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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Jul 31. 2016

버스 타고, 크로아티아 종단 여행기

8월 땡볕 아래 우아하긴 글렀어

8월의 크로아티아. 가장 뜨거운 계절, 절정의 길 위에서 보낸 713km의 기록. 


자그레브(Zagreb)-플리트비체(Plitvice). 166km. 

버스로 2시간 30분


생각해보면 여행의 발단은 늘 사소했다. 지인이 무심코 전해준 어떤 도시의 이야기, 잡지를 뒤적이다 발견한 사진 한 장, 영화를 볼 때 왠지 눈에 밟히는 장소…. 그렇게 떠나고 싶다는 욕망 한 톨이 가슴에 쑥 들어오고 나면 시간이 거름 역할을 한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보란 듯이 쑥쑥 자라나는 방랑벽. 

그 해 여름, 크로아티아로 떠나게 된 이유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소 어처구니가 없다. 원래는 북유럽 여행을 하려고 정보를 찾던 중 링크에 링크를 타고 우연히 보게 된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사진. 뭔가에 홀린 듯 이전의 계획을 모두 없던 셈 치고 밑도 끝도 없이 단박에 목적지를 변경했다. 고작 사진 한 장에 말이다.


여행이기에 가능해지는 작은 불가능들이 있다. 이전까지 내가 살아오던 방식과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을 어쩐 일인지 훌쩍 해버리리게 만드는 여행의 힘. 


나를 크로아티아로 이끈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을 직접 걸었을 때 느꼈던 감동을 말로 옮겨 보려는 노력은 사실 무의미하다. 아득할 정도로 파랗고 투명한 원시림 안에서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말문이 막힌다는 게 뭔지 알게 해줬으니까. 그냥 ‘하아...’ 하고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며, 최대한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게 그 하늘과 호수를 눈에 담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 한 번 한 번이 달콤했던 순간, 플리트비체의 숲 속에선 걸으면 걸을수록 몸이 투명해진다. 생각이 말갛게 갠다.   


공원 상류와 하류 사이에는 커다란 Kozjak 호수가 있어 전기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호수는 물 반, 고기 반.
국립공원 입장권에는 셔틀버스 정류소와 게이트 번호가 표시돼 있다. 넓디 넓은 곳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플리트비체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크로아티아의 깊고 푸른 눈이다. 16~17세기에 터키와 오스트리아가 국경을 정하기 위해 분쟁을 하다가 군대에 의해 발견된 원시림. 워낙 숲이 울창하고 접근이 어려워 ‘악마의 정원'이라 불리다가 1949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그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플리트비체는 특히 영롱한 호수의 물빛으로 유명하다. 국립공원을 구성하는 16개의 호수가 계단식으로 이어져 흐르면서 92개의 폭포를 만든다. 물속에 녹아있는 석회가 자연스럽게 퇴적해 댐을 만들고, 시간이 지나면 그 댐이 터지면서 폭포가 되는 식. 소요 시간이 각기 다른 10개의 산책 코스, A~K 중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면 되는데, 공원 상류와 하류를 모두 둘러볼 수 있는 6시간 짜리 H코스가 가장 인기다.  

www.np-plitvicka-jezera.hr




플리트비체-스플리트(Split). 256km.

버스로 6시간 30분 


8월의 크로아티아는 터지기 직전의 풍선 혹은 들끓어 넘치는 용암 같다. 온 천하가 저마다의 색으로 아우성 댄다. 이 폭발적인 에너지는 아드리아해의 태양으로부터 온다. 42도~44도까지 올라가는 더위에 시달리다 보면 차라리 겸허해진다. 

처음에는 땀도 연신 닦고 파우치에서 거울을 꺼내 들여다보고 했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중복 더위에 뚝배기 삼계탕을 들이켜는 심정으로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예 땀을 쭉 빼자.’ 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된다. 꼬질꼬질하면 뭐 어때. 나만 더운 것도 아닌데, 뭐…. 심신 붕괴 후 찾아오는 느긋함이랄까. 


세로로 길쭉하게 뻗은 크로아티아의 해변도로를 버스로 종단하다 보면 이런 붕괴와 해탈의 순간을 오락가락하게 된다. 자가용으로 3시간이 걸리는 거리는 6시간이 걸리고, 4시간 걸리는 거리도 6시간이 걸리는 참으로 기이한 체계를 가진 답답한 버스, 게다가 끝없이 반복되는 S자의 굴곡 코스. 말 그대로 ‘구토유발 도로’다. 깎아지는 절벽 구간, 붉은 지붕 집들이 모여 있는 작은 어촌 마을, 나무가 드문드문 자란 황량한 돌산을 번갈아가며 뱅글뱅글 통과한다. 이렇게 총 713km를 8월 삼복더위에 버스로 이동하는 일은 전혀 우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행을 마친 지금, 역설적이게도 땀을 뻘뻘 흘리고 울렁거리는 속을 움켜쥐었던 그 꼬질꼬질했던 시간이 절대 잊을 수 없는 단단한 추억이 됐다. 힘듦은 지나고 보면 그럭저럭 괜찮은 시간, 때로는 꽤 근사한 무용담을 만들 수도 있는 기회. 


디오클레티안 궁전 옆 성 돔니우스(St Domnius) 대성당 종탑에 올라가면 탁 트인 시내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노출형 계단으로 가는 길이 좀 후덜덜하긴 하지만.
디오클레티안 궁전 지하 아케이드에는 아기자기한 수공예품점이 많다.
볕 좋은 오후, 해수욕 후 돌아와 빨래를 조르륵 너는 것까지도 기쁨이 되는 곳.

스플리트는?  

스플리트는 크로아티아 지도에서 중간 조금 아래에 위치한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다. ‘아드리아해의 진주' ‘지상에 남은 마지막 낙원!’이라 칭송받는 남부의 휴양지 두브로브니크에 비하면 명성이 약하지만,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는 스플리트가 최고의 휴양지였던 모양이다. 50여 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왕위를 자발적으로 물려준 뒤, 305~316년까지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고 눈을 감은 것을 보면 말이다. 왕이 생활한 디오클레티안 궁전은 AD300년 경의 로마 건축 양식을 보존한 유적지이자 스플리트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궁전 터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구도심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스플리트-두브로브니크(Dubrovnik), 로크룸(Lokrum)섬. 270km. 

버스로 6시간 


사실 크로아티아 여행 전까지 나는 ‘자연경관을 보러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는 동기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런 건 중년들의 산악회 모임 동기 같은 거라 생각했다.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언제나 미술관, 건축물, 상점과 카페 등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의 부산물이었다. 


그러므로 두브로브니크에서는 과거의 유적과 현재의 문화가 촘촘하게 교차하는 성벽 안 주황색 구도심에 마음을 뺏겼어야 옳다. 하지만 두브로브니크에서 난 꿀통에 달라붙은 벌처럼 바닷가에만 찰싹 붙어 있었다. 아드리아해가 정말이지 압도적이라 그리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몸은 서울을 떠나 유럽까지 왔으나 마음속에선 쉽게 떨쳐지지 않았던 서울의 묵은 때들이 거대한 푸르름 안에서 조금씩 녹아 사라지는 기적을 맛볼 수 있었으니까. 


처음 나를 안아준 바다는 로크룸 섬의 바다였다. 8월인데도 바다는 차갑고 신선하고 명랑했다. 발목이 잠기고, 무릎, 허벅지, 가슴, 어깨가 잠겨갈수록 마음의 보호막이 바닷물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부드럽게 부유하는 푸른 물이 내 몸 전부를 간질일 때, 나는 마침내 홀가분해졌다. 

해수욕을 하고 놀다가 따뜻하게 데워진 바위에 엎드려 몸을 말릴 때면 몸 이 곳 저곳, 마음 구석구석을 햇빛이 어루만졌다. 걱정과 슬픔의 찌꺼기들을 증발시키겠다는 듯 맹렬한 기세로. 

아드리아의 바다는 낯선 해방감이다. 태양은 고마운 쓰다듬이다. 


높은 곳에 올라가 여행지를 발밑으로 내려다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면 케이블카를 타고 스르지산 정산으로 올라가보시길.

두브로브니크는? 

바다 위에 떠있는 신비한 요새, 1.5m~3m 두께의 단단한 성벽이 감싸고 있는 구도심은 중세의 모습 그대로다. 단단한 껍질 안에서 보석처럼 빛난다 해서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리는 도시. 크로아티아 최고의 휴양지인 이 곳은 1990년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크로아티아가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에 분개한 세르비아 군이 무차별 폭격을 가해 집 3채 중 1채가 무너질 정도로 도시가 초토화되었다. 지금은 그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잘 복원되었지만, 도심 곳곳에서 과거의 비극을 증언하는 사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드리아해의 풍경과 구도심 구석구석을 내려다볼 수 있는 성벽 투어가 가장 인기 있는 관광 코스다.  


로크룸 섬으로 왕복 배삯과 섬 입장료가 포함된 티켓.
로크룸 섬 중간에 있는 사해 호수에는 절벽 다이빙 내기를 하는 강심장 청춘들이 모여있다.

로크룸 섬은? 

로크룸 섬은 두브로브니크 구도심 남동쪽 옛 항구(Stara Luka)에서 보트를 타고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작은 섬이다. 1850년대 크로아티아를 지배했던 오스트리아 왕이 조성해 놓은 환상적인 수목원과 비밀스러운 누드 비치, 야생에 방목되어 있는 공작새로 유명한 곳. 보트를 타고 로크룸 섬으로 다다르면 황홀한 표정으로 청록색 바닷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바다 수영에 자신이 없다면 섬 중간에 위치한 사해로 가보자. 소나무가 잔뜩 심어진 절벽이 사방을 둘러싸 바닷물을 호수처럼 가둔 사해는 선착장 근처 바다에 비하면 어린이용 풀장 같다. 꼬맹이부터 할머니까지 흡족한 표정으로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평화로운 기운이 가득하다.




두브로브니크-차브타트(Cavtat). 21km. 

버스로 45분 


8월 성수기, 관광객으로 미어터지는 두브로브니크는 지상 낙원과는 거리가 있었다. 조용한 해변에 머물고 싶어 시내버스를 타고 4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차브타트(Chavtat)로 갔다. 크로아티아의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해변 마을. 크로아티아의 발가락까지 내려왔으니 이로서 아드리아 해변 도로를 따라 크로아티아를 종단한 셈이다. 

차브타트의 바다는 넉넉하고 포근했다. 적갈색 고깔모자를 쓴 집들이 바닷가에 소담스럽게 모여 있었고,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운이 보였다. 아빠에게 수영을 처음 배우는 아이가 튜브를 끌어안고 깔깔 웃는 소리, 땡땡이 팬티만 입고 퐁당 바다로 뛰어드는 소녀, 수영복을 미처 챙겨 오지 못한 할머니가 용기를 내 원피스를 벗고 속옷 차림으로 첨벙첨벙 아드리아해로 들어가는 소리, 그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할아버지 뒷모습…. 그곳엔 이별, 아픔, 다툼, 죽음 같은 비극의 기운은 한 톨도 없었다. 오로지 행복뿐이었다. 


차브타트는? 

크로아티아의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해변 마을. 유명 관광지가 된 두브로브니크에서 넘치는 인파에 치이는 것이 싫다면 조용한 해변이 있는 차브타트가 대안이다. 두브로브니크 케이블카 승강장 앞 정류소에서 10번 시내버스를 탄다. 

www.tourism-cavt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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