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엔 만화 위상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요? 그때는 부디 ‘아이들이나 보는 고상하지 못한 책’이라는 딱지를 벗게 되길 바랍니다. 만화를 향해 눈을 흘기는 편견, 공격이 부디 사라지길 바랍니다. 2000년대엔 만화가 문학이나 영화와 마찬가지로 온전한 표현 수단으로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만화계의 발자크 같은 작가가 분명 나타날 것이라고요. 그래픽 형식과 문학성을 겸비한 진짜 걸작을 만드는 작가가 분명 있을 거라고요.”
- 1969년 1월 20일, 에르제
1983년 2월 25일, 엠뷸런스 한 대가 75세의 조르주 레미(Georges Remi)를 싣고 급히 브뤼셀의 생뤽병원(Saint-Luc)으로 들어선다. 오랫동안 백혈병을 앓다가 갑작스러운 심박동 정지 상태에 빠진 그는 에르제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벨기에의 국민 만화가였다. 3월 3일 밤 10시경, 의사는 최종 사망 선고를 내리고, 벨기에를 너머 유럽 전역으로 이 소식이 전해졌다. 특히 프랑스, 독일 언론사들은 속보와 특별 편성으로 에르제를 추모했다.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Libération)이 3월 5일자 1면에 애통함을 표현할 정도로 많은 유럽인들이 에르제의 별세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1929년 첫 작품 ‘땡땡과 밀루(Tintin et Milou)’부터 생전에 남긴 마지막 작품 ‘땡땡과 피카로(Tintin et les Picaros)’까지, 에르제의 작품은 이미 1930년대부터 포르투갈,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등에서 번역 출간되어 큰 사랑을 받고 있었다. 특히 1950-60년대에 태어난 이들은 땡땡을 유년기의 친구이자 영웅으로 기억하며, 자녀가 태어나면 에르제의 만화를 물려주어 함께 보았다.
이렇게 대를 이어 내려오는 독자들의 지지 덕분에 2007년 기준으로 ‘땡땡의 모험’ 시리즈는 72개 언어로 번역되어 2억 부가 판매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이 “세계에서 나의 유일한 라이벌이 있는데, 바로 땡땡이다.”라는 말을 남겼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2011년 영화 <땡땡 : 유니콘호의 비밀>를 발표하며 에르제에 대한 경의를 표한 바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만화가, 박제된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여전히 새로운 독자를 유혹하는 현재진행형의 작가, 에르제(Hergé)를 만나기 위해 그의 박물관이 있는 브뤼셀 남동쪽의 작은 대학 도시 루뱅 라 뇌브(Louvain la Neuve)를 찾았다.
오직 에르제에게 헌정한 공간
에르제는 1929년 1월 <Petit Vingtième>이라는 주간 어린이 잡지에 처음으로 땡땡 캐릭터를 선보였다. 포마드로 앞머리를 말아올리고 트렌치 코트를 휘날리는 것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땡땡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는 하얀색 폭스테리어 ‘밀루’. 둘은 전 세계 이곳저곳을 누비며 악당들을 물리친다. <소비에트에 간 땡땡><콩고에 간 땡땡><미국에 간 땡땡> 등 전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꼬마 저널리스트 땡땡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즉각적이어서 연재는 순항했다.
땡땡이 국민 만화가 된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1934년, 작가 나이 27세에 발표한 <푸른 연꽃>편부터였다. <푸른 연꽃>은 당시까지 미지의 땅으로 여겨졌던 중국의 문화를 사실적으로 담아내면서 기존에 존재하던 아시아에 대한 서구 세계의 편견과 오해-딸이 태어나면 강물에 아이를 버린다, 여자들은 전족을 해서 걷지도 못한다, 아시아인은 무식하고 잔인하다 등-를 깨는 작품이었다.
원래 중국을 미개한 나라로 다루려 했던 에르제가 동양 문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동갑내기 중국인 ‘장종젠(Tchang Tchong jen)’과의 우정 덕분이었다. 장은 브뤼셀 보자르(Beaux Arts) 예술 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에르제가 중국을 미개한 나라로 다루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장은 에르제에게 찾아가 중국의 오랜 문화에 대해 설명하고, 그 노력 덕분에 에르제는 편견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중국을 바라보게 되었다.
에르제는 <푸른 연꽃>에 직접 장을 출연시키며, 땡땡과 장이 인종과 국경을 넘어 우정을 쌓는 과정을 그렸다. 이 작품이 공전의 대성공을 거두어 에르제는 20대 때 대중적 인지도와 흥행 파워를 가진 작가 반열에 올라선다.
그로부터 40여년 간 20여 권의 에피소드를 더 출간하고 건강 악화로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던 1979년, 에르제 기념관 건립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에르제 별세 후 3년 뒤인 1986년 ‘에르제 재단’이 조직되었고, 15년의 꼼꼼한 준비 기간을 거쳐 2001년 ‘에르제 박물관’의 건립 확정 소식이 전해진다.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 크리스티앙 드 포잠박(Christian de Portzamparc)의 손길로 2007년 드디어 에르제 영혼의 모든 것을 담아낸 박물관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가족 앨범 속 유년기 사진부터, 어린 시절의 스케치북, 광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했던 10대 시절의 작품, 땡땡 캐릭터 탄생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실험판 ‘토토르(Totor)’까지, 약 800여장의 사진과 80여장의 포스터, 수많은 스케치, 에르제 생전 매체 인터뷰 자료 등이 총 8개의 전시장 안에 집요할 정도로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다. 제국주의 시대, 영화와 땡땡, 우주로 간 땡땡, 제 3세계 여행자 땡땡 등 전시장마다 배정된 키워드는 에르제 커리어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이자, 20세기 서양 문화사의 요약본처럼 보이기도 했다.
박물관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터치 스크린식 오디오 가이드의 꼼꼼한 컨텐츠와 기획력. 입장료를 내면 무상으로 대여해주는 이 멀티미디어 가이드는 단순히 작품 설명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작가 에르제의 음성 파일, 친구나 동료의 증언, 당시 신문 기사, ‘땡땡의 모험’에서 소개된 각 국가의 당시 시대 상황 등 풍부한 역사 자료가 흥미를 자극하는 쌍방향 소통 방식으로 관람객을 에르제의 작품 세계 안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Musée Hergé
관람시간 : 화~금(월요일 휴관) 10시30분~17시30분 / 주말 10시~18시
관람료 : 일반 9.5유로, 학생 등 할인 7유로 / 매월 첫번째 일요일 무료 입장
주소 : Rue du Labrador, 26 - B-1348 Louvain-la-Neuve
문의 : +32 10 488 421
홈페이지 : www.museeherge.com
에르제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
에르제가 작품 활동했던 시기는 1930년 무렵부터 1970년까지다. 활동 초창기는 제국주의가 전성기에 이르렀던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유럽 강국들이 모두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던 때. 에르제가 땡땡 시리즈를 처음 연재했던 주간지 <Petit Vingtième>은 카톨릭 극우 성향의 매체로, 에르제는 별 다른 문제의식 없이 언론사의 논조에 맞춰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내용을 그리기도 했다.
특히 벨기에 레오폴드 2세 국왕이 전세계에서 유래없는 폭정을 펼친 식민지 콩고에 대한 에피소드 <콩고에 간 땡땡>은 토착민을 원숭이에 비유하는 등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 편견이 짙게 녹아 있어 1940년대에 에르제를 향해 비난 여론이 쏟아지기도 했다. 결국 1946년 에르제는 판매되던 책들을 모두 회수해 문제가 된 장면을 삭제하는 조취를 취하게 된다.
사실 벨기에와 콩고 사이 역사는 비극 그 자체다. 콩고의 모든 자원을 벨기에 국왕 개인의 재산으로 삼았으며, 주 수입원이었던 고무 농장에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손목을 자르거나 사살하는 야만적인 통치를 벌였다. 레오폴드 2세가 통치한 1885년부터 1908년 사이 25년간 콩고 전체 인구의 15%(벨기에 측 추산)가 몰살됐다. 적게는 1천만 명에서 2천 만명의 콩고인이 몰살되었다는 콩고 측 추정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제가 <콩고에 간 땡땡>를 그렸던 1930년대에 레오폴드 2세에 대한 벨기에 국민들의 여론은 긍정적이었다. 콩고에서 벌어들인 돈을 벨기에 복지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에르제 역시 자신이 제국주의 시각을 갖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에르제의 시각을 깨우고 그의 커리어에 큰 전환점을 마련해 준 존재가 바로 앞서 언급했던 중국인 유학생 ‘장종젠’이다. 그와의 교류 덕분에 스토리를 만들기 전, 그 지역에 대한 철저한 밑조사를 해 올바른 현실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자각을 갖게 된 에르제는 이후 작품부터 백인 우월주의 시각에서 벗어나 진정한 모험가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에르제를 이해하는 첫번째 키워드 ‘백인 중심 세계관과 한계 인식’은 이렇게 탄생하게 됐다.
1935년에 장이 중국으로 돌아가며 헤어진 둘은 에르제의 병세가 깊어가던 1981년 드라마처럼 다시 재회한다. 둘의 재회 장면을 담기 위해 출동한 수많은 방송, 신문사의 카메라 앞에서 에르제는 “세계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눈을 갖게 된 것은 모두 이 친구 덕분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장이 등장하는 중국에서의 모험기 <푸른 연꽃>편 이후, 에르제는 모든 작품을 그리기 앞서 배경 국가에 대한 철저한 공부를 한다. 에르제를 이해하는 두번째 키워드로 ‘저널리스트’를 꼽은 이유다. 에르제 박물관에는 에르제가 생전에 모았던 외국 국가에 대한 신문 스크랩, 역사서, 사진집, 탐험가의 기행문 등이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다. 에르제는 미국의 탐험 전문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유럽으로 수출되었을 때, 가장 먼저 정기구독을 신청한 독자들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각 지역에 대한 특수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가 1960년에 발표한 <티베트에 간 땡땡>에서 꽃을 피운다. 달라이 라마가 “사람들이 티베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소중한 책.”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수준 높은 완성도와 균형 잡힌 시각을 선보인 것.
철저한 자료 조사로 놀라운 성취를 이룬 다른 시리즈로는 1950년부터 1954년까지 그린 <달나라에 간 땡땡>과 <달 탐험 계획>이 있다. 에르제를 이해하는 세번째 키워드는 바로 ‘과학 실험실’. 모험의 배경을 우주로 넓힌 이 시리즈에서 에르제는 땡땡이 달까지 타고 가는 우주선을 그리기 위해 당시 우주 과학 기술에 대한 자료를 모았고, 그것들을 작품 안에 상당히 구체적으로 반영한다.
실제로 만화 안에는 우주선에서의 무중력 상태 모습, 달 중력과 지구 중력의 차이, 분화구 모양의 달 지형 등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과학 교재로 사용해도 손색없을 정도다. 루이 암스트롱이 실제로 달에 발을 딛기 10년에 이미 그 과정을 모두 만화로 그려낸 그의 놀라운 취재력과 상상력을 기억하기 위해 벨기에 우주항공국은 화성과 목성 사이 소행성에 에르제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사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에르제는 한 명의 만화가가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준다. 물론 한계도 명확히 보여주는 작가다. 그에 대한 평가는 20세기 격동의 시대 상황과 이념에 따라 달라졌지만, 변함없는 사실 하나는 앞으로도 대체불가능한 벨기에의 국민 영웅으로 남아있을 거란 점이다.
*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도서관이야기> 2015년 7월호에 기고한 초고입니다. 최종 게재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글을 쓴 최혜진은
자발적 마감노동자.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명화가 내게 묻다><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 저자, 계간지 <볼드저널> 콘텐츠디렉터. www.radiohead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