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열등감

그 정도면 잘 하는 건데요

by 에디터C 최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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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살면서 알게 된 여러 가지 사실 중 개인적으로 몹시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발견이 하나 있다. 바로 외국어 열등감을 갖지 않은 한국 사람을 만나기란 실로 어렵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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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보르도 어학원에서 프랑스어 기초반 수업을 들었을 때의 일이다. 내가 un, deux, trois, 하나, 둘, 셋을 배우기 시작할 때, 이미 프랑스 친구들과 같이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수다를 떨 수 있는 고급반의 한국인 학생들이 있었다.


"와, 불어 정말 잘 한다." 그 학생들 앞에서 내가 이렇게 감탄할 때, "그래요? 고마워요."라고 수긍하는 친구들은 단연코 한 명도 없었다. 모두들 손을 내저으며 "잘 하긴요. 맨날 똑같은 문장으로만 말하는데요."랄지 "아유, 저는 잘 하는 거 아니에요. 저보다 잘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라고 칭찬을 물리치며 불안한 눈빛을 내비쳤다.


재미있었던 것은 그렇게 겸손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한국인 학생끼리 모여 밥을 먹을 땐 자리에 없는 다른 한국 학생의 불어 실력을 신랄하게 품평하고 희화할 때가 있었다는 점이다. "A는 동사변화 규칙은 다 완전 무시하고 말하지 않냐?" "야, B는 발음이 진짜 후지잖아." 등등


적게는 예닐곱 살, 많게는 열두 살 어린 학생들이 쏟아내는 그 날카로운 평가의 언사들을 우연히 듣게 된 날은 이런 생각도 했다. 휴, 차라리 아예 못하는 기초반이라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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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를 외국인 앞에서 말하는 것보다 한국인 앞에서 말하는 게 더 긴장되고 불편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를 향해 깐깐하게 펼쳐놓은 평가, 비교, 견제의 레이더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틀리면 지적질하겠지, 못하면 쪽 팔리겠지... 이런 생각들이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다.


반면 외국어 실력에 대한 유럽 친구들의 기준은 관대한 편이다. 가끔 너무 관대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나 : "미안, 내가 영어를 잘 못해서."

A : "괜찮아.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있어. 나 영어 꽤 하거든."


이런 식으로 대화를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내 실력이나 그의 실력이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날 때가 있다. 고만고만한 실력인데 한국인인 나는 사과를 하고, 유럽인은 그는 자신감을 내비치는 경우.


그런 순간엔 서글픈 생각이 든다.

우리는 왜 이렇게 스스로에게 높은 잣대를 들이밀며 가혹해지도록 교육받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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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권 국가에 거주한지 2년 반이 되었고, 이제는 불어로 인터뷰도 하고 근근이 취재도 하러 다니며, 영어보다는 불어를 쓸 때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을 보면 un, deux, trois, 하나, 둘, 셋을 배우던 그때에 비해 굉장한 발전을 한 셈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 실력은 부족해'란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땔감 삼아 불어 공부에 열을 올린다면야 이롭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동기부여는커녕 맥만 탁 풀리는 게 현실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본능처럼 물들어버린 이 한국적 세계관을 어떻게 하면 탈색할 수 있을까.



스크린샷 2015-08-01 오전 10.57.41.png 프랑스 친구 에스텔의 한국어 공부 노트입니다. 참 귀엽죠. 외국인이 한국어를 이 정도만 해도 "아유, 잘 하네" 칭찬하는데, 왜 반대의 경우는 그토록 가혹하게 구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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