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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Jul 23. 2017

[그림책의 일] 벵자맹 라비에의 동물농장

동물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그림

요즘 한국 슈퍼마켓에서도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는 프랑스 벨 치즈는 '래핑 카우'라는 브랜드로 잘 알려져 있다. 불어 브랜드명은 La vache qui rit, 웃는 소라는 뜻. 귀고리 한 채 웃고 있는 붉은 소가 벨 치즈의 트레이드마크인데, 이 로고를 그린 사람은 프랑스 그림책 역사를 다룰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 벵자맹 라비에(Benjamin Rabier)다.




벵자맹 라비에는 생애 후반기에 유명세를 충분히 누린 그림책 작가이자 잡지 삽화가이자 만화가이자 광고 미술가였다. 전업 작가 5년 차였던 1915년 프랑스 군대에 육류를 보급하는 기관의 의뢰를 받아 웃고 있는 소를 그렸고, 식량 보급 트럭에 그림이 새겨져 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곳곳에 노출되었다. 1923년 아버지로부터 치즈 회사를 물려받은 레옹 벨(Léon Bell)이 이를 기억하고, 그에게 치즈 박스 귀고리를 한 소 일러스트를 의뢰해 벨 치즈의 로고가 탄생하게 됐다.

그가 소금 회사를 위해 만들어준 푸른 고래 그림 역시 100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2017년 프랑스 슈퍼마켓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전히 프랑스 국민의 생활 깊숙한 곳, 가장 손이 잘 닿는 공간에 자신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벵자맹 라비에. 그의 생애과 대표 작품을 정리해본다.




벵자뱅 라비에는 1864년 12월 30일, 소목장 아버지와 여관 보조로 일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5세 때 온 가족이 파리로 이사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각별한 두각을 보여 1880년에는 파리시에서 주최한 사생 대회에서 수상해 명문 고등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할 기회도 얻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생업에 뛰어든다.


그의 재능이 다시 발견된 건 1885년 병역 의무를 다하기 위해 들어간 군대에서였다. 그의 상관이 국가유공자들을 기리는 명예의 전당 미화를 담당하는 바람에 벵자맹 라비에의 그림 실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 1890년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는 레알(Les Halles) 지구의 세금 징수 공무원으로 발탁되었다. 낮에는 평범한 공무원으로, 밤에는 그림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이중생활을 20년 동안 유지하다 45세가 되던 해인 1910년 드디어 전업 작가 선언을 하고 공무원 생활을 접는다.


공무원이자 삽화가로서의 삶


189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컬러 인쇄술이 대중화되면서 프랑스의 정기간행물 종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약 4000종의 잡지가 발행되었고, 대부분은 삽화를 실었으며, 경쟁이 치열해 잡지 가격도 저렴했던 터라 대중들에게 널리 읽히고 지지를 받는 일러스트 작가가 탄생하기에 좋은 여건이었다.



벵자맹 라비에는 이런 환경적 유리함을 충분히 누린 작가였다. 그가 공무원 생활과 작품 활동을 병행했던 커리어 초반기에는 <La Chronique amusante><Le Rire><Le Pèle-Mèle> 같은 어른용 유머 잡지와 다양한 작업을 했고, 1897년부터는 어린이들을 위한 잡지 <l’imagerie d’Epinal><La Jeunesse illustré><Les Belles Images> 등에도 작품을 발표했다.


by Benjamin Rabier /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www.bnf.fr
by Benjamin Rabier /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www.bnf.fr


그가 그린 다양한 잡지 삽화와 만화, 그림책 등을 살펴보면 "와!" 하고 감탄이 터질 때가 많다. 특히 동물의 외양적 특성을 유머러스하게 포착해 짤막한 콩트를 지어내는 감각은 10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전혀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세련됐다. 아래 표지들은 그가 공무원과 작가 활동을 병행하던 시기에 작업한 정기간행물 <Histoire Comique et Naturelle des Animaux>에 실린 것들이다.


by Benjamin Rabier /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www.bnf.fr
by Benjamin Rabier /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www.bnf.fr
by Benjamin Rabier /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www.bnf.fr


벵자맹 라비에의 그림 속에서 동물들은 저마다의 표정과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옷을 입고 사람처럼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의인화' 방법으로 그려진 것이 아닌데도 그들의 표정을 통해 감정을 읽을 수 있다. 그의 작품을 두고 "말하지 못하는 동물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그림", "동물들을 웃게 만드는 작가"라는 평이 존재하는 이유다.


벵자맹 라비에의 역량을 집대성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을 느낀 벵자맹 라비에의 동물 일러스트는 1913년 발표한 지식책 <Le Buffon de Benjamin Rabier>에 실린 것들이다. 1749년부터 1789년까지 약 40년에 걸쳐 36권짜리로 시리즈물로 출간되었던 동물도감 <Histoire Naturelle>을 20세기 초반 감성에 맞게 재해석한 프로젝트로 그는 이 책에서 총 900여 점의 동물 일러스트를 선보인다.


by Benjamin Rabier /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www.bnf.fr


총 400여 페이지에 걸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을 그려 넣은 (총 3년 동안 900여 컷을 그려 완성한 책이다) 이 책은 일단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종별 외양 특징을 사실적이고 깔끔하게 표현해 정보 전달 목적의 일러스트로서 손색이 없다. 백과사전식의 도감이 목적하는 바에 일단 잘 부합한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벵자맹 라비에의 동물 일러스트가 매력적인 이유는 사실적인 그림 중간중간에 언뜻 느껴지는 익살스러운 균열 덕분이다. 접힌 귀 때문에 눈이 가려진 돼지는 왠지 마음이 뚱한 상태인 것 같고, 곁눈질로 눈치를 보고 있는 강아지의 마음은 의심과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식이다. 자꾸만 감정을 이입하게 만들고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비밀스러운 초대장이 그의 그림 안에 존재한다.


by Benjamin Rabier /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www.bnf.fr
by Benjamin Rabier /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www.bnf.fr
by Benjamin Rabier /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www.bnf.fr
by Benjamin Rabier /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www.bnf.fr
by Benjamin Rabier /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www.bnf.fr



3년간 혼신을 다해 동물도감 작업을 마친 벵자맹 라비에는 이 책으로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수여받았다.

이후 동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그림책 시리즈를 연달아 발표하면서 대중적으로도 큰 사랑을 받았다. 노란 오리 캐릭터 제데옹이 동물 친구들과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담은 모험기 <제데옹 Gédéon> 시리즈는 1923년부터 1939년까지 총 16권의 책으로 발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전장의 강아지 플람보 Flambeau, chien de guerre > 역시 대표작. 생전에 그는 총 200여 권에 달하는 그림책을 발표했다고 한다. 대부분 글과 그림을 모두 맡아 작업했다고. 생산력까지도 경이로운 작가다.



벵자맹 라비에는 1939년 7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는 여느 화가들처럼 국립 예술학교인 보자르에서 공부하지도 않았고, 유명한 스승으로부터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청소년기에는 아픈 아버지 대신 생업에 뛰어들었고, 25세부터 45세까지는 낮에는 돈을 벌고 밤이 되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에게 허락된 잡지의 작은 지면까지 소중히 여겼던 사람.

전업 작가 전향 후 의뢰를 받아서 그린 '웃는 소'와 '푸른 고래'는 근현대 디자인 발전사가 농축되어 있는, 무언의 진검승부가 펼쳐지는 오늘날의 슈퍼마켓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힘을 발휘한다. 100년의 시간이 무색하다. 겅중겅중 생애를 정리했을 뿐인데도 놀라운 것 투성이다. 그의 책을 제대로 더 들여다보면 얼마나 놀라운 것들이 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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