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울렸다
1
"너도 가끔 그럴 때 있어? 네 안에 다른 사람이 튀어 나와서 설명하기 힘든 낯선 느낌이 느껴지는데 그걸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전혀 모르겠는 순간."
파니는 내 질문을 듣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며칠 전에 비슷한 질문을 던졌는데 답을 듣지 못한 터였다. 6년 전 어느 순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많은 부분을 도려내고 건조하게 줄거리만 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 눈을 바라보며 몇 마디를 하다 툭,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혜진, 미안해."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밤 공기가 찼다. 하지만 막혀 있던 혈관에 갑자기 피가 돌듯 바로 그 순간 우리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온기가 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늘 내면이 정리 정돈되어 있고 스스로를 컨트롤 잘 하는 파니를 보면서 느꼈던 어떤 부자연스러움, 공백과 허기. 그걸 수면 위로 올려 이야길 나누고 싶었다. 함께 산지 열흘쯤 되었을 때부터 그랬다. 그래서 그 뒤로 시장에서 장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다가, 일상 속 어느 순간에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나의 내밀한 옛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하나씩 질문을 던졌다. 선의를 담아서 조심스럽게.
확실한 건 그 아이를 흔들고 싶었다는 것이다. 내면에 소복하게 쌓인 과거의 앙금이 눈에 훤히 보였기에 그 안에 손을 넣어 휘젓고 싶었다. 모른 척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스페인 사람인 파니와 나는 다른 두 행성에서 왔다고 해도 좋을 만큼 전혀 다른 문화권 안에서 자랐다. 게다가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단어를 골라가며 이야기해야 하는 마음과 관련한 문제였다. 한국말로 해도 제대로 뜻이 전달되기 어려운 이야기를 문법도 엉망이고 어휘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불어로 말해야 했지만 아무 상관없었다. 확신이 있었다. 그 아이의 영혼은 나의 그것을 알아볼 것이고 오해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2
"넌 한국 사람이 아닌 것 같아. 확실해. 네가 질문을 할 때마다 감정의 뇌관을 누른다는 느낌을 받거든. 쑥 들어와서 말하기 힘든 날 것의 감정을 느끼게 해. 동양 사람들은 안 그런다면서. 예의가 중요해서 자기 표현도 잘 안 하고 어느 정도 거리감도 유지한다며. 너 정체가 뭐야?"
코가 새빨개지도록 울면서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다가, 밤에 노천 카페에 앉아 이러고 있는 우리가 웃기다며 깔깔 웃다가, 코맹맹이 소리로 파니가 이렇게 물었다.
3
친구를 울리는 건 내 오랜 장기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가까워지게 되면 그 사람 영혼의 바닥까지 알고 싶어 하는 이상한 천성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기 편안한 일상적인 주제에는 별 관심이 없고 늘 근본을 궁금해하는 징글징글한 성향 때문에 난 자주 누군가가 숨겨온 감정의 진창, 비밀의 방에 닿게 되었다. 그 문을 열고 서로의 결핍을 내보이는 게 나에겐 의미 있는 관계의 시작으로 여겨졌다. "이건 정말 누구한테도 말 안 해본 거야"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비밀스러운 고백이 좋았고, 어쩐지 내가 그 이야기를 들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잘 나가는 각 분야의 인사들을 인터뷰하러 다니던 월급쟁이 에디터 시절에도 굳이 그들 내면에서 결핍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에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유행하는 스타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잘 차려입은 사람, 늘 안전하고 적당한 선 안에 있는 사람, 100%로 환하게 웃는 사람보다 웃을 때 미소에서 불현듯 쓸쓸함이 묻어나는 사람, 바보처럼 앞뒤 계산 못하고 자기를 던지는 사람, 스스로를 포장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 좋았다.
4
이 편애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게 타인을 사랑하는 올바른 방식인지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