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곰돌이빵 Feb 27. 2020

도어락을  도대체 왜 안 쓰는 거야?

핀란드 열쇠 사수 대작전

정말 완벽한 하루였다.


상큼한 노란색에 접으면 손바닥만해지고 가볍고 수납공간도 많아 이건 딱 내 거라며 좋아하면서 산 백팩 안을 아무리 찾아도 헬싱키 숙소의 열쇠가 나타나지 않을 때까지는.


내일 국립공원에 가서 먹을 도시락을 싸려고 마트에서 산 계란, 고구마, 라즈베리와 한가득 생수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는 낑낑거리다가 결국 앞주머니, 양옆 주머니, 가방 안에 있는 안주머니를 뒤지다 못해 결국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가방을 통째로 뒤집었다.


보조배터리, 카메라, 겉옷, 지갑, 각종 영수증, 플리마켓에서 싸다고 산 무민 레트로 피규어가 땅바닥에 뒹굴고 먼지 한 톨까지 탈탈 털어도..


없다.


수많은 여행을 하면서도 호텔 카드키 한번 잃어버린 적 없던 내가, 이번엔 밥도 차려먹고 빨래도 해보자며 처음으로 에어비앤비를 이용하자마자 열쇠를 잃어버렸다.


<정말 예쁜 나의 첫 에어비앤비>


황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내보지만 대답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산 유심은 데이터 전용이라 전화도 할 수가 없다. 당장 오늘 밤은 어디서 자야 하지? 호텔 어플을 켜서 주변 호텔을 스캔하다가 에어비앤비 어플을 켜서 메시지 온 거 없나 확인하기를 반복하다가 다시 인터넷을 켰다가 초록창을 켠다.


띡띡띡띡띡.. '핀란드 열쇠 수리공 '


뭐라고? 핀란드는 열쇠 수리공을 부르면 출장비가 어마어마해서 핀란드인들은 술을 아무리 마셔도 열쇠를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몇몇 글을 눌러보니 유럽 전체가 열쇠를 엄청 중요하게 여긴다는 내용이었다. 열쇠를 잃어버려서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다는 등, 심지어 열쇠 보험이 있다는 얘기며 생소한 내용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독일에 거의 10년을 거주해온 친구한테 들은 얘기로는 도어락 쓰는 집을 본 적이 없다며 옆집 사람이 열쇠를 두고 나와서 출장비에 수리비까지 몇백 유로가 들었고, 스위스에 사는 형부는 열쇠를 잃어버렸더니 공동 현관과 개인 현관 모두 열리는 열쇠라서 건물 거주민들의 열쇠 전체를 교체해야 해서 2천 유로가 청구되었다고 한 얘기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런 젠장, 내 열쇠도 건물의 입구와 방을 한 열쇠로 열 수 있는 약간의 세미 마스터키였다.


그래, 잘 생각해보자. 잃어버린 게 아니라 집 안에 놓고 왔을지도 몰라. 여긴 문을 닫으면 자동으로 잠기니까 몰랐을 수도 있어. 창가 쪽에 항상 열쇠를 놨던 것 같은데 거기에 두고 그냥 나온 걸 거야. 그래 내가 열쇠를 흘렸을 리 없어.




하지만 열쇠를 잃어버렸든지 두고 나왔든지 일단 난 망했다. 호스트는 연락이 안 되고 마음은 급해서 호텔은 찾아지지도 않고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다 보니 문득 전화할 방법이 떠올랐다. 내일 국립공원을 같이 가기로 한 언니의 유심은 전화가 되는 거였다는 걸. 어제 처음 만난 사이에 이런 부탁하기는 그렇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인가.


안면 몰수하고 부탁해봤지만 호스트가 전화를 계속 안 받는다고 하니 여기서 2차 멘탈붕괴가 왔다. 정신이 혼미해 객관적 판단이 안됐던 나보다 이성적이었던 언니는 혹시 체크인할 때 열쇠를 받았던 키오스크에 가보는 게 어떻냐고 조언을 한다. '맞아 그거야!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기체 결함으로 5시간 비행기가 지연되고 핀란드에 도착했던 날, 횡단보도를 3개쯤 건너면서 왜 이렇게 체크인하는 곳이 먼 거냐며 투덜투덜거렸던 그 거리를 나는 우사인 볼트만큼 빠르게 미친 듯 주파해 순식간에 키오스크에 도착했다.


가만 보자... 내가 체크인했을 때와 같은 주인이 있어야 말이 좀 쉽게 통할 텐데. 나를 집이라도 털러 온 사람으로 보면 곤란한데. 딸랑~ 종소리가 울리고 문이 열렸을 때 카운터에서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내가 아는 그 얼굴이었다. 나이스! 1차 관문 통과.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키오스크 주인에게 말했다. '너 나 기억하지? 며칠 전 에어비앤비 체크인했던 애!' 다행히 동양인이 가뭄에 콩 나듯 있던 이 도시에서 그가 나를 기억하기는 정말 쉬웠다.  그리고 뛰어오느라 헥헥대면서 숨도 고르지 못한 채로 말을 이었다. '내가 키를 방에 두고 온 거 같은데.. 아니 두고 왔는데, 에어비앤비 호스트랑 연락이 안 된다. 혹시 너 여분의 열쇠 있니?'


파란 앞치마에 파란 눈을 갖고 있던 그 청년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따로 가지고 있는 건 없는데 내가 호스트한테 전화를 해 볼게.' 이미 제정신이 아닌 나는 외칠 말이 천 마디는 넘게 떠올랐지만 곤경에 빠진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인 그 청년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니 그 호스트 놈이! 메시지도 전화도 안 받는다고! 어디서 불금을 보내는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체크인하던 날에도 건물이 다 똑같이 생겨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주소 주변을 빙빙 돌면서 30분 동안 땀을 뻘뻘 흘려도 얼마나 연락이 안 되던지!'


그런데 어라? 한 번의 시도로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전화를 받은 듯 키오스크 주인과 뭔가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 언니의 유심은 국제전화로 표시되어 안 받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 아무 전화나 받으면 안되지.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 죽겠는데 핀란드어라서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일단 받긴 받았으니 다행이다. 전화도 하고 손님도 밀려와 정신이 없는 그를 차마 재촉하지는 못하고 계속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린다.


마침내 나의 신분을 다시 확인하고, 통화로 인해 뭔가 해결이 되었는지 그가 체크인 날 나에게 주었던 봉투와 모양은 같지만 다른 이름이 써져있는 봉투를 건넨다. 이걸로 문을 열고 돌려주면 된다며. 아마 다음 예약자에게 줄 열쇠도 미리 맡겨놨던 것 같다. 예약하기도 힘든 인기 많은 슈퍼 호스트라더니 이렇게 준비성이 좋을 데가! '오예!! 살았어!! 이렇게 예쁜 숙소를 두고 밖에서 자거나 내 전재산이랑 비슷한 금액을 내진 않아도 된다고!' 나는 계속 나의 초조함을 나눌 상대가 필요했기에 시종일관 상황보고를 했던 언니에게 살았다며 고맙다고 제일 먼저 이 기쁜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가는 그 짧은 길에서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던 나는, 과연 내가 정신 승리를 위해 열쇠를 두고 왔다고 생각하기로 한 건지 정말 두고 온 건지 혼란스럽기 시작했고 머릿속으로는 수 없이 오늘 갔던 동선을 복기했다.


<열쇠가 나오지 않던 나의 백팩..>


 '열쇠를 흘렸다면 쨍그랑 같은 소리가 났을 거야.' '아니지 어디 예쁜 풍경이나 물건에 정신 팔려서 떨어뜨렸는데 못 들었을지도 모르잖아?' '아냐 백팩 가장 안주머니에 넣었다고.' '안쪽 주머니여도 지퍼 있는 거 아니고 헤벌레~ 열려있잖아? 저번에 너 폴란드에서도 가방 열려있다고 외국인이 말해준 거 기억 안 나?'


젠장. 내 머리의 천사와 악마가 교대로 내 머릿속에서 싸우는 듯한 시간이 지나고 열쇠 봉투의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고, 짧디 짧은 다리로 한 발에 두세 계단씩  올라가 문을 열자마자 내가 이미 머릿속으로 수없이 그려서 이젠 정물화를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창틀에 도착했다. '거기에 있어라 있어라! 있기만 하면 앞으로 착하게 살게요 엉엉' 라며 돼도 안 되는 주문을 외며 말이다.


<오른쪽에 빼꼼 나와있는 저 창틀>

거기에는 은색의 반짝이는 그 어떤 보석보다 빛나 보이는 그 열쇠가 예쁘게 기다리고 있었다. '예스!! 찾았다!! 나이스!! 많지도 않은 재산이 더 이상 줄어들지 않아서 다행이야!! 열쇠 값으로 어디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 카드도 되나? 내 카드 한도가 2000유로는 넘지! 아니 카드 한도 신경 쓸 때가 아니고 열쇠나 돌려주러 가라고!!' 나는 더 늦기 전에 빌려온 열쇠를 돌려주기 위해 용수철처럼 튀어 미친 듯이 집 밖으로 뛰어나왔다.


왕복했던 길보다 훨씬 천국 같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착했을 때 마침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절대 집안에 열쇠를 놓고 나가지 말라며, 내일 그 열쇠를 다시 키오스크에 갖다 줄 수 있냐고 부탁하는 호스트의 말에 지금 이미 키오스크에 왔다며 다시 돌려주었다고 대답까지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저에게 이런 행운을 주셨는데요, 암요 당장 갖다 드려야죠!'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사람 마음이 다르다는 게 이런 걸까. 열쇠를 잃어버리지도 않았고, 예비 열쇠까지 확보해서 길거리에 나앉지 않게 되니 갑자기 도어락을 쓰지 않는 핀란드 사람들에게 의문이 생겼다. 내가 만약 호텔에서 방에 키를 두고 나왔다면, 마스터키로 쉽게 열었을 테니 이 생고생도 안 했을 거고 우리나라였더라면 도어락이라 열쇠 걱정도 안 했을 텐데 말이다. 아니다. 열쇠든 비밀번호든 내가 안 잃어버리면 될 일이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생활 방식이 있다. 수천 년도 더 된 방식을 교체하지 않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전통과 단순함을 중시하는 유럽 사람들은 이미 열쇠를 잘 챙겨 다니고 있고, 보험에 들면 잃어버려도 큰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데 굳이 다른 방식으로 교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도어락 회사는 일치감치 스웨덴의 회사에 인수되었고, 독일 국민은 도어락을 1%도 쓰지 않으면서 타국에는 수출을 하고 있다니 그들도 내수 시장의 성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듯하다. Global Trade Atlas의 통계에 따르면 슬로바키아는 유럽 중 도어락 시장이 확장되고 있는 추세인데, 자체 개발이 안되어 수입 100%로 충당하는데 수입국 중  1위가 바로 독일이라는 사실이 재미있다.



한숨 돌린 나는 냉장고에 마트에서 사 온 식재료를 넣고 목구멍이 타오르게 말라와 물을 찾았다. 내일 산행 대비 얼음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점원에게 스파클링이 아닌 스틸 워터가 어떤 것인지 물어서 사온 그것의 뚜껑을 여는 순간이었다.


푸쉬~


기포가 가득한 탄산이 내 얼굴을 가득 때렸다. 휴, 그래 아까 한 고생에 비해서는 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