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책은 아무나 쓰나요?

무슨 답을 듣고 싶어요?

by 에디터C 최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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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음은 외국어 습득의 최대 적이다. 교실이라는 곳은 '좀 틀리면 어때' 정신이 필요한데, 한국의 정규 교육 과정을 성실히 이수한 나로선 유년기에 그런 교실을 겪어본 적이 없다. '틀리면 망함 개쪽 낙오 죽음' 불안감이 흉흉한 교실만 알다 보니 파블로프의 개처럼 교실에만 가면 마음이 오그라든다. 서른 몇 살 먹어서 불어를 배우겠다고 찾아간 어학원 교실에서 독일, 미국, 브라질, 슬로베니아, 러시아, 인도, 그리스 사람에게 둘러싸인 유일한 극동아시아 사람으로서 그 오그라듬을 또 느꼈더랬다.


아시아인 특유의 겸양에 '교실포비아'까지 장착한 나는 선생님께 콕 찍어 지목당하지 않는 한 침묵을 지켰고, 지목을 당해 뭔가를 해야 하면 실수 없이 착착 해냈다. 문법 문제 풀 때 한 명씩 돌아가면서 답을 말할 땐 내 앞 차례에 남은 학생수를 셈해서 나에게 할당될 문제가 뭔지 체크했다. 미리 그 부분을 풀어놓으면 틀리거나 당황하거나 임기응변할 위험이 줄어드니까. 한마디로 늘 준비되어 있는 상태로 흐트러짐 없이 정답만 말하는 여자. 아, 참 재미없는 사람.


그러다가 어느 날 선생님이 "다음 시간에는 자기가 인생에서 꼭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해 돌아가면서 발표할 거예요. 여행하고 싶은 장소도 좋고 생각하고 있는 프로젝트도 좋아요"라고 숙제를 내주다가 돌연 나에게 "혜진, 너는 네가 프랑스에 살면서 썼다는 첫 책에 대해 얘기해주면 재밌을 것 같구나"라고 콕 집어 주제를 정해주셨다. 그 전까지 내가 책을 쓴 저자라는 걸 몰랐던 반 친구들은 놀라움을 담은 눈으로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2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려.


결전의 날, 불어로 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목소리가 커피숍 진동 알림기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반 고흐 무덤에 찾아간 스물네 살 때 여행기부터 서른두 살, 10년 차 월급쟁이 생활을 정리하고 시작한 유럽 거주기까지 8년 간의 시간을 기록한 책이며, 여행기이지만 여행지에 대한 정보보다 어째 사생활 이야기를 더 많이 쓴 것 같은 정체불명의 책이라고 설명하면서 나를 빙 둘러싸고 있는 반 친구들과 눈을 한 명씩 차례대로 맞추었다.


슬로베니아에서 온 저널리스트 바바라 얼굴에 번지던 흐뭇함, 자존심 센 러시아 마담 마리아 엘레나의 파란 눈에 스치던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메시지, 인도에서 벨기에로 시집 온 게이 오빠 허쉬의 깊고 까만 따뜻한 눈, 은퇴한 심리학자 미국인 할머니 가엘이 경청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 반에서 제일 어린 열아홉 살 독일 학생 안나의 눈에서 반짝이던 호기심과 생기... 머릿속에 빌트인으로 장착된 카메라 셔터가 찰칵 찰칵 그 순간과 눈빛과 제스처와 표정들을 담아 장기기억으로 변환시키고 있었다.


발표 후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다. 어떻게 출판사랑 접촉했냐, 몇 권이나 팔렸냐는 현실적인 질문부터 책에서 언급한 유럽 도시들 중 가장 좋았던 곳이 어디냐, 한국 사람들에게 유럽은 어떤 이미지냐 등등. 이윽고 금융계에서 일하다 EU 본부 공무원이 되기 위해 시험을 준비 중인 그리스 아저씨 드미트리가 이런 말을 했다.


"그리스엔 이런 말이 있어. '사람으로 태어나서 죽기 전에 해야 할 세 가지 일이 있다. 나무를 심는 것. 아이를 낳는 것. 자기 이름을 걸고 책을 쓰는 것.' 너는 그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일을 먼저 했구나. 나머지 두 가지는 찬찬히 하면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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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이름을 걸고 책을 쓰는 것. 쉽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한달살이 잡지 기자로 10년을 일했다. '한 달이 지나도 책꽂이에 머물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을 동경하면서.

그런데 사람이 어떤 동경을 너무 오래 품고만 있으면 신비화, 신화화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것에 대해 너무 꿈꾸고 바라고 생각을 한 나머지 '저렇게 대단한 일을 내가 감히...'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나는 동경을 품어서 자기평가절하라는 별종을 부화시키는 어리석은 어미닭으로 살았다. 오랜 시간 동안.


그래서 첫 책을 낸 뒤, 독특하고 재미있는 경험담이 있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와, 그 이야기는 책으로 쓰시면 참 재미있을 것 같네요"라고 자주 말한다. 예를 들면 기네스 맥주를 너무 사랑해서 서른 살에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더블린으로 어학 연수를 가 기네스 펍 투어만 줄곧 하고 온 '축덕' 여자 후배랄지 남자친구와 캠핑 동호회에서 만나 주말마다 야산에서 외박하는 후배의 '커플 캠핑 에피소드', 여덟 살에 독일로 이민을 가서 변호사로 일하다 갑자기 모던 한식당 사장의 길로 급회전해 미슐랭 스타 셰프와 와인 샤또를 도는 여행을 하는 분이랄지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사람이 눈에 쏙쏙 들어오면 그때마다 책을 써보길 권한다.


"에이, 책은 아무나 쓰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이렇게 대답한다. 그럴 때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당혹스럽다. 수줍어서 도망 다니는 게 일인 나도 쓴 걸 보면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사람은 쓸 수 있는 것 같은데 "아무나 쓸 수 있죠"라고 답했다가 책에 대한 존중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충 발로 원고 쓰는 저자처럼 보일까 봐 그렇게 말도 못하겠고, "역시 아무나 쓸 수는 없죠"라고 말하자니 '그럼 지는 뭐가 얼마나 대단해서 썼대?' 고까운 마음이 들까 봐 그렇게도 말 못하겠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뿐이다.


당신은 '아무나'가 아닌데 왜 그렇게 말해요. 듣는 사람 속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