리에 있던 외국인한테 오늘 서른이 되었다며 자랑을 했더니 생일 축하한다며 술을 한 잔 사주었다. 음, 그래 생일이나 다름없지 뭐. 다시 태어난 기분이니까! 빈속에 꾸역꾸역 넣은 술은 정말 속 쓰렸지만 말이다.

<58초, 새해 카운트 다운>


우린 밤새 굶주린 배를 부여잡으며 잠을 청했고 다음날 아침, 배가 터지도록 조식을 먹어야만 했다. 아마 가장 과식을 많이 한 새해 첫날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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