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공책 한 권

새해 다이어리 준비하셨나요

by 에디터C 최혜진

아마도 문송(문과라서 죄송)한 수포(수학포기)자라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고등학교 <수학의 정석> 책 옆구리의 1장 집합 부분만 새까맣게 손때가 묻어있던 장면. '그래, 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다짐해놓고 무한 루프 도돌이표에 사로잡힌 포로처럼 1년 내내 그 자리만 맴돌았던 기억.


돌이켜보면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문제집이라는 녀석의 끝을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삼분의 이쯤 진도가 나가면 지루함에 몸부림치다 슬그머니 새 문제집 첫 장을 폈다. 참고서든 문제집이든 어쨌든 어떤 책의 첫 장을 처음으로 펼치는 기분은 꽤 근사하니까. '이번만큼은 새 마음으로 열심히 해보겠어!' 다짐을 숱하게 하고 결국은 끝을 보지 못한 그 많은 날들이 내 안에 작은 죄책감을 틔웠다.


증상은 '분열'로 나타났다. 문구점이나 잡화점에 들러 메모장과 공책, 다이어리만 보면 "사고 싶다. 갖고 싶다." 외쳐대는 하이드 씨와 "집에 사놓은 것부터 다 쓰고 사." 달래는 지킬 씨.

좋은 생각이 솟아날 것만 같은 탐스러운 공책 앞에선 대개 하이드 씨가 승리한다. 그러나 그 공책을 들고 집에 돌아온 뒤엔 단연 지킬 씨의 목소리가 크다. "괜히 앞에 몇 장만 끼적이다 그만둘 거면 쓰지를 마. 넌 끝을 보는 법이 없잖아."


올해 3월까지 난 지킬 씨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몇 해째 예쁜 노트를 사서 가만히 모셔 두었다. 한 권을 끝까지 다 쓸 자신이 없어서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올해 3월 몰스킨 다이어리를 선물로 받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선물을 받았던 그날, 공책을 옆으로 돌려 단단하게 엮인 365쪽의 백지를 엄지 손가락으로 밀어보았다. 휘리릭 책장이 넘어가며 작은 바람을 일으킬 때, 그 시원한 공백에 가슴에 뛰었다. 하루에 한쪽씩 따박따박 날짜가 박힌 다이어리. 쓰지 않고 모셔두면 가치가 사라지는 유통기한이 있는 공책. 그래서 선물 받은 3월 24일 그 날의 페이지를 펼쳐 이렇게 썼다.


매일 한쪽씩 무언가로 이 백지를 채울 수 있다면 좋겠다. 계속 읽고 공부하고 메모하고 기록하는 동력이 되면 좋겠다.



이제 이 공책에는 12월 31일치 딱 한쪽의 가능성이 남았다. 첫날에 그랬던 것처럼 공책을 옆으로 돌려 휘리릭, 넘겨본다. 까만 글자가 빽빽하게 이어지다 돌연 백지, 다시 빽빽한 검정 숲, 다시 백지.

매일 한쪽을 채우겠다는 결심을 완벽하게 지키진 못했다. 봄여름까지는 결심을 잘 지키다가 9월엔 거의 20일 정도 공책을 방치해두고 살았다. 뭔가를 끼적대지 못한 날이면 책상 위에서 빨간 공책이 나를 노려보는 기분이 들어 찝찝했다. 아예 모른 척할 수 없어서 다시 돌아가고 돌아가길 반복하며 마지막까지 왔다.


이 공책엔 2015년에 읽었던 책과 밑줄 그은 문장을 옮겨 적어놓은 페이지가 가장 많다. 올해 65권의 책을 읽었는데 그중 마음에 드는 삼분의 일 정도가 공책에 담겨 있다. 취재를 다니며 급하게 메모해놓은, 그래서 도대체 뭐라고 쓴 건지 알아볼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점령한 쪽도 있고, 블로그와 브런치에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쪽도 있다.



표지와 뒤표지에 있는 그림은 패션 디자이너 카스텔바작(Jean-Charles de Castelbajac)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한 날 그가 그려준 것이다. 밋밋하던 공책에 표정이 생긴 순간, 소중한 추억이다.


2015년을 하루 남기고 생각해본다. 만약 내가 그때 끝까지 쓸 자신이 없어서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물론 이 공책 한 권이 내 인생을 크게 바꾸거나 대단한 성과를 낸 건 아니다. 매일 한쪽씩 뭐라도 적어야 한다는 강박이 없었더라도 일상은 그럭저럭 잘 흘러갔겠지만, 지금처럼 2015년이라는 박제된 시간을 두 손으로 만지고 감싸고 잡아보고 넘겨볼 순 없었을 것이다.


이제 이 단단한 빨간 공책을 서랍 깊은 곳으로 넣어야 한다. 이 밤이 지나고 새로 내게 주어질 365쪽의 백지와 가능성에 감사하고 설레어하면서.


굿바이 2015. 웰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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