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날의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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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로 세 살 터울의 언니가 한 명 있다. 어릴 때 언니는 알아주는 수다쟁이였다. 지금도 일가친척이 모이면 이따금씩 "옛날에 혜윤이가 엄청 까불었잖아." 하면서 각자의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언니의 재롱담을 쏟아낼 정도로 쉼 없이 쫑알거리는 꼬마였다.
언니는 이야기 짓는 걸 좋아했다. 밥을 먹다가 장판 무늬를 보면서 얼토당토않는 상황극을 지어내거나, 몇 개 되지 않는 소꿉놀이 장난감을 바닥에 늘어놓고 물건들 사이의 질투, 복수, 사랑 등 긴장감을 엮어냈다. 언니가 가장 좋아한 주제는 로맨스였다. 언니가 결혼을 하고 나서 첫 아이를 낳고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시도 때도 없이 공주가 되는 상상을 하고 왕자님 만나는 꿈을 품었노라고, 환상에 너무 깊게 빠져 있었던 어린 시절이 자신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노라고, 언니 딸을 가리키며 '이 아이도 그럴까 겁난다'고 했다.
이 정도로 이야기가 늘 넘쳐나던 언니는 중학생이 되어 본격 '집필'을 하기 시작했다. 사춘기 소녀들 구미에 딱 맞는 로맨스 소설을 노트에 적어 반 친구들에게 돌려 보게 했다. 이야기가 꽤 흥미진진했던지 언니의 노트를 보려는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순번을 정해놓아야 했다.
언니가 중학생 2학년이었던 어느 날, 반 친구 중 하나가 수학 시간에 언니의 이야기 노트를 읽다가 선생님에게 걸렸고, 꽉 막힌 걸로는 벽창호 못지않은 그 선생이 언니를 문제아 취급하며 기를 완전히 꺾어놓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 일로 엄마가 교무실에까지 불려갔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가지만 말이다. 어린 학생의 소질이 그 선생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건지. 그분이 문학 선생님이었다면 언니의 인생은 얼마간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언니는 그 사건으로 이것을 배웠다.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상상과 이야기들이 이 세상에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리고 결심한다.
'상상하지 말자. 입 밖으로 꺼내놓지 말자.'
2
태어나자마자 내 옆엔 창작동화 구연자가 있었다. 밥도 함께 먹고 잠도 같이 잤다. '듣기'를 집중적으로 훈련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내가 언니의 유일한 관객이고 청자였기 때문에 언니는 늘 내가 자기의 이야길 잘 들어주길 바랐다. 언니에 비해 세 살이 어리고 내성적인 허약 체질 어린이였던 나는 언어 순발력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기회를 번번히 언니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쉼 없이 쫑알대는 언니를 지켜보는 게, 그리고 마구잡이 상상 속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을 쫓아가며 이야기의 전후 관계를 파악하는 게 때론 엄청나게 피곤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대개 언니의 이야기는 재밌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고 또 들었다.
언니는 미리 생각을 해놓고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우선 입에 시동을 걸어놓고 말하면서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때때로 이야기가 정리가 안 됐고, 조금 전에 내뱉은 이야기도 금세 까먹을 때가 많았다.
반면 나는 자연스럽게 이야기(인풋)를 곱씹고 처리하고 해석하는 역할로 길러졌기 때문에 무아지경으로 쏟아지는 말의 홍수 사이에서 "그래서 이러저러해서 까치가 곰돌이랑 결혼했다는 거잖아? 그런데 걔네는 왜.." 이런 식으로 사건의 요약정리와 감상 후기, 그리고 질문을 순간적으로 엮는 일을 주로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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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자가 된 건 언니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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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아프게 쫑알대던 이야기꾼은 중학생이 되면서 동생보다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언니가 밖에 나가면 집안엔 정적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난 그 정적 안에서 안도했다. 햇빛이 드는 베란다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심심해지면 국어사전을 꺼내왔다. 턱,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국어사전을 내려놓을 때면 늘 작은 흥분이 일었다. 아무 데나 펼쳐서 한 장 한 장 사전을 넘겨보면 가슴이 뛰고 우와우와 소리가 절로 났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낱말이 있다는 게 신기했고, 그 고유의 뜻을 알아가는 게 좋았다. 암실에서 손을 더듬거리다가 문을 활짝 여는 것처럼 머리가 개운해졌다. 비슷해 보였던 두 단어 사이에 미묘하게 다른 어감과 뉘앙스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어른들이 보는 신문에서 슬쩍 본 적은 있지만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던 어려운 낱말을 정복(!)했을 때 느꼈던 쾌감은 지금 돌이켜봐도 짜릿하다.
국어사전은 내 장난감이었다. 그러니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놀이랍시고 이런 제안도 했겠지.
"너 심심해? 나랑 놀래? (국어사전을 친구에게 주면서) 아무 데나 펼쳐서 단어 말하면 서로 무슨 뜻인지 맞추기 놀이할래?"
나와 놀아주던 아이들이 천만다행으로 다들 순박하고 착해서 재수없다고 맞거나 꺼지라는 욕을 듣지 않았다. 확실한 건 이 놀이에 나만큼 열정을 가진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는 것. 조금 장단을 맞춰주던 친구가 재미없다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 나는 수첩을 꺼내놓고 새로 수집한 낱말을 옮겨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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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상한 낱말 소유욕은 형태를 조금씩 바꿔가며 때로는 취미로, 때로는 이유없는 습관으로, 때로는 일로 표출되며 내 삶의 결을 만들었다.
고등학생 때 심각하게 만화와 영화에 빠져 살았다. 당시엔 취향이랄 게 없어서 만화, 비디오 대여점에 매일 출근해 새로 나온 작품은 다 빌려다 봤다. 구글도, 위키피디아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만화 대여점, 비디오 대여점, 음반 가게에서 새로운 지식을 ‘하이퍼 링크’로 탐험할 수 있었다. 비디오 테이프 케이스나 음악 테이프 케이스에 '누구누구에게 보내는 오마주!' 이런 글귀가 적혀 있으면 그 누구누구라는 창작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졌고, 그 사람에게 대해 알아가다보면 또 비슷한 작품, 영향을 준 스승 등 파생 창작물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렇게 청소년기를 보내고 나서 취향이라는 것이 생겼다. 대학생 때부터는 한 예술가의 궤적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영화를 봤다. 예를 들어, ‘히치콕 영화의 주간’을 혼자 정해놓고 히치콕 영화만 필모그래피 순서대로 찾아보는 식. '더 알고 싶다'는 달뜬 마음에 국어사전을 뒤적여댔던 것과 같은 원리로 작가주의 영화 감독 이름 하나하나가 새로 배워야 할 단어처럼 다가왔다. 낱말 수집 단어장을 만들 듯 창작자 한 명 한 명을 수집한 리뷰 노트를 만들었다.
잡지사 기자가 되고 놀랐다. 평생 놀이랍시고 해온 이 짓을 직업적으로 하며 매달 돈을 받을 수 있다니! 돈 안줘도 어차피 혼자 할 짓인데. 물론 곧 '노동량에 비해 월급이 적다'고 투덜대는 기자 무리의 일원이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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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쟁이 언니는 이제 세 아이의 엄마가 됐고, 큰 조카 은유는 올해 열 살이다. 그 아이를 요즘 가장 흥분시키는 건 백과사전. 백과사전을 끼고 문제 내기 놀이를 하자며 여러 사람을 귀찮게 한다고 한다. 언니는 자기를 닮아 '공주가 되어 왕자님을 만나는 환상'에 빠져 살까봐 걱정했는데, 기묘하게도 이모를 빼박으로 닮아 버렸다. 사전 앞에서 가슴이 뛰는 꼬마의 그 달뜬 마음을 절절하게 이해한다. 며칠 전, 은유에게 두꺼운 어린이 국어사전을 선물로 보냈다.
까똑.
오늘 언니가 보낸 사진 속에서 은유는 세상을 다 가진 아이처럼 행복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