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는 것 자체보다 남긴다는 것의 즐거움
일기를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10대엔 끊임없이 다이어리를 쓰고 친구들과 교환일기를 쓰고 쪽지를 주고받고 편지를 썼다. 영화를 처음 본 11살 때부터 영화관 표를 모았다. 청소년의 영화비가 5천 원이었고, 조조영화를 통신사 할인으로 보면 2천 원이었다. 주머니 사정을 신경 쓰지 않고 취미 생활을 즐기기엔 최고였다. 스크랩북에 영화표를 모으고, 별점을 매기고, 감상을 썼다. 지갑에는 영화관 적립 카드가 종류별로 빼곡했고 지폐 칸에도 영화표가 가득 들어있었다. 요즘 영화표는 더 이상 '티켓'이 아닌 영수증으로 바뀌었는데, 처음엔 영화티켓이 사라졌다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추억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CGV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사진을 넣고 뽑는 포토티켓을 출시하기도 했다.
더 이상 필름 카메라를 쓰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진을 현상, 아니 인쇄해 언제든 꺼내보길 원한다. 포켓 프린터는 인기 있는 선물이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늘 설렌다. 하지만 난 이제 더 이상 영화표를 모으지 않고, 영화 티켓을 영수증으로 뽑지도 않는다. 주차 요금 정산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말이다.
요즘 미니멀리즘이 각광받고 있다. 나도 집에 있는 물건 중에 반 년이상 손을 대지 않는 물건이 있다면 미련 없이 버린다. 버린 이후 아쉬워서 '와, 이 물건 괜히 버렸네. 아이고 아까워라' 하는 생각이 든 적은 거의 없다. 비단 물질에 대한 소유욕뿐만 아니라 기록에 대한 소유욕도 적어지는 기분이다. 나에게 기록의 색깔이 엷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익숙함이 아닐까. 더 이상 나에게 영화는 유일한 취미가 아니다. 집에서 리모컨만 켜면 수많은 영화를 언제든 볼 수 있게 되었고 언제든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은 넘쳐난다. 처음 미국에 갔었을 때는 마트에서 받는 영수증도, 레스토랑에서 받은 명함 하나도 소중하게 여겼지만 여행의 경험도 점점 쌓이게 되니 수채화에 덧칠을 하듯이 점점 어두워졌다. 처음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는 일상, 에피소드 하나하나 모든 것을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도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희미해졌다.
하지만 기록을 한다는 것은 글이나, 사진 등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전부는 아니다. 기록을 함으로써 중요한 기억은 진해지고, 군더더기는 사라진다. 아침에 일어나서 1초 간격으로 한 일을 매일 기록한다면 미쳐버릴 것이다. 하지만 소중한 기억, 오래 간직하고 싶어 하는 순간을 기록하는 일은 그것의 가치를 더 올려준다. 기록하는 사람의 인생은 그렇지 않은 인생보다 더 가치 있을 수 있다. 매일매일 게임을 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뒹굴거리며 사는 삶을 산다면 사실 기록할 것도 없다. 하지만 분초를 쪼개 치열하게 산 사람의 기록을 보면 뿌듯함이 넘칠 것이다.
나의 기록 방식은 매일 실천하기로 한 루틴을 체크하는 것이다. 운동하기, 글 쓰기, 필사하기, 책 읽기, 걸어 다니기, 무의미한 쇼핑하지 않기 등의 목록을 만들어 놓고 이번 주에 몇 번을 성공했는지 통계를 낸다.
정기적 기록을 하는 것은 독서 목록과 필사 목록이다. 2019년부터 앱을 이용해 읽은 도서 목록을 기록하고 있다. 통계를 보면 취향도 알 수 있고, 내가 몇 월쯤에는 이런 책을 읽었구나 들여다볼 수 있어 즐겁다. 필사 목록은 나만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싶어서 노션에 기록하고 있다. 2020년 9월부터 아무리 바빠도 매일 필사하기 모임 '아바매필'을 이끌면서 날짜, 제목, 작가, 장르, 국가, 필사 문장으로 정리해보니 어떤 책을 필사했는지 한 눈에 보이고 이만큼이나 했구나 하는 뿌듯함도 든다. 벌써 110권째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우리의 기억은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오늘은 하루를 한 번 기록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