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다리 부기가 여전히 빠지지 않고 있다. 어제는 아침 기차를 타고 구미에 내려가 초등학교 선생님 50여 분과 종일을 함께 보냈다. 오전 수업 세 시간, 오후 수업 세 시간, 총 6시간 동안 서서 강의했더니 다리가 퉁퉁 부었다. 6시간 연속 강의는 처음이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신기할 정도로 힘들지 않았다. 경청하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뒤로 갈수록 피로가 쌓이는 게 아니라 각성이 일어났다.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다.
“정치인들이 선거 기간에 피곤해 죽을 것 같다가도 유세장에 가서 지지자를 만나면 ‘유세뽕’을 맞은 것처럼 기운이 펄펄 난대요. 저도 오늘 유세뽕 맞은 기분이에요.”
내가 그간 쓴 책들에 대해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어제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세상에, 용기 내길 정말 잘했다. 책 쓰길 정말 잘했다… 내가 뭐라고 이런 대접을 받나.
새로운 시도 앞에서 할까 말까 주저하다가 에잇, 눈 꼭 감고 발을 허공으로 내디디면 언제나, 정말 언제나, 어떤 일이 일어나곤 했다. 내가 움직이면 세상이 반응한다.
처음으로 이 믿음을 갖게 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신문을 읽다가 오보로 보이는 기사를 발견했고, 주저하다가 담당 기자에게 메일을 썼다. 괜한 짓을 하나 싶어 떨렸는데 곧장 실수를 인정하는 답장이 왔고, 다음 날에는 신문 1면 하단 귀퉁이에 정정 보도가 실렸다. 손가락 두 마디 크기 정도의 정정 보도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내가 열아홉 살에 느낀 성취감 중에 가장 큰 것이 아니었나 싶다. 신문을 오려서 일기장에 붙이고 이렇게 썼다.
‘움직이면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생긴다. 움직이지 않으면 변화는 없다.’
어제 들었던 많은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읽고 ‘깊은 심심함, 시간의 공백, 스스로 만드는 놀이’ 등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는 한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책을 읽은 뒤, 학생들이 마음대로 시간을 운용해 볼 수 있게 수업마다 10분의 자유 시간을 마련하셨다는 것. 보드 게임처럼 기획이 이미 끝난 놀잇감은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아이들을 풀어놓으면 풀, 가위, 이면지로 별별 것을 다 만들어낸다고 하셨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그 10분이 아이들을 ‘진짜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하셨다. 보통은 준비한 수업 내용을 전해주기 바쁘기 때문에 아이들의 반응이나 각기 다른 아이들의 성정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시간을 운용하는 아이들을 찬찬히 지켜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교사로서도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이 이야기를 듣는데 약간 소름이 돋았다. 책이 책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생각이 문장을 타고 세상으로 나가서 구체적인 몸을 가진 변화가 된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놀라웠고, 감사했다. 내 손을 떠난 책들은 지금 어떤 여행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