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술 어디서 사요?
호주에 도착한 날. 환승과 긴 비행시간으로 아예 뻗어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활력은 모자란 상태. 이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 피로를 내려놓고 조금은 긴장을 풀기 위해서는 역시 '푸쉬~'하며 캔맥주를 따서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넘기는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는 멜버른에서 남서쪽으로 80km 떨어진 작은 마을 질롱(Geelong)이다. 맥주도 살 겸, 호주의 마트에서는 고기를 어떻게 포장해서 팔까, 어떤 과일이 있을까 궁금해져 대형 마트로 발걸음을 향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처음 가는 동네의 마트에 가면 종횡무진 누비게 되고 필요한 물건을 찾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잔뜩 영어로 쓰여있는 표지판이 가득한 곳에서 원하는 물건 찾기란 더더욱 어렵다.
어차피 고객의 편의와 많이 팔기 위한 마케팅의 줄다리기로 이루어진 마트의 진열 방식은 거기서 거기다. 이쯤 가면 술이 딱 있게 생긴 선반이 나올 것 같고 왠지 이쪽으로 가면 나올 때가 됐는데? 한국에서 본 듯한 오픈 쇼케이스를 발견해서 뛰어가면 우유랑 주스가 놓여있고, 어! 여기 왠지 MT 갔을 때 친구들이랑 카트 밀면서 짝으로 술 박스 싣던 선반이랑 비슷한데? 하고 가보면 생소한 디자인의 탄산수나 음료수가 안녕? 하고 쳐다보고 있다. 젠장. 이러다가 문 닫겠네. 술 못 찾아서 죽은 귀신이 붙은 것처럼 보이긴 싫지만 결국 나는 물건 찾기 능력의 부족을 인정하고 점원에게 질문을 시전 한다.
맥주는 어디에 있어요?
빨간 조끼를 입고 물건을 정리하던 직원이 굉장히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맥주가 어디에 있냐는 질문이 그렇게 이상한가? 아, 여긴 외국이고 난 동양인이니까 어려 보여서? 아니 내가 그 정도로 어려 보이진 않는데 말이지. 내 발음이 좀 이상했나 해서 다시 한번 또박또박 물으니 와인과 맥주가 쌓여 있는 선반으로 안내한다. 그렇지! 여기 기다리고 있었구나 내 친구들! 근데 뭔가 이상하다. 맥주와 와인에 'NON - ALCOHOL, ALCOHOL REMOVED' 따위가 쓰여 있는 것들이 아닌가.
나는 지금 한 입 꿀꺽꿀꺽 넘기면 알코올이 혈액을 타고 구석구석 퍼지고, 캬~ 하고 소리를 내뱉으면 나른해지고 몽롱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싶단 말이다! 무알콜이 웬 말이냐고! 한편으로는 역시 얼마나 호주가 와인을 많이 생산하면 무알콜 와인까지 만드나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감탄하고 있었지만, 아니지. 지금 나는 무알콜 와인 따위를 예찬하러 온 게 아니라 술을 사러 온 거잖아? 직원에게 다시금 물어보려 당장 알코올을 못 마시면 미쳐버릴 것 같은 알코올 중독자 같은 표정을 최대한 지어보니, 직원이 손가락으로 매장 밖을 가리킨다. 술 코너는 저기에 따로 있다고. 아 그런 거였어? 그럼 진작 말해주지~ 왜 날 무알콜 선반으로 데려간 거야. 하며 매장 밖을 보니 오호, 리쿼 랜드!! 이것이 바로 어른의 꿈과 희망의 나라인가?
어떤 맥주가 있나 구경하러 한달음에 뛰어갔지만 셔터가 내려가 있다. 분명히 마트 영업시간은 8시까지고, 내 시계는 7시 12분을 가리키고 있는데 뭐가 문제지? 하고 셔터 앞 안내문구를 보니 리쿼 샵은 7시까지가 영업시간이다. 오 마이갓. 그래서 나를 무알콜 선반으로 안내한 거였구나. 리쿼 샵은 이미 닫았으니 괜찮으면 무알콜이라도 먹으라며. 진작 물어볼걸. 마트를 헤매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7시 전에 도착해서 살 수 있었을 텐데! 여긴 시골이라 편의점도 없으니 별수 없다고 생각하며 결국 무알콜 와인을 든 채로 호텔로 돌아왔다. 로비에는 'Closing' 팻말이 붙어있다. 아까 여기 1층 라운지에서 맥주를 팔고 있는 것을 '아니 뭐 이리 비싸? 마트가서 사면 될것을.' 하며 지나친 과거의 나를 탓하며 잠을 청해 본다.
다음날 빡빡했던 일정을 마치고 기차를 타고 멜버른으로 향했고,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어놓고 가장 먼저 할 일은 뭐다? 편의점에 술을 사러 가야지! 호텔 앞에 세븐일레븐이 있는걸 내가 다 확인해봤다고. 물도 사고, 콜라도 사고, 이제 호주 맥주는 뭐가 있나~ 하고 냉장고를 두리번거리는데 아무리 찾아도 맥주가 보이지 않는다. 여긴 센트럴 역 앞이라서 술을 안 파는 건가? 외국 영화를 보면 길거리에서 맥주를 들고 물처럼 마시는 장면이 수도 없이 나오지만 호주만은 예외다. 뚜껑이 열린 술병을 들고 거리를 걷기만 해도 벌금이며 만취한 상태로 돌아다니면 몇십만 원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결국 난 편의점을 나와 다음 목표가 또 문을 닫을까 걱정하며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꼭 이럴 때는 신호등이 왜 이렇게 안 켜지는지 버튼을 연신 눌러대며 두 블록 떨어져 있는 작은 마트에 도착했지만 역시나 없다. 이 쯤되니 뭔가 이상하다. 아니 여기 사람들이 무슬림도 아니고 그럼 도대체 술을 어디서 사야 된다는 말인가? 나에게 술이란 여행지에서의 가벼운 맥주 한잔의 즐거움이나 가끔 휴일 전날의 활력소 정도이지 술이 없으면 살 수 없다든가 죽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몇 번이나 실패를 하니 정말이지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가 된 기분이 든다. 심지어 호텔 앞 펍에서는 쿵짝쿵짝 거리는 음악이 나오며 술을 마시는 젊은이들이 가득 하단 말이다!
그렇다. 나만 몰랐던 이야기였다. 호주에서는 마트나 편의점에서는 술을 판매하지 않는다. 그러나 편의를 위해 보통 대형 마트 옆에는 맥주, 와인 등을 취급하는 리쿼 샵(Liquor shop)이 붙어있지만 마트 영업시간보다도 일찍 닫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는 음식점도, 편의점도 영업허가 또는 신고만 하면 누구나 팔 수 있을 정도로 제한이 없다. 하지만 호주에서는 술의 유해성에 대한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술을 소매 판매하려면 자격증을 취득해야 하며 심지어 술을 서빙하는 아르바이트 생도 그 자격증, RSA(Responsible Service of Alcohol)이 필요하다. 그것은 손님에게 주류를 제공할 때 알아야 할 법적인 내용과 미성년자 등에게 대처하는 상황 등에 대하여 테스트하는 것이다. 그래서 호주에서는 친구들끼리 모여 파티를 하며 술을 마시다가 떨어지면 문 닫기 전에 배낭을 메고 미친 듯이 달려서 술을 사 온다는 일화나, 미리미리 술을 집에 쌓아 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는 결국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와 룸서비스 책자를 미친 듯이 뒤져보지만 어디에도 술은 없다. '제발 돈 드릴 테니 맥주 1캔만요!' 하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그렇게 술을 좋아했던가? '내일 눈 뜨기만 하면 내가 진짜 리쿼 샵 가서 술 다 쓸어온다.' 하고 잠자리에 들려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내 캐리어에는 광저우 공항에서 환승할 때 산 그 맥주 한 캔이 남아있단 것을.
캬~ 시원하지는 않지만 안정된 곳에서 한잔 마시면서 내일은 또 어떤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하니 행복이 다 무엇인가 싶다. 가끔 집에서 맥주가 마시고 싶은데 10m 거리의 편의점 가기도 귀찮아해 안 마시던 내가 술을 찾아서 헤맨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아, 어제 샀던 무알콜 와인은 어땠느냐고? 당신이 임신을 했거나 운전을 해야 하는데 와인을 마시지 않으면 죽을 것 같지 않는 이상 마시지 않는 것을 권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