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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Jul 04. 2016

'몰라'라는 이름의 서점

이 그리움을 알까 몰라 

“재미있는 일 하네. 그런데 무슨 계기로 (너처럼 다 큰 어른이) 애들 책에 빠졌어?” 

그림책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주변에서 이런 질문을 심심찮게 받는다. 물론 괄호 안 이야기까지 용기 있게 내뱉는 지인은 거의 없지만, 내 편에서는 이미 들은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잦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에 살기 전에는 패션지 에디터로 일으니, 지인들 입장에선 변심한 이유가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자꾸 마음이 움츠러들던 유럽 거주 초창기, 마음을 달래줬던 한 서점 이야기를 들려준다. 

“프랑스 보르도에 ‘몰라(Mollat)’라는 이름의 서점이 있어. 서점은 흔히 지식의 보고라고 하는데 이름이 한국어로는 ‘몰라’야. 참 웃기지? 여하튼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종이 냄새가 훅 밀려들고 커다란 유리창에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낭만적인 서점이었어. 그런데 서점을 거닐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어린이 코너로 향하더라. 서점 안에서도 가장 볕이 잘 드는 좋은 자리에 어린이 책을 아름답게 진열해뒀거든. 자연스럽게 홀리듯 그리로 가게 되는 거야. 그렇게 꼬맹이 사이에서 한 권 두 권 훑다가 결국 사랑에 빠진 거지.” 



서점 ‘몰라’는 유럽에서 내가 사귄 첫 번째 친구다. 서점 북 마스터들이 한 권 한 권 손글씨로 정성껏 적은 추천사를 읽으며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고, 책 띠지에 실린 작가 연보를 보면서 다음에 읽어보고 싶은 작품들 리스트업을 했다. 어떤 날은 아무 사전 정보 없이 그림만 훑어보면서 궁합이 맞는 작가들을 찾아내기도 했고, 서점 한 편에 마련된 작은 전시장에서 그림책 작가들의 원화를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던 날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사랑에 빠진 건 그림책이지만, 당시 나를 사로잡은 게 오직 책의 힘만이었다고 말할 순 없다. 서점이라는 물리적 공간, 후각 시각 촉감과 청각까지 자극하던 그 공간의 힘이 있었기에 호기심이 사그라들지 않고 타오를 수 있었다. 책이 있는 공간과 정서적 애착을 맺는 일은 언제나 좋다. 수업 시간에 몰래 쪽지를 주고받으며 친구들과 교감할 때만큼이나 내밀하고 짜릿하며 마음이 풍족해진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문득 멈춰 쇼윈도 안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누군가는 "와… 아름답다…"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고, 어떤 사람은 턱을 매만지며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한다. 꿈꾸듯 몽롱하게 슬쩍 웃는 사람도 있다. 크리스찬 루부탱의 하이힐 부티크가 아니라 서점 '몰라' 앞 쇼윈도 앞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프랑스에 거주할 때 틈만 나면 '몰라'에 갔다. 몰라에서 정갈하게 정돈된 책들을 눈으로 훑고 나면 내 취향에 세련미를 1g쯤은 더한 것 같은 만족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책에 열중한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이 즐거웠다. 망가(만화) 한 권을 끼고 히죽히죽 거리는 너드 청년이랄지, T팬티가 보이든 말든 쪼그려 책장을 뒤지는 마드모아젤, 그리고 뿔테 안경을 쓴 섹시한 할아버지를 구경하는 건 버스에서 머리를 찧고 조는 사람을 구경하는 것과 비슷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그렇게 프랑스 서점 특유의 지적인 분위기와 매력에 흠뻑 매료되었다. 사랑이 커지니 어느 날 문득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 나라는 도대체 뭐가 달라서? 왜 우리는 이런 서점을 갖지 못하는 거지?  


비밀을 캐내던 중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프랑스의 의무 교육 과정 중 작문과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37%. 몇몇 유럽 국가가 17%인 것에 비해 굉장히 높은 수치다. 프랑스의 고등학교 졸업 시험의 악명은 한국에도 익히 알려져 있다. 

'폭력 없이 권력이 존재할 수 있는가?' '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 '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류의 질문 한 줄에 대해 장장 4시간에 걸쳐 자신의 생각을 서술한다. 이 문제들을 본 나는 그저 허허 웃어야 했다. 

이렇게 길러진 프랑스 사람들에게 생각하기는 유희나 나름 없다. 말장난(정확하게는 논리싸움) 하는 걸 밥 먹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니, 이들에게 견해가 없는 사람은 곧 매력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요는 책 없이는 유혹도 없다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는 곳을 가꾸며 자신에게 도취되는 것이 프랑스식 치장이라면, 핑퐁처럼 대화가 이어져야만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는 곳이 프랑스라면, 이들에게 서점은 자신의 매력을 가꾸기 위해 들른 근사한 부티크나 다름없다. 그래서 책에 파묻힌 이들의 모습에서 향수를 고를 때처럼 관능적인 분위기와 몸짓이 우러나오는 게 아닐까. 



한국에 돌아온 뒤, 가장 그리운 곳 중 하나가 보르도에 있는 이 서점이다. 아, 그리운 몰라. 이 아름다운 서점에서 일하는 북 마스터들이 얼마나 재미있는 사람들인지 보자. 아래는 몰라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책 소개 사진들. 


https://www.instagram.com/librairie_mollat/


이런 재치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몰라. 내가 이곳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알까 몰라,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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