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서문
자기의 중심부에 제대로 도착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있다. 먼 곳을 보기 위해 떠나서 가장 가까운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
이런 여행을 자국을 남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지 않고 오히려 선명해져서 결국 한 시기를 닫고 새로운 시기를 여는 경계석이 된다.
시작은 빈센트 반 고흐였다. 황량한 공터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시도 때도 없이 덮쳐오던 때였다. 한 줄도 제대로 소화 못 하는 철학책을 꾸역꾸역 읽어가며 난해한 문장을 주워다가 얼음성을 쌓았다.
어차피 사람은 제각각 흩어진 섬이라고, 누가 누구를 이해하고 위로한다는 건 다 입 발린 소리라고 냉소하면서 무언가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도서관 100번 철학 서가 근처만 서성이던 어느 날, 졸음을 쫓으려고 별 뜻 없이 600번 예술 서가로 갔다. 가장 얇고 만만해보이는 책을 꺼냈다. <태양을 훔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라는 어린이 도서였다.
대충 훑어볼 요량으로 서가에 기대 읽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안쪽에서부터 뭔가 꿈틀대더니 끝까지 읽기도 전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이해하기 어려운 격정이었다. 눈물의 의미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중요한 신호라는 사실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예감했다. 아마 나는 그곳에 가겠구나, 거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겠구나, 하고.
그로부터 몇 해 뒤, 직장 생활을 하며 돈을 모아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갈 수 있는 형편이 되었을 때, 당연한 수순처럼 빈센트 반 고흐 무덤을 첫 번째 목적지로 정했다. 그제야 이해가 도착했다. 나를 흔들었던 끌림의 진짜 이유를 그곳에서 깨달았다.
세상이 냉담한 반응을 보일 때조차 빈센트의 재능을 온전히 신뢰하며 생활비와 물감비를 보내주었던 유일한 지지자, 빈센트가 생전에 쓴 편지 600여 통의 수신인, 성취부터 치부까지 검열 없이 드러내고 나누었던 사람. 바로 빈센트의 동생 테오였다.
반 고흐 형제가 나란히 누운 무덤 앞에서 내가 직면한 것은 내 안의 오래된 허기였다. 불완전할지언정 이해하려 노력하고, 이해받길 갈망하고, 미안해하며 기대고, 서툴더라도 표현하면서, 누군가의 무엇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허기.
그것을 들킬까봐 뾰족한 말 뒤에 숨어 살던 나에게 반 고흐 형제는 알려주었다.
1인분의 사랑으로도 충분하다고,
계속 살아낼 힘을 내기 위해 많은 사람이 필요한 건 아니라고.
여행에서 돌아온 뒤론 길에서 스치는 행인, 버스 기사님, 식당 이모님들이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도 누군가의 한 사람일지 몰라' 생각하며 그의 가족이나 저녁상 같은 걸 상상하게 됐다. 단절된 섬 같던 세상이 연결된 관계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림이 좋았다. 나에게 미술관은 몸 속 가득 퍼지는 직관의 신호를 기다리는 공간, 사랑에 빠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관계를 향해 첨벙 뛰어드는 장소. 우아하기보다는 흥건하게 취해 돌아올 수 있는 곳이었다. 무얼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을만큼 지치고 퍼석할 때면 먼 나라 미술관이 그리웠다.
반 고흐 형제 무덤에 다녀온 뒤로 10여년 동안 전 세계 50여 곳의 미술관을 돌았다. 피터 브뤼겔, 렘브란트, 보티첼리 등 여행의 동기가 되어준 화가는 많았지만, 반 고흐처럼 존재 전부를 뒤흔드는 강렬한 충돌을 선물하는 화가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2015년, 한 덴마크 사내가 별안간 내 인생에 도착했다. 빈센트 반 고흐와 달리 그는 혼자 오지 않았다. 바로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하메르스회이(Vilhelm Hammershøi)다.
빌헬름 하메르스회이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가 만난 북유럽 근대 미술의 세계는 쉼 없이 말을 건네는 존재들로 가득했다. 땅 속에 묻혀있던 감자알이 딸려 나오듯 우르르 낯선 이름들이 쏟아졌다. 태어나서 한번도 들어본 적 없고, 철자를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추측조차 어려운 이름들이었지만, 뎅, 뎅, 뎅, 몸 속에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엔진이 활활 타올랐다. 코펜하겐, 오슬로, 베르겐, 스톡홀름, 모라, 헬싱키, 예테보리, 말뫼, 스카겐 (Skagen), 올보르그(Ålborg), 라네르스(Randers), 오르후스... 지난 3년 동안 조금이라도 시간의 틈이 생기면 북유럽 도시로 날아가 미술관으로 향했다. 총 24870km의 여정이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 하필 북유럽인지, 그곳의 화가들이 다른 나라 화가들과 어떻게 다른지, 무엇 때문에 이런 걸음을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했다.
그저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손짓하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것이 어떤 신호라고 느꼈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는 세계 속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영역 안으로 발을 들였다. 새하얀 냉기와 타들어가는 어둠을 통과해 매일 조금씩 어디론가 움직였다. 좌표도, 신호등도, 등대도 없었다.
북유럽 미술관에서 낯선 그림을 사전 정보 없이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그림 속 타인의 얼굴, 미지의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나는 내 기억의 우물 어딘가에서 감정의 조약돌을 주워다 내 발 앞에 놓았다.
그저 색감이 예뻐서, 재치 있어서, 아름다워서 별뜻없이 발길이 머문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돌아서도 어느새 내 발 앞에는 작은 돌멩이가 놓여 있었다. 어딘지 익숙하지만 확실히 설명하기는 어려운 감정 뭉치. 눈에 띌 때마다 주워 모았다. 그러다 글로 옮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글쓰기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움직이는 행위이고, 여행의 한 형태이며, 여행을 마친 뒤 결과로 생산된 텍스 트는 내면이 아닌 외면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단어들이 친숙한 이 방인이 된 것이다.”
- 시리 허스트베트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보는 한 여자>
여정을 더듬더듬 문장으로 옮기는 동안 신기하게도 작은 조약돌은 조금씩 커지고 분명해지면서 발을 딛고 설 수 있을만큼 단단한 무언가가 되었다. 어느 날 돌아보니 나는 내 인생의 어느 시기를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통과해 있었고, 냉기와 어둠의 땅에서 모아온 그림들이 내 발 밑에서 징검다리가 되어 주었다.
이 책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기 착취와 정열을 헷갈려 곧잘 스스로를 소진시켰던 시간과 이별하는 이야기이다. 위계가 남긴 자국을 지워가는 이야기, 바깥을 힐끔거리던 시선을 거두는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라는 대답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다가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이야기, 실패에 대한 이야기, 불화하던 것을 향해 화해의 악수를 내미는 이야기이다. 결과적으로 당하는 자리에서 해석하는 자리로 건너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쓰지 않았다면 이 여행은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쓸 수 있는 힘이 되어준 모든 이들에게 깊은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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