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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돌이빵 Jan 15. 2021

한국에서 HB가 국룰인 이유

그래도 2H가 제일 좋은 걸

코흘리개 시절 자기 전에 꼭 한 일이 있다. 그건 가방 챙기기다. 벽에 붙여 놓은 시간표를 보고 교시 별로 교과서를 챙기고, 공책을 넣고, 준비물이 없나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제일 좋아했던 건 바로 연필 깎는 일이었다. 필통 안에서 연필을 꺼내 연필깎이로 정성스레 깎고 뾰족해진 심을 보고 있으면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필통을 살짝 흔들 때면 가지런히 넣어둔 연필들끼리 부딪히는 그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았다.



학교 앞 문구점에 가서 연필을 사던 기억이 다들 있을 것이다. 낱개로 파는 것들은 조금 다양한 연필의 종류가 있었지만 다스(dozen)로 파는 것은 대부분 HB다. 그렇다면 왜 연필은 12개 단위로 판매하는 걸까? 12진법은 고대 로마의 셈법이다. 유럽에서 연필을 수입했기 때문에 유럽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위가 남아있는 것이다.


연필심의 종류는 B와 H로 표시한다. B는 Black, H는 Hard를 가리킨다. B 앞에 있는 숫자가 클수록 무르고 진하고, 흑연의 비율을 나타낸다. H 앞에 있는 숫자가 클수록 단단하며 점토의 비율을 나타낸다. 즉, 흑연의 비율이 높을수록 물러지고 점토가 많으면 단단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HB는 점토 30%와 흑연 70%의 배합이다. 너무 단단하지도 않고, 너무 무르지도 않다는 이야기다.


연필은 1795년 프랑스 과학자 니콜라 자크 콩테(Nicola Jacques Conte)가 발명했는데, 그는 흑연과 점토를 섞어 원통 모양으로 만든 뒤 가마에서 굽는 방법의 연필심 제조법을 고안했다. 이 방법이 등장한 이후 우리는 흑연과 점토의 비율을 조절하면서 여러 종류의 연필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그림을 그릴 때 흔히 쓰는 연필은 우리가 필기용으로 쓰는 HB보다 훨씬 무르고 진하기 때문에 4B라는 표시가 붙어있다. H계열은 너무 단단해서 종이에 상처를 남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때에는 진한 B계열 중에서도 2B, 4B를 주로 사용한다. 또한 미술 시간에 쓰는 연필은 연필깎이로 깎지 않고 칼로 깎는 것을 보았을 텐데, 그 이유는 짙고 무른 4B 연필을 모터가 달린 연필깎이로 깎으면 뭉개지고 부러질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 영화를 보면 사무실에서 노란 연필을 쓰는 장면이 많은데, 미국 관공서에서는 정부 조달로 연필이 국가에서 지급된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연필보다는 볼펜이나 샤프를 선호한다. 그 이유는 둘의 언어 차이 때문이다. 모음과 자음, 받침이 결합된 한글보다 알파벳으로 수평으로 전개되는 영어는 굵은 연필로 사용하는 것이 더 가독성이 높아진다. 샤프심 시장에서도 한국과 일본은 0.5mm가 기본이며 0.3mm도 있지만 미국에서는 0.5mm, 0.7mm가 반반이며 0.3mm보다는 0.9mm, 1.0mm를 찾아보기 쉽다. 같은 이유로 만년필 시장에서도 독일 회사인 라미의 EF닙보다 일본 회사의 세일러 만년필 EF닙이 더 세필이다. (만년필 닙은 EF, F, M 순으로 가늘다)


<사용하고 있는 전동 연필깎이와 휴대용 자동 연필깎이>


연필은 글씨 교정에도 도움이 된다. 글씨를 잘 쓰려면 손 근육이 세밀한 작업을 잘할 수 있도록 발달을 해야 하는데, 볼펜은 잘 미끄러워지고 샤프는 심이 가늘어 손 힘을 조절하지 못하면 부러지기 쉽다. 비록 자주 깎는 것이 번거롭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연필이 좋다. 내 손에 가장 잘 맞고 가장 좋아하는 건 2H다.


나는 연필도 좋아하지만, 연필을 이루는 흑연과 같은 화학 성분을 가진 것도 좋아한다. 바로 다이아몬드다. 둘은 모두 탄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로 단단히 결합된 다이아몬드와 달리 흑연의 탄소 원자는 층을 이룬다. 흑연의 탄소층은 헐겁게 결합된 구조라서 쉽게 미끄러지고, 필압이 적용하면 탄소층이 벗겨지고 떨어져 나가면서 검은 가루가 된다. 이것이 글자나 그림의 선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표면이 거친 종이에는 요철에 흑연이 달라붙어 연필을 쓸 수 있고 유리나 쇠에는 연필을 쓸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은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편하게 구입할 수 있는 연필로 그 어떤 것보다 반짝이는 당신만의 글씨를 써 내려가 보는 건 어떨까.



(참고자료)

연필의 101가지 사용법, 피터 그레이

연필의 힘, 가이 필드

문구의 과학, 와쿠이 요시유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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