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많은 나쁜 X, 글쓰기 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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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눈을 뜨자마자 세수도 하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았다. 밤새 한국에서 온 메일은 없는지, 블로그와 포스트는 무탈한지, 이웃 블로그에 재미있는 글이 올라왔는지 순찰 한 바퀴를 도는 사이(그러다가 슬그머니 연예 뉴스로 흘러 들어가는 건 공공연한 비밀), 머릿속에서는 야단법석이 시작된다.
'야, 너 지금 며칠동안 글다운 글은 한 줄도 안 쓴 거 몰라?'
'지금 유재석이 FNC 간 게 뭐가 중요하냐.'
'금요일까지 마감해야 하는 원고 구상도 안 해놓고...'
'오늘은 뭐 할 건데? 어떤 글 쓸 건데?'
'글 잘 쓰고 싶다고 했던 건 다 개뻥이지. 노력도 안 하면서.'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그래, 맞다! 개뻥이다. 어쩔래!' 반항하며 엇나가고픈 심정이 된다. 하지만 글을 잘 쓰고 싶다고 말해왔던 것과 바라왔던 것은 정말이라서, 후우, 크게 한숨을 한 번 쉬고 인터넷 창을 닫는다. 일어나자마자 눈꼽을 잔뜩 붙인 채로 책상으로 달려오는 이유가 실은, '써야만 한다'는 다짐 때문이었다는 걸 상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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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금사빠'라서 열정의 주기가 짧다. 뭔가 근사한 것을 발견하면 폭발적으로 몰입해서 그것을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내팽개친다. 영화를 좋아했을 땐 매일 영화를 봤고, 만화에 빠졌을 땐 매일 만화만 봤다. 어떤 음반은 과장이 아니라 정말 1,000번을 반복해 듣기도 했다. 질릴 때까지 계속하고, 질리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패턴으로 관심사를 갈아치웠다.
글쓰기는 끈기라는 것을 평생 가져본 적 없는 내가 유일하게 오랜 시간 해온 일이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품은 게 스무 살 무렵이었으니 14년째 이 짝사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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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정도 잡지사에서 원고를 박아가며 (마감 중에는 에디터들이 영혼을 어디다 팔아 먹고 온 표정으로 손가락만 빠르게 놀려서 타닥타닥 원고를 쓰는데, 그 모습이 재봉 공장 풍경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선배들은 그래서 원고를 '쓴다'고 하지 않고 '박는다'고 했다.) 먹고 살았으니까, 글쓰기에 대해선 어느 정도 프로 의식 비슷한 걸 가져도 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빠져나갈 구멍을 잔뜩 마련한 어이없는 문장으로 말할만큼 자신없고, 월급쟁이 에디터 시절에 썼던 기사들을 떠올려보면 부끄러운 생각에 분서갱유 해버리고 싶지만.
한번도 글쓰기에 대해 '내가 좀 알지'라든가 '이럴 땐 이게 답이야'라든가 '이게 좋은 문장이고 이건 나쁜 문장이야' 같은 확신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세상에는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자다가 이불 하이킥을 할 정도로 많다는 사실과 내가 글을 잘 쓰고 싶어한다는 것, 두가지 뿐이다.
이건 학교에서 제일 인기 많은 '글쓰기'라는 남자애를 짝사랑하는데, 학교에는 나보다 예쁘고 매력적인 애들이 넘쳐나고, 다른 애들과 차별되는 나만의 매력 포인트가 뭔지 파악조차 되지 않는 상황과 같은 거다. 자존감이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고, 좌절스러운 순간이 참 자주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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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이 나를 지치게 할 땐, '글쓰기'라는 나쁜 X을 사랑하게 된 다른 짝사랑 피해자들이 고통을 호소한 글을 찾아 읽는다. 이 X에게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 놈이 나한테만 쌀쌀맞은 게 아니구나'를 확인받는 순간 바보처럼 세상이 조금은 더 살만하게 느껴지고, 다시 힘을 내 그 X를 사랑하고 싶어진다.
김중혁 소설가가 위즈덤하우스 블로그에 연재하고 있는 '창작의 비밀' 같은 글은, 그래서 너무 소중하다.
"잘 써지면 이럴 필요 없다. 잘 써지는데 왜 이러고 있겠나. 글을 써 본 사람은 이 막막함을 다들 알 것이다. 분명히 글쓰기 화면을 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쇼핑 사이트를 보고 있는, 나도 모르게 물건들을 카트에 담고 있는, 이 막막함을 잘 알 것이다. 원고를 보내는 대신 택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 막막함을 알 것이다."
- 김중혁 '창작의 비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