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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Feb 29. 2016

키티 크라우더 '상상을 만드는 질문'

<난 이제 하나도 무섭지 않아> 작가의 창작 노트

영국의 권위있는 그림책 전문가 마틴 솔즈베리 교수는 『그림책의 모든 것』이란 책에서 벨기에 작가 키티 크라우더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녀는 그림책이라는 매체의 장인이다. 그림책의 전통을 지키는 한편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데, 이 일은 가장 뛰어난 현대 그림책 작가 몇몇만이 이룰 수 있는 업적이다.”



상상력과 창의력. 이 두 단어를 마주하면 가끔씩 자연사박물관에서 본 박제 동물들이 생각난다. 분명 눈 앞에 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것에 대해 말하지만, 고유의 영혼, 빛깔, 냄새 같은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상태. 무척 익숙한 말이지만 그 진짜 뜻을 제대로 알고서 쓰는 건지 아닌지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럴 땐 사전을 펼치면 의외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상상력은 어떤 모양이나 형상(像)을 생각으로 그려보는(想) 능력을 의미한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상상력을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힘’이라고 정의한다. 반면 창의력은 의미(意)를 만들어내는(創) 능력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사람이 하늘을 난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려보는 게 상상이고, 그 상상에 한번 시도해 볼만 한 가치가 있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실현해내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게 창의다. 창의는 해결하고 싶은 목표를 향해 돌진하지만, 상상에는 결승점이 없다.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림을 그려보는 것 뿐이니까.


때문에 자칫 상상은 쓸모없는 일로 치부 되기도 한다. 주로 어른 세계에서 그렇다. 사원들에게 창의력을 강조하는 회사는 수두룩하게 많지만 상상을 하라고 진지하게 부추기는 회사는 거의 없다. 아이의 창의력을 자극해주겠다며 교구를 열성적으로 들이면서 아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 하니 공상에 빠져있으면 불안감을 느끼는 부모도 있다.  어느새 창의력은 지식 기반 사회의 필수 스펙이라는 지위를 획득했고, 상상력은 부수적인 무언가로 전락했다.


하지만 애당초 사람이 하늘을 나는 것에 대한 상상이 없었다면 그것을 실현해보고자 하는 욕구조차 생기지 않았을테고, 그랬다면 아이디어를 내고 문제를 해결해가며 창의력을 발휘할 이유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상상의 쓸모는 거기에 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는 않아도 뭔가 흥미로운 것이 숨어 있을 것'이라 기대하게 만드는 것. 더 알아보고 싶게, 만들어보고 싶게, 해보고 싶게 우리를 부추기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상력은 무언가를 흘려 보지 않고 깊이 보고 제대로 보는 견문의 상태로 우리를 이끈다.


상상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대개 의문형의 생각이라는 점이다. “무지개 위를 걸어갈 때, 어떤 발자국 소리가 날까?” “왜 사람은 씨앗으로 태어나지 않을까?” “하늘은 하루에 몇 번씩 속옷을 갈아입는 걸까?” 상상을 숨 쉬듯 하는 어린 아이들은 이런 류의 질문을 쉬지 않고 던진다. ‘이러면 어떨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왜 그렇게 되었을까?’ 궁금해 하는 마음이 상상도 낳고 창의도 낳는다. 아는 게 많아지는 어른이 되면서 대개 잃어버리는 자세다.


키티 크라우더는 40대 중반이지만 여전히 상상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한다.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발상이 유연하다. 그녀의 이야기에는 늘 비현실적인 존재들이 등장해 현실을 보는 관점을 조금씩 비튼다.  『꼬마 죽음이 찾아왔어La visite de petite mort 』의 주인공은 ‘죽음'이다. 까만 망토 사이로 배가 볼록 나온 순둥이 꼬마 죽음과 오랫동안 지병을 앓아 온 소녀 ‘엘스와이즈'의 관계를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사유한다. 『나와 아무것도Moi et rien』의 주인공 이름은 ‘rien’, 영어로는 ‘nothing’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무것도’라는 이름의 무(無)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작은 사람과 신 Le petit homme et dieu』에서는 작은 사람에게 호수에서 수영하는 법과 나무 타는 법을 배우는 신이 등장하고(신은 정말 모든 걸 다 할 줄 알까?),  『대혼돈 Le grand désordre』에서는 방을 어지럽히는 ‘난장판 정령’들이 왁자지껄 몰려 다니며 온 집을 헤집고 다닌다. (집이 이렇게 지저분한 게 정말 내 탓일까?)


그래서 키티 크라우더 그림책을 보고 나면 늘 연필이랄지 구름이랄지 이전까지 아무 의미 없던 일상 속 사물을 향해 ‘저게 살아서 말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의 시선을 던지게 된다. 예열을 마친 뇌가 일상 속에 숨어있는 영험한 마법을 찾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물리적 세계 바깥을 여행하려 한다.아주 오래 전, 우리가 아이었을 때 가졌던 질문하는 마음을 되찾게 만든다.



키티 크라우더는

1970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스웨덴인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선천적인 난청으로 4세가 되어서야 말문이 트였다. 허풍을 떨며 황당한 이야기를 지어내 두 딸을 웃기기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내면의 이야기 곳간이 풍성했다. 1994년 첫 책 『나의 왕국 Mon Royaume』을 발표한 이래 매해 신작을 내고 있는 근면한 작가. 유럽의 수많은 문학상을 받았는데, 그 중에는 세계 최고 권위의 아동문학상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도 포함되어 있다. 이 상은 스웨덴 정부가 그림책 발전에 공을 세운 작가나 독서 운동 단체에 수여하며, 약 7억원의 상금 규모로도 유명하다. 유럽에서는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Q 작가님의 유년기 이야기를 하려면 선천성 난청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네 살이 될 때까지 말을 못 했는데 부모님이 제가 난청이라는 것을 눈치를 못 채셨어요. 장애 때문에 살아 남으려면 진정한 의미의 관찰을 해야만 했습니다. 주변 모든 것을 주의 깊게 봐서 부족한 청각 정보를 메꿔야만 했죠. 어떻게 걷고 움직이는지 모두 눈으로 보고 흉내 내면서 배웠습니다. 여섯 살 때 부모님이 비로소 제 장애를 인지하고 보청기를 달아주셨는데요. 보통 아이들과 어울려 일반 학교를 다녔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유급도 당했을만큼 또래를 따라가는 게 쉽지 않았어요. 늘 외롭다고 생각했고, 절대 행복해지지 못할 거라고 좌절한 적도 있었습니다.

유년기에 제 머리속에는 늘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어떤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지금 애들이 왜 다 웃는 거지?” “이게 뭐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저러지?” “저건 뭐지?” 질문하는 목소리였죠. 부족한 청각 정보를 눈치로 메꾸고 상황을 파악하려면 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습관이었는데 그 목소리는 조금 잠잠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제 안에 있답니다. “왜?” “어떻게?”라는 질문은 지금도 늘 스스로에게 던지며 삽니다.


Q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뭔가가 더 있을 거란 생각을 어릴 때부터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네요.

난청이 있어서 알게 된 진실이 하나 있어요. 사람들의 말과 얼굴 표정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듣지 못하니 가면 뒤의 진실이 보이더군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관심은 가풍도 큰 영향을 주었을 거예요. 아버지는 영국인이고 어머니는 스웨덴인인데 두 나라 모두 마법사랄지 엘프, 트롤, 자연에 깃든 정령 같은 환상 세계를 존중하는 문화가 강하답니다. 영국에 가서 “에이, 요정이나 엘프, 고블린이 어디 어딨어요. 다 지어낸 거지.”라고 한번 말해보세요. 아마 죽음의 위협을 느낄만큼 강렬하게 쏘아보는 눈빛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웃음) 어릴 때, 아버지는 식사할 때 음식을 싹싹 다 긁어 먹지 말고 조금 남겨두라고 하셨어요. 우리 집에 사는 꼬마 유령들 몫이라고요.

전 그런 삶의 태도가 좋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 세계 말고도 다른 우주가 있고 질서가 있다고 여기는 태도요. 그런 태도가 ‘A의 답은 B고, B의 답은 C야' 같은 틀에 박힌 생각을 해방시켜주기 때문이죠.


Q 어머니의 나라 스웨덴 문화로부터는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스웨덴은 자연을 대하는 태도 면에서 동양과 비슷한 면이 있어요. 자연을 영혼이 깃든 살아있는 존재로 여기고 공손하게 대하죠. 숲과 돌멩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게 된 것은 어릴 때 외할머니가 읽어주신 스칸디나비아 문학의 영향이 큽니다. 할머니가 담배를 많이 피우셔서 성대가 거의 굴뚝처럼 매캐했는데(웃음), 그런 걸걸한 목소리로 『삐삐 롱스타킹』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여러 작품이랄지, 트롤 가족 『무민』 시리즈를 그린 토베 얀손의 책을 읽어주셨어요. 음산한 목소리라서 더 감정이입이 잘 되었죠.

어릴 때 읽었던 스칸디나비아 문학을 돌이켜보면 늘 재난과 함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크든 작든 해결해야 하는 문제 상황이 발생하고 주인공은 곤경에 빠졌어요. 이런 류의 이야기는 독자인 아이에게 “너는 어떻게 너만의 해결책을 만들어볼래?”라고 질문하면서, 상황이 좋아질 거라고 믿는지 나빠질 거라고 믿는지 입장을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창의성을 자극하는 이야기인 거죠.



Q 책이 어린 시절 가장 좋은 친구였나요?

책 속 세상에서는 소리가 필요 없으니 보청기 없이도 편안하게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침대 옆자리에 책을 누이고 잘 정도였으니 정말 좋아하는 친구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정말 큰 위안이었죠.

저는 독서를 단어를 모으는 행위라고 규정합니다. 아이가 만약 ‘화' ‘슬픔' ‘스트레스' 같은 단어를 모른다면 자기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없을 테고, 그러면 그 감정을 마음 밖으로 꺼내 잦아들게 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책을 읽으며 자신을 비춰보고 이전까지 몰랐던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은 무척 중요합니다.

또 책을 통해 사귄 친구는 이 세상 최고의 권력자라도 우리에게서 뺏어갈 수 없습니다. 60세, 70세가 되어도 다시 만날 수 있는 내면의 비밀스런 친구죠. 제 두 아들 테오도르와 일리아스가 올해 19세, 17세인데 책장을 뒤지다가 어릴 때 읽었던 그림책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아!” 감탄하고 소중하게 어루만지더군요. 아이가 책 속 주인공과 따뜻하고 진실하고 살아있는 우정을 나눴다는 의미겠죠.


Q 테오도르와 일리아스가 어릴 때 직접 그림책을 읽어주셨나요?  

물론이죠. 생후 3개월 때부터 읽어줬는 걸요! 우리는 말과 글로 자기를 표현해야 하는 언어 중심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언어는 음악입니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말의 높낮이, 음율과 리듬 등 음악성이 아이에게 남습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게 의미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엄마 자신의 스토리가 어떻게든 녹아들기 때문입니다. 전 모든 사람이 기억과 사연 조각이 가득 담긴 이야기 바구니를 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책을 읽을 땐 자기 바구니에서 비슷하다고 판단되는 조각을 꺼내 책 속 이야기에 비춰보는 거라고 생각해요. 기억 저편에서 꺼내오는 거죠. 언뜻 작가가 써 놓은 제 3의 이야기를 읽는 것 같지만 결국은 엄마 자신의 사연, 아이의 사연이 포개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녀와 함께 하는 독서 시간은 진정한 의미의 교감과 나눔이라고 생각합니다.


Q 책보다는 스마트폰, 컴퓨터와 더 친한 요즘 아이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프랑스 철학자 장-미셸 베스니에가 ‘별표 신드롬'이란 책을 냈습니다. 음성사서함을 이용할 때 1,2,3번 등 선택지를 누르고 별표를 누릅니다. 이렇게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만 사고하는 현대인, 그 단순화된 사유를 별표 신드롬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기계화된 컨텐츠가 무서운 이유는 아이에게 ‘이 길만이 정답이야.’라는 생각을 주입하기 때문입니다. 게임을 할 때 왕을 쳐부수기 위해 실행해야 하는 전략이 정해진 것처럼 살면서 바람직한 길이 오직 하나라고 생각하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심지어 학교는 태블릿 PC까지 들여다 놓고 스마트 러닝을 외칩니다. 이게 아이들의 ‘몸'을 얼마나 배제하는 일인가요. 아이들은 하루종일 앉아서 ‘머리'로서만 존재합니다. 자신의 몸과 대화할 수 있는 수업-춤, 요가 등-은 전혀 없는데 그것도 모자라 연필로 노트에 필기 하는 행위까지 없애려 하니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Q 몸을 쓰는 체육 시간이 교과 과정에 있긴 한데요.

학교에 남아있는 축구, 야구 등 스포츠는 몸과 대화하는 시간이 아니라 이기고 지는 경쟁 논리를 교육하는 시간입니다. 전 경쟁심을 경계합니다. 경쟁이 행복을 망치니까요. 행복한 아이는 스스로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 갈 힘을 비축합니다. 경쟁 구도 속에서 1등을 한다면 성취감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겠지만 영원한 1등은 없으니 그런 행복은 불안정하죠. 올림픽을 한번 낯설게 바라보세요. 왜 한 나라만 이기고 나머지 나라는 모두 슬퍼해야 하는 경기 규칙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거죠? 그 승리가 진실로 만족감을 주는 승리인가요?  



Q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과 그것을 그림이나 말로 꺼내 놓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을 비주얼로 옮기는 능력은 어떻게 길러졌다고 보시나요?

아이들은 타고난 상상가들입니다. 어른이 “이게 좋구나. 이건 별로구나.” 말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아이의 상상력은 스스로 성장합니다.

상상력이 별로 없어 보이는 아이는 실은 상상을 못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상상을 믿지 못해 발설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상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평가하는 어른이 옆에서 영향을 줬기 때문이고요.

어릴 때, 제가 마구잡이 상상을 담아 그림을 그리면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키티, 네 그림은 늘 나를 웃게 하는구나. 엄마는 네 그림이 자랑스러워.” 어느 부분이 좋고 어디를 잘 그렸다고 비평하는 대신 환하게 웃어주셨어요.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창작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독특하고 훌륭한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목표 의식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유일한 창작의 목표는 ‘기쁨'입니다. 저 스스로의 기쁨을 위해 이 일을 합니다. ‘이 색을 칠해보고 싶어! 이렇게 그려보고 싶어!’ 이런 가슴 뛰는 충동과 설렘, 기쁨이 없다면 무엇을 창작할 수 있을까요. 저에게 창의적이라는 단어는 기쁨의 동의어입니다.


Q 작가님 책에는 늘 식물, 숲, 물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합니다. 과거 인터뷰에서도 누누이 자연에서 최고의 영감을 얻는다고 하셨는데요. 저처럼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연을 어떻게 보아야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건가요?

작은 씨앗 안에서 어떻게 수십미터 크기의 나무가 나오는 걸까요? 우리를 배불리 먹이는 그 많은 곡식이 어디서 오는 걸까요? 그 놀라운 일을 해내는 이는 누구일까요? 튤립과 장미, 각 종류의 꽃과 잎사귀 안에 숨어 있는 조형적인 규칙들, 그 성스러운 기하학은 누가 계산해 놓은 걸까요? 저는 이렇게 질문을 하면서 자연을 봅니다. 그냥 쳐다만 본다고 영감이 뚝딱 생기는 건 아니에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사과'라는 단어를 들으면 하나의 전형적인 사과를 떠올립니다. 빨갛고 위엔 꼭지가 달린 형태겠죠. 하지만 세상에는 100 가지도 넘는 외양의 사과가 있어요. 언어는 자연을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이 사과의 첫 번째 정의, 무난한 약속에 딱 멈춰서 있어요. 인간의 언어가 다 담아내지 못하는 그 밖의 것들이 얼마나 무한한지, 우리가 흘려보내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생각을 펼치는 과정에서 영감을 주는 것들과 만나는 것입니다.


Q 의인화는 작가님 책에 늘 등장하는 기법입니다. 『포카와 민느』 『나는 이제 하나도 무섭지 않아』 시리즈는 곤충이나 동물이 사람처럼 옷을 입고 말을 하는 등 인간의 일상을 대변하는 작품이고요. 『꼬마 죽음이 찾아왔어』 『작은 사람과 신』 등 ‘죽음' ‘신' ‘없음' 같은 추상적 개념이 의인화를 통해 인물로 그려지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한 가지 독특한 점은 동물이 주인공일 때는 이야기가 더없이 일상적인데, 사람이 주인공이면 길 가다 신을 만나거나 호수의 바위가 갑자기 거인으로 변신하는 등 초현실적이고 괴상한 상황에 처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상상을 펼치는 걸 정말 좋아합니다. 동물이 말을 하고 인간의 일상을 누리는 건 이미 충분한 상상이 들어간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 속 작은 순간이 흔들리는 것 만으로도 드라마가 생겨나죠. 반면 주인공이 사람이라면 실제 일어나지 않을 법한 상황에 그들을 보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찰해야 합니다. 그게 상상을 펼치는 저만의 방식이에요.

전 책을 만들 때 끝에 무슨 결말이 있을지 모르는 상태로 작업에 임합니다. 첫 장을 시작할 뿐이죠. 서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건 책 속 인물들이에요. 제가 이 방향으로 가고 싶어도 주인공들이 “난 싫은데?” 거부할 때가 있어요. “대장은 나라고!” 윽박 질러도 소용 없어요. 제 주인공들이 “흥, 네가 대장 아니거든?” 이러면서 응수하거든요. (웃음)


Q 작품 속 인물들이 실제로 살아 있다고 믿으신다고요.

습작을 하다보면 어떤 그림에서 인물의 인격까지 생생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또 어떤 그림은 예쁘긴 한데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도 있고요. 그 둘을 구분하는 눈을 이제는 갖고 있습니다. 제 심장과 손이 함께 움직여서 모든 것을 잊고 그림을 그릴 때, 인격이 있는 인물들이 그려집니다. ‘예쁘다’ ‘잘 그렸다’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제 책이 상을 받으면 전 속으로 “브라보, 키티”라고 하지 않습니다. “브라보, 엘스와이즈" “브라보, 아무것도" 이렇게 책 주인공 이름을 넣어 칭찬을 보내줍니다. 제가 죽는 날, 지금껏 제가 창조한 모든 인물들이 저를 환영하러 나와줄 겁니다. 그 장면을 상상하면 정말 뭉클하지요.



Q ‘죽음' ‘신' ‘없음' 같은 추상적 개념을 아이들에게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고 느끼시나요?

제가 어릴 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친척의 장례식장에서였어요. 어머니에게 “죽는 게 뭐야?”라고 질문했는데, “나중에 크면 말해줄게.” 하시더군요. 저는 기다렸지만 해가 바뀌고 시간이 지나도 설명을 해주지 않으셨어요. 궁금함을 삼키고 ‘내가 그 이야기를 듣기에는 충분히 크지 않은 건가?’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엄마로서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큰 아들 테오도르가 서너 살 무렵일 때 죽음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더군요. “엄마는 이렇게 믿어서 이런 답을 해주지만 세상에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정말 많고, 그들은 그런 다른 생각을 할 권리가 있단다.”라고 우선 단서를 달고 제가 생각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들려줬어요. 아이가 묻더군요. “엄마가 죽고 나면 엄마 몸은 어떻게 돼?” “아마 먼지가 될 거야.” “그럼 내가 엄마를 어떻게 알아 봐?” “엄마 몸은 그냥 편지 봉투 같은 거야. 그 안에 영혼이라는 중요한 게 들어있지. 네 영혼이 엄마 영혼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이런 대화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아이에게도 꼭 질문을 해주라는 겁니다. “테오도르, 넌 죽은 뒤 세상이 어떤 모습일 것 같아?” 왜냐면 아이들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생각 났는데 표현할 용기가 없어서 질문을 할 때가 많아요. 그럴 땐 질문을 되돌려주기만 해도 의미가 있습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라고요. 물론 처음에는 “나는 몰라.” 이러면서 딴청을 피우기도 하겠죠. 그러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거야 아니면 말하는 게 불편한 거야?”라고 물어봐 줍니다. 그럼 대부분 자기 생각을 실토합니다.


Q 작가님 작품에 반복해 등장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특히 자녀 덕분에 부모가 자신의 닫혔던 마음을 여는 내용이 반복해 눈에 띕니다. 특히 최근작 『메두사 엄마』는 과잉 보호를 하면서 자녀를 자기의 소유물처럼 여겼던 엄마가 아이 덕분에 자신 내면의 두려움과 방어기제를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 메두사처럼 『메두사 엄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그 머리카락으로 자신과 아이 주변에 거대한 보호막을 치고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갑니다. 엄마의 과도한 관심과 소유욕을 내려놓고 아이와 함께 의논하면서 균형을 잡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엄마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아이 덕분에 엄마로 만들어지는 거라고요. 전 아들을 키울 때 일상의 규칙과 훈육 기준을 아들과 상의해가면서 만들었습니다. ‘우리만의 규칙'을 만든 거죠.

부모와 자녀의 만남 역시 다른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두 우주가 만나는 겁니다. 한 우주가 다른 쪽을 잡아 먹어선 안돼요. 아이는 내 소유물이 아니니까요. 부모의 역할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이의 행복을 먼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아이의 작은 선택을 바라보면서 ‘아, 그래. 너는 나하고 다르게 그렇게 선택하고 그 길로 가려고 하는구나.’ 생각해주면 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Q 오늘 인터뷰 하는 동안 장남 테오도르가 곁에서 커피 시중을 해주고, 어머니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열아홉 살이면 자기 방에 콕 박혀 있기 마련인데, 둘은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틈만 나면 테오도르를 웃기려고 농담을 건네는 작가님 모습도 굉장히 좋아 보였고요.

30년 후에 두 아이가 저를 좋은 엄마였다고 회상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은 엄마 이전에 자기만의 삶을 가진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어요. 아무리 음식을 잘 하고 뒷바라지를 잘한다고 해도 그 안에서 엄마의 열정과 영혼이 안 느껴진다면 아이는 껍데기 엄마만 만나는 겁니다. 뭔가에 열정을 지닌 살아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우표를 모으거나 봉사활동을 다니거나 정원을 가꾸는 등 그 대상은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엄마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요.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은 나 자신의 행복을 디자인 해가는 과정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키티 크라우더가 지은 책


1 Dans moi 나는 나의 왕이다

키티 크라우더의 대표작은 거의 대부분 그녀가 글과 그림을 모두 작업한 것들인데, 이 책은 예외적으로 알렉스 쿠소가 글을 썼다. ‘내가 늘 나인 것은 아니었다. 내가 내가 되기까지 나는 내 속에 있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철학적인 책. 자신 안의 두려움이라는 괴물과 싸워 이기고 자신의 왕이 되는 여정을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그림들로 풀어냈다. 한국어판은 2013년 루크북스에서 출간했다.  


2 Mère méduse 메두사 엄마

2015년 발표한 키티 크라우더의 최신작. 표지에서 귀신처럼 음산하게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는 인물이 메두사 엄마다. 신화 속 메두사처럼 머리카락을 조정하는 능력을 가졌다. 늘 자신 주변에 거대한 보호막을 치고 세상과 단절되어 사는 상처 많은 여성. 자신이 낳은 아이 역시 그 보호막 안에서만 기르려했지만 결국 아이 덕분에 두려움을 떨치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감동적인 이야기. 늘 아이 걱정에 곁을 맴도는 헬리콥터맘들에게 깨달음을 줄 작품.


3 Poka & Mine 포카와 민느

발이 6개 달린 곤충 엄마(혹은 아빠. 작품 속에서 성이 드러나지 않는다.)와 자녀 곤충을 통해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상 속 소소한 드라마를 담아내는 시리즈물.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한부모가정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특징이다. 웃음의 힘을 믿는 키티 크라우더의 유머러스함과 실제 두 아들을 기르며 생긴 육아 에피소드를 엿볼 수 있는 책. 2005년부터 시작해 현재 7권의 책이 나왔다.


4 Le petit homme et Dieu 작은 사람과 신

한 사람이 길을 가다 우연히 신을 만난다. 신은 변신술, 하늘을 나는 능력을 가졌지만 의외로 나무타기, 호수에서 수영하기를 해본 적 없다. 작은 사람 덕분에 숲 속을 돌며 즐거운 추억을 쌓는 신. 이 책은 작가의 큰 아들 테오도르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아이들 눈에 부모는 신처럼 전지전능해 보이지만, 부모 역시 자녀 덕에 새로 배우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5 Moi et rien 나와 아무것도

‘나’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친구가 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삶의 의지를 모두 잃어버린 아빠를 지켜보는 게 힘든 나를 응원하고,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다. 누군가 물어보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답하긴 하지만, 그 ‘아무것도’가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추상적 개념을 시각화 하는 키티 크라우더의 탁월한 능력이 잘 담겨있는 작품.


6 Scritch scratch dip clapote ! 난 이제 하나도 무섭지 않아

언제나처럼 ‘제롬’네 집에 밤이 찾아온다. 아빠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어준 뒤 포옹을 하고 불을 끄기 전 마지막으로 엄마가 뽀뽀를 해준다. 혼자 깜깜한 방, 침대 위에 누운 제롬.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데? 누가 이 소리를 내는 거지?’ 어둠을 두려워하는 아이의 심리 뿐 아니라 아이의 감정 표현을 쉽게 간과하고 넘기는 부모들의 태도에 대한 반성이 함께 담겨있는 작품이다. 한국어판은 2003년 김영사에서 출간했다.


7 La visite de petite mort 꼬마 죽음이 찾아왔어

죽음은 둥글둥글 순하고 소심하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지만 말이다. 멋쩍은 얼굴로 사람들을 찾아가면 무작정 냉대를 당해 외로운 죽음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지병을 앓아서 죽음이 주는 평온함을 기다려 온 한 소녀 ‘엘스와이즈’를 만나면서 둘은 교감과 우정을 나눈다. 죽음이 늘 우리 곁에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지금 이 순간을 더 깊게 살아낼 수 있다는 작가의 목소리가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책.


8 Mon ami Jim 내 친구 짐

온 몸이 하얀 갈매기와 온 몸이 까만 까마귀가 세상의 편견과 편 가르기를 뛰어 넘어 진실한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 태곳적부터 인류가 전해 온 ‘이야기’의 힘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백색 갈매기 마을에서 늘 소외당하던 까마귀는 어느 날부터 서서히 그들의 마음을 돌리기 시작한다.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읽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편견을 이기는 이야기의 힘을 그려냈다. 한국어판은 2002년 금성출판사에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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