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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Jul 16. 2017

[그림책의 일] 프랑스 현대 그림책 발전사

레꼴데르와지르 출판사 50주년을 통해 본 역사

출판사 한 곳의 역사가 그 나라의 도서 시장 발전사를 온전히 반영하고 대변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것도 전 세계에서 출판사 수와 단행본 종수가 가장 다양한 곳으로 꼽히는 프랑스에서 말이다. 2015년에 창립 50주년을 맞은 아동도서 전문 출판사 레꼴데르와지르(l’école des loisirs)의 역사라면 가능하다.


한 해동안 이어지는 50주년 책 축제 


레꼴데르와지르(l’école des loisirs) 출판사의 전신은 레꼴(L’école)이라는 이름의 학습용 교재 출판사다. 1922년 레이몽 파브리(Raymond Fabry)가 설립했고, 그의 사위 장 파브르(Jean Fabre)가 20년간 배운 출판 노하우를 살려 1965년, 당시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콘셉트의 창작 그림책 전문 출판사로 탈바꿈시킨 것이 레꼴데르와지르의 시작이었다.

계기는 1963년 프랑크프르트 도서전이었다. 레꼴데르와지르의 창립자라 할 수 있는 장 파브르가 도서전을 돌면서 학습이나 교훈 목적의 책 외에 아이들의 감성을 어루만지는 ‘놀거리’로서의 책 시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학교라는 의미의 ‘레꼴(l’école)’에 당시 아이들에겐 허락되지 않았던 여가와 취미를 뜻하는 르와지르(loisirs)를 붙인 모순적인 이름. 그 낯섦과 혁신성이 곧 출판사의 정체성이 되었다.


50년이 지난 지금 레꼴데르와지르 출판사의 위상은 한마디로 ‘국가대표’라고 표현하는 게 옳겠다. 프랑스 국립아동도서센터(CNLJ)의 간행물 부문 디렉터이자 도서관 발행 비평지 <La Revue des livres pour enfants>의 편집장을 맡고 있는 마리 라루에 씨에 따르면 매해 프랑스에서 발행되는 아동도서 신간의 4분의 1이 매해 레꼴데르와지르 출판사를 통해 출판된다. 1965년 창립 이래 지금까지 발행된 단행본은 6,000여권이고 그 중 20%만이 해외 도서 번역본이다. 즉 80%에 해당하는 5,000권이 레꼴데르와지르가 작가를 발굴하고 판권을 보유한 도서라는 의미다.


소속 작가의 면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하다. 프랑스 그림책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토미 웅거러(Tomi Ungerer)를 필두로 상상력의 대가 클로드 퐁티(Claudi Ponti), 유쾌한 이야기꾼 필립 코랑텡(Philippe Corentin), 강렬한 이미지의 대가 그레고아르 솔로타레프(Grégoire Solotareff), 몽환적인 작품으로 자기 세계를 구축한 나자(Nadja) 등 프랑스 아동도서계의 가장 중요한 거장들이 레꼴데르와지르에서 책을 냈다. 중견 작가, 신진 작가까지 다 읊자면 원고를 작가 이름으로만 다 채우게 되니 이쯤에서 넘어가야겠다.


이렇게 막강한 작가진을 구축한 데에는 장 파브르와 함께 레꼴데르와지르의 기틀을 마련한 공동 대표 아투르 위브슈미드(Arthur Hubschmid)가 큰 역할을 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프랑스 아동도서는 틀에 박힌 교훈을 전하는 전형적인 동화책이나 학습 목적의 교육 서적이 시장의 주류로 유통되고 있었다.

어린이들이 읽는 책도 예술적인 경험을 하고 미의식을 고취하는 도구여야 한다고 믿은 레꼴데르와지르 출판사는 1969년 그림책 편집을 연구하는 자회사 SEREG를 설립했고, 그 조직을 이끈 인물이 바로 위브슈미드였다. 신선한 비주얼로 새로운 상상을 하는 작가들에게 출판 기회를 활짝 열어주는 레꼴데르와지르 출판사가 없었다면 프랑스에서 그림책이 종합적인 예술 작품으로 자리잡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런 상징성과 존재감 덕분에 사기업임에도 불구하고 2015년 창립 50주년을 온 나라가 함께 축하하는 분위기다. 50주년 기념 홈페이지(50ans.ecoledesloisirs.fr)에는 출판사에서 자체적으로 기획해 프랑스 전국 각 도시에서 열리게 될 50주년 기념 전시회, 행사, 작가와의 만남 등 이벤트 스케줄이 130여개 이상 안내되고 있다.

출판 관련 정부 기관들도 힘을 보탠다. 리옹의 국립도서관은 4월과 9월에 50주년 기념 강연회를 개최하고, 파리에 있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BnF는 올해 12월, 레꼴데르와지르의 50주년 발자취를 정리하는 큰 전시회를 기획하고 있다. 10월 파리의 장식예술박물관 (le musée des Arts décoratifs)에서는 레꼴데르와지르의 대표 작가의 원화전이 열릴 예정이며, 이 행사는 프랑스 전통의 명품 하우스 에르메스(Hermès)가 후원한다.

또 아동복 브랜드 쁘띠 바토(Petit Bateau)는 6월부터 전국 400개 매장에서 레꼴데르와지르 50주년 기념 컬렉션을 판매할 예정이다. 물론 프랑스 전국의 서점 어린이 코너에서도 이들의 5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기념품과 특별 책자 배포로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레꼴데르와지르가 세운 첫 기록들  


이렇게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축하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아동도서계에 레꼴데르와지르가 남긴 발자취가 의미깊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부터는 그 행보와 당시 사회적 맥락을 자세히 살펴보겠다.


첫 번째, 1974년 프랑스 최초로 어린이 전용 서점 ‘Chantelivre’를 설립했다. 레꼴데르와지르는 창립 직후미국 작가 모리스 센닥의 그림책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레오 리오니의 <파랑이와 노랑이>를 불어로 번역 출간했다. 아동도서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과 금기를 깨뜨리는 이 작품들을 필두로 이엘라 마리, 토미 웅거러 등 모더니스트 작가들의 작품을 연이어 출간했지만 최종 유통망인 서점의 인식 변화는 더뎠다. 현재 Chantelivre 서점의 디렉터로 일하는 피에르 질 플라수 씨 회상에 따르면 1970년대까지만 해도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어린이 코너를 운영하지 않는 서점들이 대다수였다고 한다. 레꼴데르와지르 출판사는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최초로 파리 세브르가(rue de Sèvres)에 어린이 전용 서점을 오픈한다. 이 서점은 지금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어린이 독자는 물론 아동도서 연구자나 작가들의 사랑방으로 통한다.


두 번째, 1975년 프랑스 최초로 어린이용 문고판 ‘Renard Poche’ 시리즈를 출간했다. 어린이 그림책은 양장에 두께도 어느 정도 두껍고 무엇보다 값 나가게 보여야 사람들이 구입한다는 기존의 인식을 뒤엎고, 이야기의 힘과 그림의 퀄러티만으로도 충분히 독자의 일상에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문고판의 대히트를 지켜본 경쟁 출판사 갈리마르(Gallimard)는 2년 뒤 ‘Folio poche’로 문고판 시장에 뛰어든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아동도서의 포맷, 가격 다양화가 본격화되며, 지금까지도 어린이 그림책의 문고판 시장은 굳건히 한 축을 도맡고 있다.


세 번째, 1981년 프랑스 최초로 그림책을 정기구독하는 형태의 독서 클럽을 만들었다. 이 전통은 현재 l’école des max라는 이름의 클럽으로 이어지고 있다. 신생아부터 13세까지 나이대별로 그룹이 나뉘고, 1년에 40~50유로 정도의 구독료를 내면 매달 출판사가 엄선한 책을 받아볼 수 있다. 각 그림책을 활용한 독서 놀이, 교육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는 게 특징이다. 이 독서 클럽을 매개로 어린이 참여 공모전 등을 벌이며 초등학교, 도서관과 같은 교육 현장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네 번째, 2002년 프랑스 교육부가 개편한 초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레꼴데르와지르 출판사 책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프랑스 그림책 역사에 중요한 분수령이 된 초등 교과 과정 개편의 골자는 이렇다. 교육부가 공식 추천목록을 만들고 각 학교에선 이 중 10권의 책을 골라 1년 동안 학생과 함께 나누며 공부한다. 프랑스엔 교과서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처럼 작품의 일부만 발췌해 교과서에 싣지 않는다.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파고드는 것, 그 자체를 훌륭한 공부로 여기기 때문이다. 교육부 공식 추천목록의 장르도 그림책, 만화, 전래동화, 시 등 무척 다양한 것이 특징. 2002년 이 개편안으로 레꼴데르와지르 출판사는 교육부 추천 도서를 가장 많이 보유한 출판사라는 또 하나의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다섯 번째, 오프라인 서점과의 상생을 꿈꾸며 출판사의 마진을 양보했다. 1970년대 레꼴데르와지르 출판사가 어린이 전용 서점을 내게 된 또 다른 배경은 ‘도서 할인 경쟁’도 있었다. FNAC(프랑스 최대 서점 브랜드)이 파리에 체인 서점을 내면서 책값의 20% 이상을 할인해주는 이벤트로 도서 시장 질서를 흔들었고, 1982년 1월 1일,  5%이상의 할인을 금지하는 도서 정가제가 법제화 되기 전까지 서점가의 할인 경쟁은 아동도서계의 체질을 약화시키는 주요한 원인으로 꼽히곤 했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1974년 어린이 전용 서점을 냈던 레꼴데르와지르 출판사는 동네 서점들이야말로 자본으로부터 프랑스가 지켜야 할 소중한 공간이라고 믿는다. 2011년, 출판 환경 변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자본 서점들을 위해 서점 마진율을 37%로 올리는 의미있는 결단을 내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37%의 마진율은 기존의 통상 마진율보다 5~10% 높은 수치다. 사기업임에도 시장 전체의 균형과 상생을 위해 행동하는 이런 태도 덕에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교사, 사서 등 출판계 구성원들로부터 더 큰 신뢰를 얻게 된 것은 물론이다.



지난 12월 초, 몽트뢰이 아동도서전 취재 때가 생각난다. 당시 프랑스 국립아동도서센터(CNLJ)의 교육부문 디렉터 클로딘 에르부에 여사님이 내 손을 끌고 인파를 헤치며 “이 출판사는 프랑스에서 정말 중요한 존재”라며 레꼴데르와지르 부스로 데려가셨다. 그때 보였던 표정과 눈빛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순수한 자부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사기업 출판사 하나가 문화 강국 프랑스의 자부심이 되었다. 어린이 책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지평을 넓히고, 아이들 독서 습관과 부모의 구매 행태에 영향을 주었다. 책을 가꾸고 그 다음 책을 둘러싼 환경을 가꿨다. 좋은 책을 짓는다는 것의 의미는 뭘까. 책을 매개로 이뤄낼 수 있는 변화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레꼴데르와지르의 역사를 살펴보는동안 머릿속에는 이런 거창한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도달한 마지막 질문. “한국엔 이렇게 존경받는 아동도서 전문 출판사가 있던가?” 대답은 독자의 판단에 달렸다. 많은 사람들 입에서 ‘있다’라는 답이 나오면 좋겠다. ‘없다’라는 답이 우세하다면 질문을 바꿔야 할 타이밍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이런 출판사를 가질 수 있을까?”



* 레꼴데르와지르 50년 역사의 대표 그림책들


1965년

웅미 웅거러 <세 강도 Les trois brigands>

 말이 필요없는 프랑스 그림책의 거장. 웅거러는 프랑스인이지만 1960~70년까지 미국에 머물며 대부분의 작품을 선보였다. 당시 그와 교류하던 모리스 센닥도 이 시기 프랑스에 소개되며 본격적으로 프랑스 아동도서계가 권선징악식의 교훈적 동화에서 벗어나 다양한 주제를 다루게 된다.


1968년

이엘라 마리 <빨간 원의 모험 les aventures d’une petit bulle rouge>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2014년 82세 나이로 고인이 된 그림책 작가 겸 디자이너. 개념과 추상을 비주얼로 표현하는 글 없는 아티스트북의 대가다. <빨간 원의 모험>은 프랑스 교육부 교과 과정 추천 도서다.


1989년

그레고아르 솔로타레프 <루루 Loulou>

 1953년 이집트에서 태어나 의사로 일하다 그림책 작가가 된 독특한 경력을 지녔다. 1986년부터 레꼴데르와지르의 임프린트인 ‘Loulou & Cie’를 경영하면서 수십권의 그림책을 그렸다. <루루> 3부작 역시 프랑스 교육부 교과 과정 추천 도서다.


1989년

나자 <푸른개 chien Bleu>


1955년 이집트에서 태어난 작가로 현재는 프랑스에 머물며 작품활동을 한다. 몽화적이고 신비한 이야기꾼으로 알려졌으며, 그레고아르 솔로타레프와 공동 작업으로 십여권의 그림책을 만들었다.


1991년

필립 코랑텡 <풍덩 Plouf>


1936년 태어난 필립 코랑텡은 유머감각 넘치는 펜화로 <보그><엘르> 등 패션잡지 일러스트레이터로 경력을 시작했다. <먹고 귀신과 늑대와 꼬마와 과자 이야기><아빠!>와 같은 재기발랄한 책을 연달아 발표하며 아동문학계의 중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2000년

아나이스 보즐라드 <돌멩이 수프 Une soupe au caillou>

 사진을 공부하고 19세부터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한 작가로 한국에선 <전쟁 La guerre><요술 매트><꼬마 요괴의 점심식사> 등의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돌멩이 수프>는 프랑스 교육부 교과 과정 추천 도서다.


2002년

스테파니 블레이크 <까까똥꼬 Caca Boudin>


프랑스 유아들이 장난치고 싶을 때 말끝마다 붙이는 아이들 세계의 은어 “까까부당”이 책 제목이 된 이 귀여운 토끼 ‘시몽’ 시리즈는 한국에서도 10권 시리즈 전부가 출판되었다.


2011년

마티유 모데 <난 갈 거야 J’y vais!>


레꼴데르와지르에서 최근 가장 활발히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는 그림작가 마티유 모데와 글 작가 장 르로이 듀오다. <약속 꼭! 꼭 지킬게><으악 늑대다><다섯 발가락> 등 둘이 함께 작업한 책들 대부분 한국어로도 출간됐다. 글 작가 장 르로이는 현직 교사다.


2012년

이방 포모 <트로이 Troie>


1946년생 만화가 겸 그림책 작가. 한국에도 번역출간된 <모던보이 알렝>으로 대작가의 반열에 올라선 그는 최근 프랑스 내 중요 아동도서상에 이름을 가장 빈번히 올리는 작가다. <어느 날 밤 고양이가><우리, 우리의 역사> 등의 대표작이 있다.



*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도서관이야기> 2015년 6월호에 기고한 초고입니다. 최종 게재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글을 쓴 최혜진

자발적 마감노동자.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명화가 내게 묻다><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 저자, 계간지 <볼드저널> 콘텐츠디렉터. www.radiohead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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