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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Aug 12. 2016

도망간 초강력 집중력을 찾습니다

100%로 마음을 빼앗기는 일

1

대학교 2학년 전공 개론 수업, 그러니까 내가 스무 살이었던 때의 이야기.


"자신의 강점을 딱 한마디로 표현하면 뭐라고 답하겠어요?"


커뮤니케이션 개념을 잡아주는 2학년 1학기 첫 수업 중에 교수님이 덜컥 기업 입사 면접에서 나올 법한 질문을 던졌다.


"첫 줄에 앉은 학생들부터 돌아가면서 이야기해 봅시다."


나는 교실 첫 줄 가장 왼쪽 끝에 앉아있었다. 다행히 교수님은 오른쪽 끝에 앉은 학생을 지목했다. "성실함인 것 같아요." "음, 잘 모르겠어요. 정말로 모르겠어요." 한 명 한 명 자기고백을 하는 동안 나는 오른쪽에서부터 서서히 다가오는 긴장의 파도에 속이 울렁거렸다.


이윽고 교실 안의 눈동자가 모두 나를 향하게 된 그 순간, 그전까지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보지 않았으나 비밀스럽게 '난 이걸 가진 것 같아'라고 혼자서 생각하고 있던 자질을 툭 발설하고 말았다.  


"초강력 집중력이요."


아악, 그냥 집중력도 아니고 무려 초강력씩이나 들먹이다니, 부끄럽다, 도망가고 싶다, 볼이 후끈후끈해졌다. 겉으론 아닌 척 뻔뻔하게 교수님을 쳐다봤다.


"정말 좋은 강점이네요. 집중력이라니."


교수님이 눈을 반짝이셨다.



2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는 집중하는 순간의 몰입감을 정말 사랑했다. 뭐든 하나를 좋아하면 무섭게 빠져들었다.


일례로 고3 때 라디오헤드의 음반 OK COMPUTER 딱 하나만 몇 개월 동안 반복해서 들은 적이 있다. 아침 자율학습, 쉬는 시간, 점심시간, 때론 수업 중에 몰래,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도 들었다. 특히 좋아했던 곡 'Paranoid Android'는 60분짜리 빈 테이프에 따로 반복 녹음해서 하루 종일 들었다. 끝없이 같은 노래가 반복되는 상황이라니, 지금은 아무리 곡이 좋아도 연달아 5번 정도 들으면 지겨운데 그때는 듣고 또 들어도 좋아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샘솟았다. 그 해 어느 시점엔 'Paranoid Android'를 연달아 1천 번쯤 듣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정신이 살짝 가출한 여자처럼 하나에 몰입하는 성향은 내 인생을, 특히 커리어적인 면에서 지탱해주었다.


공식적으로 인터뷰 자리를 만들어서 남의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쓰는 기자질을 할 때도, 사적으로 친구들과 고민을 나눌 때도, 처음 만난 사람과 서로를 알아가는 대화를 할 때도, 자주 이런 말을 들었다.


"음, 이 이야기는 보통 남에겐 하지 않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들.


뭐지, 내 얼굴을 보면 막 뭐든 말하고 싶어지는 그런 건가. 어리둥절했다. 어느 날, 친한 친구가 궁금증을 해소해줬다.


"너는 이 세상에 너랑 나 단 둘 밖에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거든."


집중해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머지 세상이 신기루처럼 스르륵 사라지고 대화하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온기와 교감으로 조그마한 소행성을 만드는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 글 쓰는 직업을 갖게 된 이유를 말할 때도 몰입감을 빼놓을 수 없다.


처음부터 글이 술술 써지면 정말 좋겠지만 대개 책상에 앉기까지 마음에서 온갖 번뇌가 인다. 도망가고 싶다. 쓰기 전에는 늘 괴롭다. 여차저차 겨우 한 줄을 쓰고 나면 앞의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불러오고, 그 문장이 또 다음 문장을 불러온다.

점점 호출 속도가 빨라지는데 어느 순간이 되면 시간도 잊고, 어제 일어난 쪽팔린 사건도 잊고, 내일 보내줘야 할 기획안 걱정도 잊고, 잘 썼네 못 썼네 잘잘못을 따지는 내면의 비평가도 잊고, 배고픈 것도 잊는다. 세상이 점점 하얗게 바뀌면서 오로지 글과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순간 속에서 나는 행복하다. 나머지는 다 괴로운데 이것 하나가 좋아서 어쨌든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3

그런데 요즘 어쩐 일인지 몰입하는 기쁨을 좀처럼 맛보지 못하고 있다.


좋은 음악과 사랑에 빠져보려고 성질 뻗치는 동기화와 업데이트까지 모두 감내하고 애플 뮤직에 가입했지만 반복해서 듣고 싶은 곡이 없다.

선택지가 너무 많은 게 문제다. '다음 곡' 버튼을 누르면 금방 새로운 노래로 점프할 수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지루하면 가차 없이 넘겨버린다.

어느 순간엔 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쇼핑 카탈로그 보듯 심드렁하게 '다음, 다음' 탐색만 하게 된다.


인터넷에서 읽는 글이나 구독하는 SNS 계정 게시물도 비슷하다. 집중해서 진득하게 콘텐츠 한 편을 끝까지 소화하는 게 점점 어렵다. 뭘 제대로 읽지 않으니 당연히 쓰는 것도 힘들어진다.


카세트테이프로 음악 듣던 시절에는 좋든 싫든 음반 하나를 통째로 들었어야 했다. 곡 중간에 10여 초 정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음 곡으로 점프할 수 없었다.  또 음반을 소장하기 위해선 수고가 필요했다. 용돈을 아껴야 했고, 용돈을 모두 모아도 기껏해야 한 달에 1-2장의 앨범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다음번에 구입할 음반을 선택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했고, 음반 가게에 드나들며 시간을 써야 했다. 수고를 했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음반 한 장 한 장이 각별하고 소중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구하기 쉽고 대체제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아서 그 무엇에도 100%로 마음을 빼앗기지 못하고 있다고.


풍요와 편리가 집중과 몰입을 방해한다고.  


읽을만한 글이 너무 많아서,

들을만한 음악이 너무 많아서,

볼만한 그림이 너무 많아서,

또 그것들을 구하는데 수고가 전혀 필요하지 않아서 소중한 나만의 것을 발견하고 온전히 빠져드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아이러니.


그 시절의 몰입감이 그립다. 100%로 빠져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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