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디터C 최혜진 Jun 30. 2016

포르투갈의 오래된 서점

생활의 터전을 옮겨 낯선 도시에 정착한 일이 몇 번 있다. 지금으로부터 십몇 년 전쯤, 대전 토박이로 서울 북아현동 눅눅한 반지하방에 이사 왔던 첫날밤. 형광등 불을 끄면 서울이라는 거대하고 깜깜한 우주에 홀로 떨궈진 외톨이처럼 느껴질 것 같아 훤히 불을 밝히고 잠을 청했다. 닳고 닳은 10년 차 직장인의 삶을 끝내고 반백수의 삶을 시작한 곳은 프랑스 보르도였다. 불어를 할 줄 몰라 트램을 탈 때도 슈퍼마켓에서도 노상 “Oh, pardon”을 외치며 많은 것을 죄송스러워했던 겨울. 그로부터 1년 뒤, 다시 이삿짐을 챙겨 국경을 넘었다. 전입신고를 하려는 외국인들에게 신경질적으로 성깔 부리는 게 주요 업무이자 취미인 구청 공무원의 비위를 맞춰가며 벨기에 브뤼셀에 정착했다.


움츠러든 마음을 펴고 새 도시와 정을 붙이기 위해 우선적으로 시급하게 처리하는 일이 있다. 바로 단골 서점을 만드는 것. 뻔질나게 드나들어서 어느 서가에 무슨 책이 있는지 대충 아는 서점이 하나 생기면 비로소 그 도시를 사랑할 수 있었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가 그랬고, 보르도 ‘몰라(Mollat)’가 그랬고, 브뤼셀 ‘필리그란(filigranes)’이 그랬다. 


세계 어느 도시나 서점 풍경은 비슷하다. 반듯반듯 정돈된 책더미에서 살포시 올라오는 쿰쿰한 먼지 냄새, 서가를 따라 눈으로 훑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책 표지들, 무엇보다 책 속에 폭 빠져 있는 사람들의 표정과 그를 부드럽게 둘러싸고 있는 몰입의 에너지가 좋다. 자기가 얼마나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고 입을 헤 벌린 채 만화책에 빠져있는 잘생긴 남자를 만나는 행운도 종종 찾아오고. 


식당이나 화장실, 지하철 어디에서나 활개 치는 셀카족도 이상하리만치 서점에서는 쉬이 카메라를 꺼내지 못한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몰입의 자기장 속에 있는 사람 옆에서 ‘남의 시선으로 볼 때 지금 나는 어떻게 보이는가’를 점검할 마음을 먹기란 쉽지 않다. 요컨대 서점은 바깥세상의 너저분한 일을 잠시 잊고 뚜벅뚜벅 침묵과 공백 속으로 걸어 들어가 머물게 만들어주는 과묵한 친구다. 그런 친구와 가까이할수록 삶의 질은 좋아진다. 




-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아름다운 해변과 바다가 있는 포르투갈에 가서 굳이 서점을 돌겠다고 마음먹은 건 파스칼 메르시어가 쓴 《리스본행 야간열차》때문이었다. 비 오는 어느 날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 포르투갈 여자를 구한 고전문학 교수 그레고리우스. 여자가 남긴 포르투갈어의 멜로디에 홀려 에스파냐 책방을 찾는데, 거기서 우연히 발견한 포르투갈 작가 프라두에 대한 호기심이 그를 충동적으로 리스본행 기차에 오르게 한다. 프라두의 일생을 추적하는 여행을 하며 ‘내 인생이 어떤 모습으로 충족되어야 한다는 상을 만든 사람은 다른 아닌 나’라는 깨달음을 얻고, 이전과 다른 삶의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내용.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서’ 스스로 가진 줄조차 몰랐던 다르게 살고 싶다는 소망. 거기에 불을 댕기는 한 권의 책 그리고 서점. 이 이야기만으로 그곳에 가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첫 목적지는 포르투(Porto)였다. 16세기 대항해 시대의 관문이었던 항구 도시로 아줄레루(포르투갈의 독특한 타일 장식) 파사드가 보존된 옛 건축물과 남부의 햇빛처럼 쨍한 컬러로 벽을 꾸민 가정집이 협곡을 따라 세워져 장관을 이룬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도우루(Douro)강은 알코올 도수 20도짜리 포트(Port)와인의 성지이기도 하다. 이 도시엔 또 1906년에 조제 렐루, 안토니오 렐루 형제가 세운 서점 렐루(Livraria Lello)가 있다. 


 


처음에 인터넷에서 렐루 서점의 사진을 봤을 때, 몇 초 간 눈만 껌뻑 껌뻑 했다. 도저히 현실성이 없는 이미지였다. 공간을 휘감아 부드럽게 2층으로 이어지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붉은 계단, 저것을 어떻게 일일이 손으로 깎았을까 싶은 서가의 화려한 목조 장식, 8미터 규모의 천정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과 노란 독서등 불빛이 섞여 자아내는 신비로운 깊이감까지, 서점 그 자체가 해석을 기다리는 거대한 읽을거리였다. 


포르투에서의 첫 아침, 부지런을 떨어 도착한 렐루 서점 앞에는 이미 입장을 기다리는 관람객들로 인산인해였다. 《해리포터》 작가 조앤 롤링이 렐루 서점에서 《해리포터》를 구상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히는 바람에, 헤르미온느도 없고 볼드모트도 없는 이곳에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이미 1900년대부터 카밀루(Camillo Castelo Branco, 소설가 겸 평론가) 같은 포르투갈 현대 문학 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학계의 중요한 살롱 역할을 했던 렐루 서점 입장에선 해리포터 하나만 알고 밀려드는 관광객이 반가울 리 없다. 실제 책을 구매하는 단골들이 관광객 등쌀에 서점을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으니까. 

엄격히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리베라시옹’ ‘가디언’ ‘뉴욕타임스’ 등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 칭송하는 이곳으로 밀려드는 인파를 막을 도리는 없었다. 때문에 바캉스 기간에는 아예 3유로의 입장료 겸 도네이션을 받고 사진 촬영을 허가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꿨다. 




표를 사서 들어간 렐루 서점 내부 상황은 당장 뛰쳐나오고 싶을 만큼 참담했다. 자기 얼굴 사진을 찍겠다며 계단을 점거하고 시끄럽게 웃어대는 사람들 옆에서 책을 볼 순 없었다. 로망이 컸던 만큼 속상함도 깊었다. 

고개를 들어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니 ‘decus in labore’라는 포르투갈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dignity of labor, 노동의 존엄성. 52년 동안 렐루에서 책을 팔아온 도밍고 할아버지가 단골손님을 위해 책을 나르고 서가 사이를 오가며 ‘노동’하는 대신 젊은 알바생이 앉아서 입장 티켓을 팔아야 하는 슬픈 현실. 렐루 서점은 언제 다시 서점의 존엄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감탄하며 읽었으면서도 리스본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파스칼 메르시어가 소설을 시작하며 인용한 다음 글의 주인, 페르난두 페소아가 누구인지 몰랐다.


우린 모두 여럿, 자기 자신의 과잉. (…)
우리 존재라는 넓은 식민지 안에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 페루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리스본의 한 액세서리 가게에서 포르투갈 대작가 주제 사라마구 캐리커처로 만든 열쇠고리를 발견했는데, 그 옆에 모자와 안경을 쓰고 턱이 갸름한 남자의 캐리커처가 있었다. 처음에는 흘려 보았다. 그런데 소품 가게, 문구점, 서점을 갈 때마다 어디서든 그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가 페소아였다. 생전 70개 이상의 이명(異名)을 사용한 사람. 자신 안에서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되는 기질에 알렉산더 서치, 알바루 드 캄푸스, 리카르두 레이스, 마리아 주제 같은 이름을 붙여주고 그들의 목소리를 받아 적어 소설, 시, 산문을 27,543매나 남긴 괴력의 작가. 그가 포르투갈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가라는 사실을 새로 배우게 된 건 1732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운영되는 서점 버트란드(Bertrand)에서였다. 


ⓒ Biblioteca de Arte


서점 버트란드 입구에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라는 기네스 월드 레코드 증명서가 걸려있다. 리스본을 폐허로 만들고 10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1755년 대지진으로 버트란드 서점 역시 파괴되었고, 도시 재건기에 시아두(Chiado)의 현재 위치로 옮겨와 280여 년간 운영되고 있다. 버트란드 서점의 미덕은 담백함이다. 280년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건 벽에 걸린 몇몇 옛 사진에서 뿐이다. 깊은 동굴처럼 생긴 내부는 고요했고 모두 책 앞에서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기네스 레코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오늘도 그저 어제처럼 책을 파는 공간일 뿐이라는 듯. 

 


반면 1864년 지어진 공장 건물을 크리에이터들의 소규모 공방으로 탈바꿈시킨 LX Factory에서 만난 서점 레르 제바가르(Ler Devagar)는 서점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판타지의 끝을 보여준다. 3층 건물 높이의 탁 트인 서가에 가득 꽂힌 책, 거대한 전함 같은 앤티크 윤전기(실제 포르투갈 최대 주간지 Expresso를 인쇄했던 윤전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늘을 날고 있는 ‘자전거 탄 소녀’ 키네틱 아트 피스가 몽상을 불러일으킨다. 


소녀의 아버지는 피에트로 프로세르피오(Pietro Proserpio), 섬유 기계 관련 일을 하다 은퇴 후 키네틱 아티스트가 된 백발의 할아버지다. 할아버지의 안내를 따라 들어가 본 윤전기 안에는 그의 발명품 수십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부서진 우산, 빨대, 시계, 테니스공, 버려진 컴퓨터 본체 등 시시한 생활 잡동사니가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우주선, 타임머신 증기기관차 등으로 바뀌어 딸각딸각 혼자 움직이는, 보고도 못 믿을 풍경. 아날로그 재료와 수작업만으로 환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프랑스 영화감독 미셸 공드리의 작품 속으로 들어와 있는 듯했고, 아이의 천진함을 잃지 않은 이 포르투갈 할배의 상상력이 미치도록 탐났다. 올려다보기에 목이 아플 정도로 높은 책꽂이에 진열된 이 모든 책들이 그의 상상력의 배후가 아닐까. 그렇다면 앞으로도 기꺼이 책더미로 이뤄진 공간에 매혹되리! 



일주일간의 포르투갈 여행 동안 이름 없는 동네 서점, 헌책방, 소규모 그림책 책방 등 책이 쌓여 있는 곳이 눈에 띄면 어디든 불쑥 들어가 책 냄새를 맡았다. 물론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처럼 용감하게 다른 삶의 가능성을 도모하는 드라마를 만들진 못했다. 렐루 서점을 충분히 거닐겠다는 꿈도 해리포터 ‘빠’들에 의해 무너졌다. ‘보르도를 꿈꾸는 것이 보르도 역에서 기차를 내리는 것보다 더 나을 뿐만 아니라, 더 진실에 가깝기도 하다(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는 페소아의 말은 일면 일리가 있다. 하지만 해리포터만큼이나 멋진 상상력을 가진 피에트로 할아버지를 만났고, 집으로 돌아와 페소아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이 두 멋진 창작자를 얻은 것만으로도 족한 여행이었다. 




* 잡지 <슈어>에 기고한 글과 사진으로 최종 게재본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출간 소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