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시간을 아세요?><쉿 조용> 작가의 창작 노트
‘불을 켜기엔 아직 환하고 책을 읽기엔 조금 어두운’ 새벽 녘과 해 질 녘에 ‘파란 시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 침묵과 정적과 고요에 ‘조용 왕자’라는 이름을 붙인 뒤, 쉴새없이 자기 말만 하는 사람들이 사는 왕국으로 보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는 사람. 압도적인 통찰력과 예민한 감성을 지닌 벨기에 작가 안느 에르보를 카메라 앞에 세우기 위해선 그녀가 정해놓은 두 가지 룰에 따라야만 했다. 집이나 아틀리에 방문은 안된다. 원화를 촬영 현장에 가져가 보여줄 순 없다. 섭외 과정에서 “작가의 사적인 창작 공간을 보여주는 게 이 기사의 장점이다. 이전에 인터뷰에 응했던 다섯 명의 작가는 모두 아틀리에를 공개했다.”는 간곡한 이메일로 회유해 봤지만 실패했다. 아, 쉽지 않은 사람!
인터뷰 당일, 20년째 안느 에르보 책을 출판하고 있는 출판사 카스테르만(Casterman)의 안내 데스크에서 그녀를 기다리는데 이런 몹쓸 상상이 머리를 스쳐갔다. 인터뷰 도중 까칠하고 예민한 말투로 “이런 후진 질문에는 답하고 싶지 않군요.”라고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는 작가의 뒷모습.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하얀 복도 저 멀리에서 이쪽을 향해 성큼 성큼 다가온 안느 에르보는 어두운 근심을 씻어내고도 남을 환한 미소와 친절한 말투로 우리를 안내했고, 총 네 시간의 인터뷰 시간 내내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감추기보다는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시처럼 아름답고 모호한 말들이 넘쳐 흘렀고, 내 머릿속 ‘불어-한국어 변환기’는 그 수준과 속도를 따라 가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었다. 적절한 대답을 찾기 위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를 돌려가며 잠시 생각에 빠질 때를 제외하고 그녀는 쉼없이 말했다. 내가 낯선 억양의 불어로 질문할 땐, 너그러움을 가득 담은 초록색 눈으로 지긋이 바라봤다.
하지만 안느 에르보와의 인터뷰가 결코 편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상에서는 좀처럼 쓰지 않는 관념적인 단어로 생각을 풀어냈기에 속뜻을 파악하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촉수와 레이더망을 바짝 세워야 했다. 녹취를 풀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두 번 반복해 들으면 글을 쓸 수 있었지만, 그녀의 경우엔 네 번이나 들어야 했다. 그냥 듣기만 해서는 안됐다. 의자를 바짝 당겨 허리를 세우고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녀는 생각이란 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날 선 상태로 나를 이끌었다.
이것은 안느 에르보라는 사람의 특징이자 그녀가 만든 그림책의 특징이기도 하다. 지난 20년간 출판한 40여 권의 작품들 가운데 전통적인 기승전결 구조를 가진 책은 단 한 권도 없다. ‘침묵’ ‘4월’ ‘월요일’ ‘근심’ ‘아침’ ‘파란 시간’ 같은 추상적 개념이 의인화 되어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가 많고, 그 어떤 책도 “둘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명확한 결말로 독자를 안심시키지 않는다. 줄거리를 요약할 수조차 없는 책이 수두룩하다. 머릿속을 점령해버린 물음표에 답하기 위해선 앞으로 돌아가 다시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안느 에르보 그림책에 늘 철학적이라는 수식이 따라다니는 이유다.
인터뷰 도중 안느 에르보는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책에 질문을 많이 넣습니다. 하지만 답은 절대 적지 않습니다. 인생의 본질이 그래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황이 끝없이 이어지지만, 정답은 아무도 모른 채 나아갑니다. 우리를 발전하게 만드는 건 인생의 그 모호함입니다.” 일상 속에서 어떤 감정이나 장면이 쉽게 넘겨지거나 않아서 자꾸만 되새김질하고 곱씹어보게 된다면, 혹은 일을 하는데 숙련되지 않은 과제가 주어져 자신을 긴장시킨다면 그건 좋은 신호다. 경계를 깨고 관점을 바꾸는 것들은 ‘편하지 않다’. 안느 에르보에게 창의력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막막함을 견디는 자세를 의미했다.
안느 에르보는
1975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6세부터 동네 화실을 다니기 시작해 성장기 내내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브뤼셀 왕립예술학교(Académie des Beaux-Arts)에서 일러스트를 공부했고, 졸업 작품을 본 출판사 측의 제안으로 바로 작가로 데뷔했다. 1999년에는 『달님은 밤에 무얼 할까요』로, 2010년에는 『여기 런던』으로 볼로냐 아동도서전에서 수상했다. 프랑스 몽트뢰유 도서전 ‘바오밥상’과 서점연합회 ‘마녀상’ 등 아동문학상을 휩쓴 벨기에의 대표 그림책 작가 중 한 명이다.
Q ‘텔레라마’ ‘르몽드’ 등 불어권 언론사와 진행했던 지난 인터뷰를 보니 늘 커피 포트를 분신처럼 들고 촬영하셨더군요. 오늘도 역시 챙겨오셨고요. 또 작가님이 그린 거의 모든 책에 숨은 그림처럼 커피 포트가 들어가 있죠. 『시간이 들려주는 이야기』 『작은 기상학 Petites Météorologies』은 아예 표지가 커피 포트고요. 커피 포트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전 자기만의 태도와 뉘앙스를 가진 물건을 좋아합니다. 의자나 커피 포트가 그래요. 우리가 이 회의실을 떠나면서 의자 정리를 안 하면 다음에 들어온 사람이 우리가 어떤 자세로 앉아 이야기를 나눴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흐트러진 정도, 두 의자 사이의 거리, 등받이 방향 같은 것을 보고요. 의자는 빈 공간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물건입니다. 커피 포트 역시 자기만의 느낌이 있어요. 다리를 그려넣으면 착한 사람처럼 보였다가 코끼리로 변신하기도 하죠. 뚜껑을 움직이면 꼭 말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커피 포트 여러 개를 선반에 올려두고 보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기도 하고요. 오래 사용한 커피 포트는 안쪽에 나이테처럼 커피 자국이 남아 있어서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고, 커피가 끓을 땐 예쁜 소리가 납니다. 제가 좋아하는 요소가 모두 들어있어요.
Q 그렇게 한 가지 사물을 풍요롭게 관찰하는 시선은 타고난 것인가요?
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도시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요. 어릴 땐 늘 나무를 타고 놀면서 촉감으로 나무를 인식했습니다. 복잡하게 뻗어나가는 나뭇가지의 흐름, 시냇물 소리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티티새, 울타리 사이 빈 공간에서 부서지는 햇빛… 이런 자연 속 소소한 풍경을 쳐다보면서 걸핏하면 몽상에 빠졌죠. 특히 티티새는 제가 ‘파란 시간'이라고 이름 붙인 해 질 녘에만 노래했어요. 모든 물건들이 자신의 무게를 잃고 부유하는 시간. 계산하고 전략을 세우는 이성은 잦아들고, 감각이 날카로워지는 시간. 작은 소리나 공기 중에 실려온 냄새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때가 바로 이 파란 시간이었어요. 엄마가 “안느, 이제 밥을 좀 먹으렴!” 다그쳐야 겨우 정신이 돌아왔죠. 두 살 반 된 제 아들도 엄마와 똑같은 병을 앓고 있어서(웃음) 멍한 표정으로 몽상 여행을 떠날 때가 많답니다. 아침마다 그 아이를 현실로 데려와 옷을 입히고 밥을 먹여서 놀이방으로 보내는 건 쉽지 않지만, 가급적 그 꿈을 깨지 않으려고 주의합니다.
Q 아이가 멍하게 딴 생각을 하고 있으면 ‘저렇게 야물지 못해 험한 세상 어떻게 사나’ 걱정이 될 법도 한데요.
물론 부모가 규제와 엄격함으로 아이의 틀을 잡아줄 필요는 있습니다. 약속 시간 지키는 법, 준비물 챙기는 법 같은 것도 가르쳐야 아이가 커서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죠. 하지만 매 순간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오늘 아침에도 놀이방에 도착해 카시트에서 아이를 내리려는데 멍한 얼굴로 꿈꾸고 있더군요. “지금 가야 하지만 몽상하도록 엄마가 너를 잠깐 그냥 둘게.”라고 말했더니 아이가 고맙다는 듯이 살짝 웃더군요. 아이가 몽상 세계로 안심하고 떠나도록 허가해주는 것. 전 그게 어른이 해야 할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몽상은 창조적인 사고를 키워내는 둥지입니다. 몽상은 세상을 다르게 보고, 오래 보고, 이면에 대해 질문하는 시간이죠.
Q 섬세한 언어 감각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듯 합니다. 어머니가 인도유럽어 문법을 비교 연구하는 학자셨다고요.
언어의 기원과 진화에 대해 연구하셨습니다. 산스크리트어, 인도어, 그리스어 등 서양 언어의 뿌리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모르는 외국어 단어를 만났을 때, 어근을 분석해 그 단어의 고향을 추측하실 수 있었어요. 어머니가 전문적인 설명까지 해주신 건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언어도 스스로 진화한다는 사실을 배울 순 있었습니다. 단어 하나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가 퇴적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Q 아버지는 식물학자였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토양이 식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하셨는데요. 가족끼리 등산을 가면 시냇물 흐름을 보면서 이 땅이 오랜 시간동안 어떻게 변해왔는지, 퇴적토를 보면서 그게 몇 백 년 전 땅인지, 바위를 보면서 빙하가 어떻게 작용했을지 등을 설명해주셨어요. 그런 설명을 들을 때마다 산이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폴짝폴짝 뛰면서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자연의 유구한 역사와 눈에 보이지 않는 유기적인 관계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 건 아버지 덕분입니다. 두 살 어린 제 여동생은 양자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는데요. 문학과 물리학 두 분야가 정반대로 보이지만 둘의 관심사는 결국 만납니다. 시간을 가지고 놀고 싶어하는 것이죠. 참고로 물리학자 중에 어린이 그림책에 상당한 조예를 가진 학자들이 꽤 많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근본적인 원리에 무한한 호기심을 가졌다는 면에서 두 분야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Q 한 인터뷰에서 ‘성장기에 부모님으로부터 늘 응원을 받는 느낌이었다’라는 말씀을 했는데요. 특히 기억에 남았던 격려의 말이 있나요? 부모님의 화법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한참동안 생각한 뒤) 무엇이 저에게 힘을 주었는가 떠올려보면 ‘있음’ 그 자체였습니다. 부모님이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 그 자체요. 엄청나게 많은 놀잇감이나 도구를 손에 쥐어 주고, 옆에서 “잘한다” “멋지다” 칭찬을 늘어놓지 않으셨어요.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주셨습니다. 부모님이 저희를 산으로 들로 데리고 다니면서 자연을 관찰하게 한 것은 ‘이 아이들을 똑똑하게 만들겠다’는 목적 의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두 분이 좋아하니까 행복을 나누고 싶었던 거죠. 부모님이 제게 주신 가장 큰 유산은 기다리는 법을 훈련시켜주신 겁니다. 새소리를 듣기 위해 바위 위에 앉아 있다가 돌아오는 일, 시냇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돌아오는 일처럼 사회의 기준으로 봤을 땐 ‘아무 쓸모 없는 일’에 시간을 써도 불안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키워주신 걸 가장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Q 아이와 놀아줄 때조차 시간 대비 효율을 따지게 만드는 게 요즘 사회인데요.
전 지금도 제 아이와 한 방에서 3시간 동안 별 시답잖은 장난을 하면서 함께 있어주는 게 최고의 교육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렇게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요. 아이를 피아노, 발레, 체조, 요리 교실로 돌리거나 교구나 장난감을 잔뜩 사주는 건 오히려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것에서 저것으로 빨리 빨리 넘어가는 아이에겐 남는 게 없어요. 아이를 요리 교실에 보내서 강사들과 배우게 하는 것보다는 부모가 저녁 준비를 하면서 감자 하나를 손에 쥐어주고 느껴보고 관찰해보라고 하는 편이 더 낫다고 봅니다. ‘내가 무얼 해줘서 아이를 이렇게 만들겠다’는 강박을 좀 내려놓아야 해요.
Q 책이 유년기의 가장 좋은 친구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책의 어떤 면이 그토록 매력적이었나요?
책은 마법과 같아요. 물질적으로 봤을 땐 그저 종이 더미를 엮어놓은 하찮은 물건으로 값어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걸 펼치는 순간 무한대의 자유가 열립니다. 그림책으로 예를 들어보죠. 작가가 창조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2차원이죠. 그게 책으로 엮이면 부피감이 있는 3차원의 물건이 됩니다. 하지만 독자가 책장을 펼치지 않으면 그냥 냄비 받침 같은 종이 더미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책으로서 살아 숨쉬려면 독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독자는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때론 이야기에 빠져들어 시간 감각을 완전히 잃습니다. 환상 세계 혹은 상상 세계로 이동하는 거죠. 이 세상은 무한대입니다. 여기에 책의 4차원 속성 ‘시간’이 있습니다. 이렇듯 책은 고도의 창작물입니다. 영화, 연극, 회화… 모든 예술이 그 안에 있죠. 저는 글 혹은 그림을 이용해 책을 짓는 게 아닙니다. 글과 그림 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빈 공간에서 책을 짓습니다. 독자 안에 있는 무언가를 톡톡 건드려서 꿈꾸게 만들려고 책을 만듭니다.
Q 흔히 말하는 어린이 그림책의 문법과 완전히 동떨어진 작품을 만드시기 때문에 ‘아이들이 보기엔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는 엄마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2004년에 발표하신 『월요일 Lundi』의 경우, 주인공 이름이 ‘월요일’이고 친구의 이름은 ‘어제’와 ‘내일’입니다. 겨울이 찾아와 눈보라가 이어지면서 월요일이 점점 사라집니다. 책장을 뒤로 넘길수록 종이질 자체도 점점 가벼워지고 투명해지죠. 독자 입장에서는 손가락의 촉감과 시각으로 주인공의 사라짐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시적이고, 은유적이고, 모호한 내용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계신 건지요?
『월요일 Lundi』은 부모님들이 읽고 나서 특히 겁을 먹는 책이지요. (웃음) 마지막에 주인공이 죽은 거냐는 질문을 엄청나게 받았는데요. 저도 월요일이 죽은 건지 그냥 사라진 건지 모릅니다. 독자가 각자 느끼고 추측하면 될 뿐이에요. 아이들은 오히려 패닉에 빠지지 않고 뒷 이야기를 맘껏 상상하며 그 모호성 자체를 즐길 줄 압니다. 매사 결론을 짓고 답을 내려는 건 어른들의 강박이죠.
Q 아이 앞에서 “나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걸 어려워하는 부모도 많습니다.
부모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이의 모든 질문에 적절한 설명을 해줘야 한다고 부담을 느낄 필요 없어요. 만약에 엄마가 확신도 없으면서 “이건 이런 거란다”라고 가르치려 들면 아이는 ‘지금 엄마가 편치 않구나’ 단박에 느낍니다. 차라리 “엄마는 모르겠어.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라고 말하는 게 낫죠.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솔직한 엄마가 되는 거니까요. 사실 요즘 부모님이 진짜 겁을 내야 하는 건 모호한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폭력적이고 적나라한 이미지 아닌가요? 총을 들고 무장을 한 군인을 보여주는 텔레비전 뉴스 이미지는 명확합니다. 하지만 그게 전쟁에 대해 사유하게 만드나요? 차라리 전쟁의 본질을 은유적으로 담아낸 문학 작품, 그림책 한 권을 보여주는 게 더 나은 교육이죠. 지금까지 전 집에서 텔레비전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아이의 창의성을 죽이고 싶나요? 텔레비전만큼 좋은 도구는 없습니다.
Q 최근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바람은 보이지 않아 De quelle couleur est le vent ?』는 시각장애인 아이가 실제로 작가님에게 던진 질문에서 출발한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촉감을 시각화했고, 『쉿, 조용』에서는 청각을 시각화했습니다. 이렇게 공감각적 은유가 풍부하게 담긴 것도 작가님 책의 큰 장점입니다.
은유법을 그저 예쁜 꾸밈으로 오해하기 쉬운데요. 제게 은유는 실체가 있는 단단한 존재, 이를테면 나무, 커피 포트 등을 닻으로 삼아서 추상적인 사유를 묶어두는 작업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건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이면을 상상하는 거죠. 질문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일이에요. 예를 들어 나무는 땅 윗면에서 나뭇가지가 뻗어나간만큼 땅 속 뿌리도 같은 비율로 퍼져 있습니다. 그 모습을 독서와 연결지어 봅니다. 뿌리는 책에 직접적으로 인쇄되지는 않았지만 작가가 가진 정신적 토양을 은유하고, 나뭇가지와 잎사귀는 독자 내면에서 완성되는 이야기를 은유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는 거죠. 이렇게 관점을 바꿔보는 건 놀이 같은 것입니다. 아직 놀 줄 아는 능력을 잃지 않은 아이들은 누구나 이런 발상의 전환을 하죠.
Q 그림을 그릴 때 밑스케치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려야 할지 쉽게 감이 잡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요.
네. 저는 숙련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여섯 살 때부터 화실을 다니기 시작해 대학 입학 전까지 늘 그림을 그렸습니다. 화가가 되려던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냥 그리는 게 좋아 다녔을 뿐입니다. 하지만 훈련한 시간이 10년이 넘다보니 테크닉적으로 거의 모든 기법을 마스터한 상태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오히려 벽에 부딪혔습니다. 익숙하고 완벽한 그림에선 새로운 통찰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숙련된 오른손을 놔두고 왼손으로 그려봤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툼의 미학을 깨달았어요. 자기 안에 잠자고 있는 창의성을 깨우려면 불편한 일, 해보지 않은 일, 잘 못하는 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에 뛰어들어야 해요. 편한 게 늘 좋은 건 아니랍니다.
Q 성과를 내놓아야 하는 경쟁 사회에서 서툼의 미학이 필요한 이유는 뭘까요?
대충 예뻐보이고 좋아보이는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진짜 자기 이야기를 꺼내 놓는 창작을 하려면 그래야 합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4년동안 일러스트 공부를 하긴 했지만 당연히 ‘졸업하면 다른 직업을 찾아야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학교 선배들 중에 그림책 작가로 데뷔해 안정적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감히 책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죠. 어차피 졸업하면 다른 직업을 갖게 될 거니까 학교에 있는 동안은 ‘어떻게 하면 내 머릿속 질문들을 그림책의 형태로 옮겨 놓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면서 최대한 멀리까지 가보고 탐험하자고 결심했죠. 역으로 제 인생에서 가장 창의적인 시기를 보낸 것입니다. 졸업 작품을 보고 카스테르만 출판사에서 그림책 작가로 데뷔를 권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만약 제가 목적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테크닉적인 그림의 품 안에 머물렀을 것이고, 저만의 작품 세계가 발전하지 못했을 겁니다.
Q 두 살 반 된 아들을 키우는 엄마입니다. 어떤 식으로 독서 교육을 시키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책이라는 물건 자체와 친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갓난아기일 때부터 요람 안에 책을 넣어 놨습니다. 미국 포토그래퍼 타나 호반(tana hoban)이 만든 흑백 그림책 시리즈를 아들이 특히 좋아했죠. 오리, 고양이, 단추 같은 물건의 실루엣을 흑백으로만 표현한 매우 단순한 책인데 신생아들도 하염없이 그림을 바라본답니다. 요즘은 매일 밤 자기 전에 2권씩 책을 읽어줍니다. 별다른 원칙은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율, 언어의 음악성을 즐기기 위해서 소리내 읽어준다는 것 말고는요. 아들은 늘 3권을 읽어달라고 협상을 시도하죠. 어린이 책만 보여주는 건 아닙니다. 으스스한 그리스 전래 동화나 신화 같은 것도 읽어주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 도록도 자주 봅니다. 카라바조 그림을 보면서 “수염 난 아저씨"라며 좋아하더라고요. (웃음) 굳이 아이용 어른용으로 책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Q 아이의 질문에는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아이들은 어른을 당황시키는 질문을 하는 선수들인데요.
질문 자체를 못하게 막아선 안됩니다. 우선 들어주는 게 중요해요. 대신 아이의 질문을 ‘엄마의 숙제'로 여기지 않고 모르면 모른다고 합니다. 헌데 아이들은 자신 안에 있는 걱정이나 두려움을 꺼내려고 질문을 할 때가 많아요. 자기 표현의 한 형태죠. 그런 경우라면 그 마음을 알아차려 주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밤에 사람을 잡아 먹는 늑대가 오면 어떻게 하냐는 질문을 하면 전 “그런 늑대는 이 세상에 없어"라고 팩트를 정확히 알려주고, “네 머릿속에만 있는 동물인데 만약에 계속 겁이 나면 그 늑대를 꺼내주기 위해서 엄마랑 얘기를 해보자.”라고 아이의 두려움을 인정해줍니다.
Q 엄마이자 작가 입장에서 그림책이란 매체의 창의성을 풍요롭게 즐기기 위한 마지막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언어가 가진 음악성을 최대한 즐기려면 소리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마음껏 상상하며 여행하세요. 그림을 볼 땐 ‘이건 뭘까 어떤 의미일까’ 질문하면서 관찰해보세요. 마지막에 교훈을 찾지 마세요. ‘아, 이 책은 이해가 안되네. 더 똑똑해야 이해할 수 있는 책인가봐’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마세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디 목적의식을 내려 놓으세요.
해 질 녘과 새벽 녘, 온 세상이 파랗게 물드는 그 시간을 몽환적인 이야기로 묘사했다. 태양 왕과 밤의 여왕이 힘겨루기를 하는 세상에서 ‘파란 시간’은 낡은 가로등 기둥 속에 숨어 산다. 그러다가 새벽 공주에게 반한 파란 시간이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모험을 펼치는 이야기. 낮과 밤, 노을과 여명을 보고 이런 상상도 할 수 있구나 감탄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한국어판은 2003년 베틀북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어느 날, 아기 곰 악쉬발드 머리 위에 작은 구름이 자리를 잡았다. 구름을 쫓아 내려고 물구나무도 서 보고 빠르게 달려 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꿀을 실컷 먹어보기도 하면서 안간힘을 쓰지만 구름은 늘 그자리다. ‘제거’하기 위한 모든 노력에도 구름이 사라지지 않자 악쉬발드는 울음을 떠뜨리는데, 구름이 함께 울면서 비가 되어 떨어지고 결국 구름이 사라진다는 이야기. 걱정의 작동 원리를 탁월하게 묘사한 책. 2015년 담푸스 출판사 번역.
3 달님은 밤에 무얼 할까요 Que fait la lune, la nuit ?
‘달님은 좋은 꿈을 씨 뿌리고, 나쁜 꿈은 창고 속에 가둔 다음, 고요한 밤에다 신비로운 새를 풀어 놓습니다.’ 같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밤 시간의 흐름을 담아냈다. 도시와 마을로 가서 시끄러운 소리를 깨끗이 몰아내고, 자기 얼굴이 예쁜가 안 예쁜가 호수에 비춰보고, 아침이 좋아하는 이슬을 뿌려놓는 달님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 않기란 실로 어렵다. 1999년 볼로냐 도서전 수상작. 한국에선 2000년 베틀북 출판사를 통해 출간됐다.
4 테페르레스 Theferless
2012년 작. 테페르레스라는 이름의 제비가 매해 여름 첫 날, 멀고 먼 나라로 ‘파랑’을 가지러 떠난다. 파란 바람, 파도, 하늘의 냄새를 깊은 숲 속 집에 사는 한 가족에게 물어다준다. 신기하게도 이 책을 보다보면 아득한 시간의 영원성을 느끼게 된다. 안느 에르보 책 가운데서도 가장 실험적인 작품 중 하나.
5 작디 작은 것들 Les moindres petites choses
토끼와 함께 사는 4월 아줌마는 요리를 하고 정원을 가꾼다. 집 주변의 풍경을 담아낸 이 책의 오른쪽 페이지는 모두 접혀있다. 왼쪽 페이지는 소소한 일상의 풍경이 있고, 오른쪽 페이지를 펼치면 낯설고 거대한 풍경이 열린다. 작다는 것의 의미, 크다는 것의 의미, 일상과 우주의 만남을 탐구한 아름다운 책. 2008년 작.
6 월요일 Lundi
안느 에르보 책에서는 종이 무게와 촉감까지도 창작의 재료가 될 때가 많다. 주인공 월요일이 눈보라와 함께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첫 페이지부터 뒤로 갈수록 종이가 조금씩 가벼워지고 투명해지도록 총 5가지 두께의 인쇄 용지를 사용했다. 시간의 흐름과 사물의 소멸에 대한 안느 에르보 특유의 철학과 감수성을 모두 담아낸 수작이다. 2004년 작.
7 이만큼 널 사랑해 Je t’aime tellement que
문장의 음율과 음악성에 무척 예민한 안느 에르보의 작품 세계가 잘 드러난 작품. 책 속 모든 문장은 ‘이만큼 널 사랑해’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사랑의 감정을 섬세한 은유로 표현했다. ‘수도꼭지에서 바닷물이 나올만큼 널 사랑해’ ‘배가 아플만큼 널 사랑해’ ‘달님이 내 소식을 듣기 위해 전화를 걸만큼 널 사랑해’ 등등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려주고픈 문장이 가득 담긴 책이다. 2013년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