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벨기에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불어권 그림책 작가 10인의 아틀리에에 직접 찾아가 인터뷰한 결과를 묶은 책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은행나무, 2016)를 출간한 뒤,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프랑스 그림책만의 특징이 있나요?”
거창하게 전세계 여러 국가들의 그림책 경향과 비교한 프랑스만의 특징을 비평할 깜냥은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받으면 보통은 “글쎄요. 표현이 거침없고 다루는 주제가 굉장히 다양한 것 같아요.”라고 짧게 대답한다. 오늘은 그동안 얼버무렸던 이야기,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의 시선에 놀라워 보였던 프랑스 그림책의 특징에 대해서 말해보려고 한다.
책을 쓰기 위해 6708km를 이동해 열 명의 그림책 작가를 인터뷰 했는데, 첫 인터뷰이였던 조엘 졸리베(Joëlle Jolivet) 작가가 ‘시각적 문해력을 키워주고 싶은 한국의 부모를 위해 조언해달라’는 나의 부탁에 이렇게 답했다.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그림 읽는데 재능이 있어요. 이런 질문은 오히려 아이들이 던져야 할 것 같은데요? 부모님이 그림책 속 이미지를 이해 못해요. 조언을 좀 해주세요, 라고요. (웃음)”
어린이 독자에 대한 나의 인식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던 순간이다. 어린이 독자가 어른 독자보다 나은 점이 있고 더 잘하는 게 있다는 발상, 참으로 신선했다. 한국 사회는 반대되는 합의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아이는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보호와 양육의 대상이고, 부모가 잘 빚어주어야 한다는 생각. 이런 맥락에서 아이가 읽을 책을 부모가 열심히 조사하고 공부해서 고르고 준비시켜 놓는 걸 당연시한다. 그런데 어른보다 아이가 오히려 그림책 읽는 눈이 맵다니?
어린이 독자의 시각적 문해력을 믿는 그림책 작가는 조엘 졸리베 뿐이 아니었다. 프랑스 초등학교 교사들이 교육 자료로 가장 많이 활용하는 작가 중 한 명이자 가장 프랑스적인 그림책을 만드는 거장으로 평가받는 클로드 퐁티(Claude Ponti) 역시 인터뷰를 하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아이들을 믿어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디즈니식의 해피엔딩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에게 제 이야기가 통할 거라는 믿음이 있죠.”
벨기에를 대표하는 그림책 작가이자 <파란 시간을 아세요?><바람은 보이지 않아>처럼 놀랍도록 철학적인 그림책을 짓는 안 에르보(Anne Herbauts)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제 책 <월요일>은 부모님들이 읽고 나서 특히 겁을 먹는 책이지요. 마지막에 주인공이 죽은 거냐는 질문을 엄청나게 받았는데요. 독자가 각자 느끼고 추측하면 될 뿐이에요. 아이들은 오히려 혼란에 빠지지 않고 뒷이야기를 맘껏 상상하며 모호성 자체를 즐길 줄 압니다. 매사 결론을 짓고 답을 내려는 건 어른들의 강박이죠.”
어린이 독자의 상상력과 문해력이 어른보다 낫다는 믿음을 가진 불어권 그림책 작가들은 자신의 작업을 ‘아이용 vs. 어른용’으로 딱히 구분짓지 않는다. <파리에 간 사자><조금 부족해도 괜찮아>를 쓰고 그린 베아트리체 알레마냐는 인터뷰 중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예술가로서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그림책이라는 매체로 표현할 뿐이에요. 독자는 어린이가 될 수도, 어른이 될 수도 있죠.”
만든 이들의 태도가 이렇다보니 그 창작물을 받아들이는 독자나 비평가도 연령이라는 기준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그림책을 대한다. 일례로 프랑스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아동문학 평론가 소피 반 더 린덴(Sophie Van der Linden)이 쓴 그림책 가이드 북 <아이를 위한 책을 찾고 있어요>엔 이런 조언이 나온다.
“만약 4세 아이가 신생아 책을 본다면 그건 퇴행이 아니라 그 순간에 아이 내면에 어떤 필요가 있는데, 그걸 그 책이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과도하게 의식하며 책을 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좋은 책은 모든 연령이 즐길 수 있으니까요.”
최근 그림책 업계에서 ‘크로스오버 그림책’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흔히 어린이용 문학 장르로 여겨졌던 그림책이 모든 연령층의 독자를 사로잡으면서 생겨난 말이다. 캐나다 브록대학교(Brock Univerity)의 샌드라 베킷(Sandra L. Beckett) 교수가 2012년 <크로스오버 그림책 Crossover Picturebooks>이라는 연구서를 내놓으면서 개념과 역사를 정리했는데, 그녀가 오랫동안 프랑스 그림책 역사를 연구해왔던 불문학 교수라는 사실에는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책의 첫 장의 포문을 프랑스의 전설적 그림책 편집자 프랑수아 뤼-비달(François Ruy-Vidal)의 말로 열었다. 프랑수아 뤼-비달은 1960년대 후반에 마르게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외젠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 같은 거장 문학가에게 글을 받고 신진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을 더해 그림책을 짓는 혁신으로 주목받았던 편집자 겸 아동문학가다.
“어린이를 위한 예술이 아니라 예술이 있다.
어린이를 위한 그래픽이 아니라 그래픽이 있다.
(…)
어린이만을 위한 문학이란 건 없다.
그저 문학이 있을 뿐이다.”
프랑스는 어떤 이유에서 크로스오버 그림책이라는 문화 유산과 가치관을 보유하고 또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누려올 수 있었던 걸까? 결국 내가 만난 10명의 불어권 그림책 작가들은 이 문화 유산의 수혜자들일테니, 호기심을 쫓아 현대적인 프랑스 그림책의 뿌리, 그 가장 처음을 향해 한 발 더 들어가봐야겠다.
프랑스 그림책도 처음에는 예술적 목적보다는 교육적 목적에 맞게 만들어졌다. 글씨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철자 연습, 글 읽기, 색칠하기 등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아베쎄데르(L’abécédaire) 장르는 어린이를 향해 만든 최초의 도서 장르다. 이런 아베쎄데르는 이미 1830년대 이전부터 출판 유통되고 있었다. 1860년대부터 컬러 인쇄술의 발달로 예절, 신화, 지리, 역사, 어학 등의 다양한 정보를 설명하는 어린이 책이 등장했고, 컬러 일러스트가 풍성해질 수 있었다.
1880년대에 들어 모리스 부테 드 몽벨(Maurice Boutet de Monvel)같은 뛰어난 화가가 어린이책 작업에 뛰어들면서 프랑스 아동 도서의 판형과 주제가 눈에 띄게 다양해졌다. 부테 드 몽벨이 만든 <어린이를 위한 옛 노래와 원무곡 les Vieilles chansons et rondes pour les petits enfants> 악보집은 지금 봐도 그 현대적인 그래픽에 입을 다물기가 힘들다.
(c) Maurice Boutet de Monvel - les Vieilles chansons et rondes pour les petits enfants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에 등장한 책 <마카오와 코스마주 Macao et Cosmage>는 그림책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완전히 전복시킨 혁신적인 작품이다. 이 책은 분명 기억할 가치가 있다. 작가 에디-르그랑(Edy Legrand)은 글자와 그림이 서로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그림책 레이아웃을 깨고 글과 그림을 유기적으로 배치하거나 펼침면 효과를 적극 활용하는 대범함을 선보였다. 특히 이 책은 1920년대 무렵 유행했던 인상주의, 아르데코 등 당대 회화 예술의 다양한 요소를 그림책 안으로 소화시켜 어른 독자들에게도 시각적 포만감을 잔뜩 선사한다.
(c) Edy Legrand - Macao et Cosmage
이런 시도는 1930년대에 플라마리옹(Flammarion) 출판사에서 만들어진 <페르 카스토(Père Castor)>시리즈로 이어진다. 러시아에서 시작된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간결한 구성이 돋보이는 그림책 시리즈. 주제 면에서도 기존의 교육적 목적에서 벗어나 어린이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다는 면에서 차별점이 있다. 나탈리 파랭(Natalie Parain)의 <내 고양이 Mon Chat><시장 보세요 Faites votre marché> 등이 대표작이다.
(c) Natalie Parain - Faites votre marché
(c) Benjamin Rabier
1923년에 <제데옹 Gédéon>이라는 오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림책을 발표한 벵자맹 라비에르(Benjamin Rabier)의 작업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움직이는 동물의 움직임을 기막히게 포착해 내러티브를 만들면서 환상과 유머의 세계를 펼친 작가. 1864년생인 그의 그림 중 하나는 놀랍게도 2017년 전세계 슈퍼마켓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이미지 생명력을 선보인다. 프랑스의 유명 치즈 브랜드 ‘벨 치즈’ 로고에 있는 웃고 있는 젖소 그림이 그의 작품인 것. 현대의 디자인 옷을 입고 슈퍼마켓 안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모더니티가 그의 그림 안에 있기에 가능했던 일 아닐까.
(c) Jean de Brunhoff - Histoire de Babar
1931년에 프랑스의 국민 코끼리 캐릭터라 할 수 있는 ‘바바(Babar)’를 탄생시킨 장 드 브뤼노프(Jean de Brunhoff)는 후대 그림책 작가들에게 현대적 그림책 문법의 많은 가능성을 전수한 거장이다. 그의 책 안에서 글과 그림은 틀 안에 있지 않고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자유롭게 흐른다. 글과 그림이 서로에게 협조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제3의 텍스트를 만들어낸다.
이 제3의 텍스트, 제3의 공간에 대해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에서 인터뷰로 만난 안 에르보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글 혹은 그림을 이용해 책을 짓는 게 아닙니다. 글과 그림 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빈 공간에서 책을 짓습니다.” 인터뷰로 만났던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역시 이렇게 말했다.
“그림책을 만든다는 것은 리듬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어느 부분에서 강해지고 어디에서 약해질지, 어떻게 하모니를 만들어낼지 생각하면서 맥락을 잡아간다는 면에서 작곡과 비슷해요. 그림 한 장 잘 그렸다고 해서 그림책이 뚝딱 만들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오늘 살펴본 책들이 프랑스 그림책 발전사의 극히 일부, 가장 첫 부분만을 대변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프랑스가 가진 그림책 유산이 얼마나 방대하고 두터운지 혀가 내둘러진다.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글과 그림의 복합적이고도 유기적인 관계를 실험하며 독자들의 시각적 문해력을 키우고 읽는 기쁨을 선사한 프랑스 그림책. 미학적, 문학적 다층성을 차곡 차곡 쌓아온 덕에 2017년의 어른들이 보기에도 전혀 손색없는 장르로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다.
* <월간 그림책> 2017년 3월호에 기고한 초고입니다. 최종 게재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글을 쓴 최혜진은
자발적 마감노동자.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명화가 내게 묻다><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 저자, 계간지 <볼드저널> 콘텐츠디렉터. www.radiohead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