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디터C 최혜진 Jul 10. 2016

엄마표 놀이라는 착각

잘 만든 그림책을 알랭 드 보통의 인문서나 박완서의 소설만큼 좋아하는 나는 서점에 가면 꼭 어린이 코너에 들른다. 앙증맞은 초록색 버섯 의자나 무당벌레 스툴에 다 큰 여자가 (동석한 아이 없이 혼자) 앉아서 그림책을 보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좋은 그림책이 선물하는 뭉클한 감동이 좋아서 개의치 않는다. 아이를 품 안에 폭 안고 또박또박 책을 읽어주는 엄마들 목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그림책에 집중한다. 

3년 동안 프랑스와 벨기에에 살다 귀국한 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일까. 요즘 서점에 가면 한국 엄마들이 종종 책 공간 안에서 보이는 단호함이 자꾸만 눈에 띈다. 이를테면 엊그제 만난 한 엄마와 다섯살배기 아들의 대화 같은 것. 


(아이가 까만색 공룡이 그려진 그림책 표지를 가리키며) “엄마, 이게 까만색이야?” 

(흘깃 쳐다보더니 진열된 다른 책들로 시선을 돌린다) “오늘은 공룡 안 산다고 엄마가 분명히 말했지.” 

(아이는 작은 공룡이 구석에 있고 자동차가 크게 그려진 다른 그림책을 가리키며) “엄마, 이거 봐봐. 자동차.” 

(여전히 진열된 책들에서 눈을 떼지 않고, 목소리 톤을 높인다) “그것도 공룡책이잖아. 공룡은 안된다고. 다른 책 읽어줄게. 다른 거 골라.” 


아이는 그 뒤로도 5권의 서로 다른 공룡책을 엄마에게 읽어달라고(사달라고 한 게 아니다) 했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물론 나는 그 가정의 사정을 속속들이 모른다. 아마 아이의 공룡 편애가 너무 심해서 엄마 입장에서는 걱정이 되었을테고, 관심사를 넓혀주는 것이 아이를 위한 길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나를 놀라게 한 건 엄마의 단호한 확신이었다. 아이가 새 책을 제안할 때마다 ‘네 속셈을 엄마는 다 알고 있어. 그런 속셈은 통하지 않아. 네가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는 엄마가 더 잘 알아’라고 단칼에 튕겨내는 태도. 아이가 자기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구는 자신만만함에 놀랐다. 

곧 이런 주객전도의 상황이 벌어졌다. 분명 아이와 책을 매개로 교감하기 위해 서점을 찾았을텐데 그 엄마는 아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본인 구미에 맞는 ‘읽힐 책’을 찾는데 온 신경이 팔려 있었다. 공룡책을 거절당할 때마다 아이 얼굴에 스쳐갔던 짙은 무력감을 두 사람을 몰래 관찰하던 나는 보았지만 그 엄마는 보지 못했다. 


육아법은 엄마들에게 종교처럼 예민한 영역이어서 남의 집 애 키우는 방식에 함부로 훈수를 두거나 참견을 하면 안된다고 하지만, 속 시원히 말할 기회를 준다면 이런 말을 우다다 쏟아내고 싶었다. 

아이가 공룡만 탐닉하는 건 전혀 문제가 아니다. 아이를 가만히 두면 분명 다양한 공룡의 생김새와 습성을 비교하고, 분류하고, 이름을 외우는 식으로 편애를 발전시킬텐데, 그 몰입감과 지식 관리 욕구는 앞으로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꼭 필요하다는 창의력의 필수 조건이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충분히 푹 빠져야 이를 수 있는 단계. 물론 속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움에 몸을 배배 꼬면서. 



요즘 블로그와 육아 카페에 범람하는 ‘키즈 카페, 체험 학교 후기’와 ‘엄마표 놀이 아이디어’를 볼 때도 몸이 배배 꼬인다. 동네 놀이터에서 또래 친구 만나는 것도 어렵고, 아이가 “나 심심해. 놀아줘.” “우리 집은 너무 재미없어.” 이런 말을 하면 엄마 입장에서는 뭐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진다는 것은 잘 안다. 

그런 글을 읽을 때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유는 작은 놀이 행위 하나까지 쓸모를 계산하는 태도, 애들 놀이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어른들의 목적 의식 때문이다. 뇌의 어느 부위가 자극이 되고, 사회성이 놓아지고, 논리력과 창의성이 생긴다는 식의 설명을 읽고 있으면 ‘이게 놀이인가, 만병통치약 광고인가’ 싶다. 


실망스러운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다. 그렇게 어른들이 짜놓은 단계를 고분고분 밟아나가는 체험과 놀이는 창의성과 무관하다. 취재차 만났던 벨기에 창의 교육 전문가 필립 브라쇠르는 “창의성은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힘이자 행동방식”이라고 단언했다. 어른이 짜놓은 질문에 맞는 답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질문부터 짤 수 있는 능력이 창의성이라는 거다. 마음이 뜨끔해지는 그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요즘 아이들은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가만히 두지 않아요. 좋은 만화 영화를 보여주고, 책을 골라주고, 체험 캠프에 보내는 등 여러 활동을 시킵니다.
그러면 아이는 소비자로 남습니다. 창의성은 소비하기를 멈추고 스스로 조합을 시작할 때 발전합니다.
창의성은 아이가 책을 읽다 멈추고 몽상에 빠져 이야기 속을 헤엄칠 때, 영화가 자신에게 남긴 인상을 그리기나 장난감 놀이 등을 통해 밖으로 표출할 때 피어납니다. 소비를 멈추고 자신만의 내면 세계로 들어갈 시간이 있어야 창의력이 탄생합니다.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엄마표 놀이 아이디어를 한번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자. 엄마들이 ‘놀이 방법 1,2,3…’ 번호를 붙여가며 아이디어인 것처럼 정리해 공유하는 여러 행위, 예컨대 물감을 손바닥에 묻혀서 도장찍기, 손가락으로 점묘화 만들기, 전단지 오려 밥상 차리기, 항균 모래 놀이, 물약통에 콩 넣어 악기 만들기 등이 정말 아이가 혼자 주도해서는 할 수 없고 엄마가 기획하고 준비해줘야 할 수 있는 행동일까? 

집을 어지른다고 혼내지 않고 가만히 두면 아이들은 알아서 장난치며 오리고 칠하고 흔드는 행위를 하는데, 거기에 그럴싸한 제목을 붙여 엄마 노릇을 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세계적인 명성의 그림책 작가 안느 에르보를 인터뷰 차 만난 적이 있다. 아이의 창의력을 위해 가장 먼저 신경써야 할 것으로 그녀는 ‘목적 의식 버리기’를 꼽았다. 본전과 수익성을 계산할 수밖에 없는 엄마의 계획된 활동들이 오히려 아이의 창의력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놀거리를 찾아내고 노는 방법을 궁리하고 계획해야 할 주체는 아이다. 그래서 나는 엄마표 놀이라는 말이 좀 무섭다. 아이를 위한다는 선의 안에 숨어있는 본심, 놀이 주도권까지도 엄마가 가져야겠다는 야심이 읽혀서다. 

그녀는 엄마와 아이가 함께 놀 때 의미를 만들어내는 건 ‘엄마의 출석’ 그 자체라고 했다. 껍데기만 아이 옆에 있고 영혼은 다른 계산으로 바쁜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100%로 있어주는 것. 어쩌면 아이에게 필요한 건 기발한 엄마표 놀이 아이디어가 아니라 ‘엄마가 나와 시간을 보내주고 있다’는 충족감일지 모른다. 



* 잡지 <여성중앙>에 기고한 글과 사진으로 최종 게재본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몰라'라는 이름의 서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