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이어달리기

해피 버스데이 투 우디 앨런

by 에디터C 최혜진
연애란 이 사람한테 받은 걸 저 사람한테 주는 이어달리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전에 사람한테 주지 못한 걸 이번 사람한테 주고 전에 사람한테 당한 걸 죄 없는 이번 사람한테 푸는 이상한 게임이다. 불공정하고 이치에 안 맞긴 하지만 이 특이한 이어달리기의 경향이 대체로 그렇다.
- 이석원 <보통의 존재> 중



1

영화 <애니 홀>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남자 주인공 앨비 싱어(우디 앨런)와 여자 주인공 애니 홀(다이앤 키튼)의 영화관 데이트 장면. 약속 시간에 조금 늦게 도착한 애니 때문에 영화 앞 부분 2분 분량을 놓치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앨비는 이렇게 말한다.


"난 영화 상영 중간에 도저히 들어갈 수 없어. 난 분석을 하는 사람이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봐야 한단 말야."

"어차피 타이틀만 놓치는 건데 왜 그렇게 빡빡하게 구는 거야?"


대신 무슨 영화를 보고 싶냐는 애니의 물음에 앨비 싱어는 3시간짜리 독일 나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자고 말한다. 애니는 무겁고 정치적인 영화를 볼 기분이 아니었지만 결국 함께 나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다. 그날 밤 베갯머리 대화 도중, 애니는 영화를 보면서 나치 시절에 비해 편하게 사는 자신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다는 고백을 털어놓는다.


시간이 흘러 숱한 우여곡절 끝에 헤어진 후, 더 이상 커플이 아닌 시기에 앨비와 애니는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다. 장소는 얄궂게도 바로 그 '나치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 극장 앞. 앨비가 좋아했기 때문에 자신도 좋아하게 된 영화를 새 연인과 함께 보러 온 애니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거 완전히 내 얘기잖아.'



2

처음으로 본 우디 앨런 영화는 1996년에 개봉한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였다.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에 껐다. 아유, 귀 따가워. 우디 앨런에 대한 내 첫인상-강박적인 수다쟁이, 그래서 영화마저도 너무 피곤한-은 꽤 오래갔다. 10년 뒤 어떤 한 남자를 만날 때까지.


그는 영화감독이라는 꿈과 현실적인 밥벌이 사이에서 갈등하는 학교 선배였다. 우리는 2년 정도 만났고, 그 기간 동안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짓을 세 번쯤 반복했다. 우디 앨런은 그의 영웅이었다.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는 우디 앨런 필모그래피에서 전혀 중요한 작품이 아니라며, 그는 내게 《애니 홀》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애니 홀》은 그의 부모님이 집을 비운 사이 그의 집 거실에서 함께 보았고, 《맨해튼》은 그가 CD로 구워주어서 보았으며, 낙원상가에 있는 서울 시네마테크로 데려가 《스타더스트 메모리스》《젤리그》를 보여준 것도 그였다.


2007년 우리는 완전히 헤어졌지만, 지금까지 우디 앨런은 내 인생의 영화감독으로 남아있다.



3

일주일 전쯤, 전 남자친구 한 명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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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미쳤어요. 자기가 암탉이라고 생각해요."

"형을 데려오세요."

"그러고는 싶은데... 제가 달걀이 필요해서요."

-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본 《애니 홀》

15년 전에 봤으면 중간에 껐을 것이고, 10년 전에 봤으면 잤을 것이고, 7년 전에 봤으면 어렴풋이 뭔가 느꼈을 것이고, 4년 전에 봤다면 울었을 것이고, 1년 전에 봤다면 그냥 좀 쓸쓸했을 것이다. 방금 다 보고 나니 다소간 위로를 받는다. (...)

그렇다고 진작 볼걸,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진작 봤으면 다른 영화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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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글에 내 이름을 태그로 걸어 공개적으로 나를 소환시켰다. 그와 사귈 때 《애니 홀》을 보라고 강권했지만 그는 보지 않았다. 우리가 헤어진 건 6년 전 일이고, 간간이 만나 안부를 묻던 그와 내가 더 이상 얼굴을 보지 않은 것도 벌써 3년이 되어간다.


3년 만에 연락이 닿은 전남자친구는 나의 전전남자친구가 나에게 건네준 《애니 홀》바통을 이어받아 이어달리기를 한다.


갑작스러운 그의 글을 읽으며 빗겨간 인연에 대한 슬픔도 느꼈고, 여전히 내 페이스북 친구로 남아있는 전전남자친구이자 나에게 《애니 홀》을 소개한 당사자인 그가 이 공개글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마음이 조금 심란했지만,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이것이었다.


'사는 거 참 재밌네. 진짜 우디 앨런 할배 영화에 나올 법한 순간이잖아.'



4

취향을 유산으로 남기는 연애가 있다. 이석원이 <보통의 존재>에서 말한 이어달리기는 '이 사람에게 주지 못한 걸 저 사람에게 주는 것'이지만, 전 사람에게 배운 좋은 걸 이번 사람에게 전수해주는 이어달리기도 있다.


연인으로서의 관계는 끝났지만 그의 취향이 이미 나를 구성하는 일부가 되어버려서 떼어버릴 수 없을 때.


《애니 홀》로 상징되는 전전남친-나, 나-전남친 사이 그 취향의 이어달리기를 생각하면 주책맞게도 마음이 애틋해진다. 어렸기 때문에, 오해했기 때문에, 궁금했기 때문에, 무서웠기 때문에 더이상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저 멀리 어딘가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모두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을 것만 같아서.



5

오늘(12월 1일)은 우디 앨런의 80번째 생일이었다. 내 사랑, 부디 오래 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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