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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돌이빵 Sep 18. 2020

노르웨이를 백팩 하나 메고 왔다고요?

맞아, 어깨도 손도 마음도 가볍거든

처음으로 떠난 북유럽 여행. 고대하던 노르웨이 향하는 출국날, 나는 모스크바로 향하는 러시아 항공 비행기에 앉아 불안한 마음을 계속 억눌렀다. 항공 지연과 짐 분실로 악명이 높다는 러시아 항공. 지난 헝가리 출장 때 느꼈던 심장 쪼그라드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하지만 여름휴가 성수기에  가격이면..


응, 굴복해야지. 자본주의 만세! 돈 최고!


하지만 기쁜 마음도 잠시 환승 시간이 2시간 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계속 떠오르며 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모스크바 환승이 처음도 아니었 보통 환승 2시간은 충분한 시간이다. 물론! 당신이 탄 비행기가 완벽한 출발과 도착으로 지연이 되지 않았을 경우의 얘기다. 하지만 날짜와 시간 조합이 완벽한 데다가 가장 저렴했던 이 비행기표놓치기 싫었다. 이 스케줄이 최상이라고 믿었던 나는 티켓팅 전 환승 시간이 2시간인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 정보를 수집했다. 환승 2시간이면 충분하다, 모스크바 공항은 좁다, 2시간이면 밥도 먹고 샤워도 하겠다는 둥 내가 원하는 답변만 찾아내서 구매를 합리화했다.


그런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1차 관문인 정시 탑승은 성공. 이것만 성공해도 수명이 5분은 늘어난다. 그런데 모든 승객이 타고 나서도 한참을 출발할 생각이 없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1시간이 가까이 지났는데 이륙할 준비를 안 하는 거다. 하지만 나에게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재작년 헝가리 출장 때 급하게 티켓팅을 하느라 러시아 항공을 샀는데 그때도 2시간 환승이었다. 역시 1시간 지연 출발했고 다음 비행기는 놓쳤다고 포기하며 내릴 준비를 하는데 이상하게 제시간에 도착해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 않는가. 나는 이번에도 제시간에 도착할 거야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고 불안한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드디어 이륙! 그래 난 운이 좋아. 남은 비행시간을 확인해보니 가까스로 환승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나올 것 같았다. 비행 중에도 계속 승무원에게 나의 환승 시간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다음 연결 편을 알려달라고 적극적으로 어필했고 플랜 B를 준비해둔 나는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마침내 모스크바에 도착했고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총알처럼 튀어나가 수속을 처리하고, 보안 직원에게 내 티켓을 흔들며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우선권을 요청하고 오슬로행 비행기가 있는 터미널로 목구멍에 피맛이 나도록 미친 듯이 뛰었다. 이 모든 것이 10분 남짓한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널 콜도 들리지 않는 전력질주 끝에 게이트에 도착했고, 너는 정말 행운이라는 표정을 지은 직원들이 네가 마지막 승객이라며 나를 환호했다. 나는 정말 운이 좋다며 나를 칭찬하며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에게 오슬로에 처음 간다고 폭풍 스피킹을 쏟아내고 거친 숨을 골라내며 마지막 여정을 편안한 마음으로 맞이했다.


드디어 처음 밟아보는 노르웨이의 땅. 오슬로에 도착 후 입국 면세점에서 맥주 6캔 묶음까지 사고는 즐겁게 짐 찾는 곳에 왔다. 그런데 한 바퀴, 두 바퀴


어.. 뭔가 이상하다.


거의 모든 짐이 제 주인을 찾아갔는데 내 것만 없다. 내가 맥주 사느라 처음부터 지켜보지 않아서 혹시 내 캐리어를 다른 사람이 가져간 건가? 아닌데. 금방 왔는데. 그리고 내 가방은 모양이 특이해서 헷갈릴 사람들이 없을 텐데. 믿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결국 수하물 분실 카운터로 터덜 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수하물표소중히 하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다행히 잘 보관하고 있었다. 내 수화물을 조해보고는 절망적인 표정 직원의 말을 들어보니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앞 비행기가 지연이 되었어도 너는 (전력질주로) 환승에 성공했지만 아무래도 의 캐리어는 뇌도 발도 없었기에 타지 못한 것  같다고. 아니야. 꽃길만 펼쳐질 것 같던 내 여행이 이럴 리가 없어. 나는 나와 캐리어가 이별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일반적인 여행이었다면 다음 비행기로 도착하는 캐리어를 하루 정도면 받아볼 수 있을 테니 숙소에 가서 기다렸겠지만 나의 동선은 바로 다른 도시로 하루마다 넘어가는 일정이었기에 마냥 오슬로에짐을 기다릴 수도 없었다. 밤이 깊어가는데 언제까지 공항에서 기다릴 수는 없어 조금 여유롭게 도착하도록 4에 머무를 숙소의 주소를 적고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섰다. 이것도 도착이 확실치 않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니 더 마음이 답답했다.


아름답게 보이던 이 곳이 밖에도 나가보기 전에 어둡고 차갑고 원망스러웠다. 가방엔 칫솔, 충전기, 이어폰, 지갑이 전부였다. 내일 묵을 곳은 도시가 아닌 산속이라 마땅히 먹을 식당도 없어 준비한 햇반과 라면이 없다는 것도 나를 슬프게 했다.


정신이 온데간데없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기차표를 잘못 사10유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티켓을 사고 마냥 우울해하며 숙소로 향하는 길은 참 멀고 험했다. 다음날 아침에 다른 지역으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해두었지만 다시 공항에 가서 짐이 왔는지 확인해 볼까 어쩔까 고민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래도 긴 비행시간에 쌓인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짧은 시간 눈을 붙이고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이번 여행 일정을 위해 내가 얼마나 고심하며 동선을 짰던가. 그나마 트레킹 날짜보다 빨리 짐을 받을 수 있어 다행일지도 모른다. 비행기에서는 다리가 부어오르기 때문에 늘 입는 이 치마를 입고 등산화와 장갑도 없이 산에 오를 일도 생기지 않았다. 여권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카드도 돈도 있다. 부족한 것은 사면돼. 그래 일단 내 일정대로 가자.



외국에서 도시 간 이동 중 이런 작은 백팩을 메고 양손 가볍고 어깨도 가볍게 다녀본 적이 있었던가? 마음을 내려놓으니 조금 편안해지고 배고파져서 편의점에 가서 샌드위치도 사 먹고 공원의 그네에 앉아서 여유 부렸다. 그때였다. 동네 집시가 나한테 돈 좀 달라는 눈빛을 보낸 것이.


'벼룩의 간을 떼먹어라.. 나 거지꼴인 거 안보이니..'

두 번째로 이동한 도시 플롬은  산장이 있는 작은 산골 마을 분위기다. 산속이라 날도 추운데 플롬으로 가는 기차에서 TPO도 안 맞는 하늘하늘한 치마에 반팔에 셔츠, 가방 하나 딸랑 맨 나를 보는 외국인들의 시선이 참 볼만했다. 가끔은 진심으로 나의 옷차림에 의문을 품은 그들에게 나는 대답해줬다.


"I could transfer, but my luggage couldn't transfer!"


날이 흐려 전망대에 갈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할 건 다하자는 마음으로 티켓을 샀다. 한국인 어머님들이 단체로 몰려와서 나에게 물었다.

"아니 왜 옷을 이렇게 춥게 입고 왔대~"

짐을 못 받았다고 말하는 내게 당신들 딸 일처럼 걱정해주시는 마음도 참 고마웠다. 



전망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기념품 가게에서 노르웨이가 크게 새겨진 후드티를 샀다. 처음엔 아무거나 사려던 마음이었는데 점점 열심히 고르고 있는 나를 보니 웃음이 났다. "설악산" 이렇게 새겨진 단체복이라도 입은 느낌이었다.


<노르웨이 후드티. 아직도 잘 보관 중>


4일 후 베르겐 호텔에 체크인을 하니 직원이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며 창고 문을 러브하우스 오픈하듯이 열며 내 캐리어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가방 하나 매고 돌아다닌 며칠이 정말 가볍고 편하더라. 언제 이런 경험을 또 해보겠는가? 그래도 짐 찾자마자 한 건 라면 먹기.



3년 후, 핀란드에서 맘에 꼭 맞는 동행 언니를 만났을 때 일이다.

"러시아 항공 타고 왔는데 올 때 캐리어가 안 와서 며칠 고생했어요.."

"어휴 저도 그런 적 있어요. 그 항공사 고질병인가 봐요."


반전은 그 언니가 귀국할 때였다.

"악!! 또 캐리어 안 왔어!!"

"왕복으로 안 오다니 이게 무슨 일이래요.."

"데 빈손으로 집 가니까 너무 편하다. 짐은 택배로 보내준대요!!ㅋㅋ"

해맑게 웃던 그녀를 보니 다시금 그런 생각이 든다. 역시 인생사 마음먹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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