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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Sep 08. 2016

그림책을 좋아하는 작은 마음

1

강연을 위해 인천미추홀도서관으로 가는 길, 서울에서 경인고속도로를 타고 인천으로 가는 동안 소나기를 만났다. 순식간에 주위가 컴컴해지고, 굵직한 빗방울들이 와다다다 달려들어 택시 천정을 마구 때렸다. 


아, 강연을 망칠 거란 징조가 아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빗길에도 택시 기사님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아스팔트와 타이어 사이에서 축축한 물기가 촤아악 촤아악 파열음을 내며 갓길로 내리 꽂혔다. 

어릴 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의지와 없이 작동하는 '나쁜 상상 상영관'이 있었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보았던 부산 어린이집 버스 전복 동영상이 (역시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리플레이됐다. 안전벨트를 맨 덕분에 아이들이 모두 다치지 않고 구조되던 모습. 주섬주섬 택시 뒷좌석에서 안전벨트를 동여맸다. 


상가 건물, 허허벌판, 가로수... 보통날과 다를 것 없는 창 밖 풍경이 펼쳐졌지만, 내 눈엔 하나하나가 상징, 계시, 암시로 읽혔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하려는 어린 커플이 상대방의 사소한 눈빛 하나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모든 풍경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분들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렘과 3시간이나 되는 강연 시간을 어떻게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가나 하는 걱정이 뒤엉켜서 마음이 날 서 있었다.  


너무 부지런을 떤 탓에 강연 시작 1시간 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 역시 긴장의 증거였다. 



2

도서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텅 빈 강연장에서 미리 강의 준비를 하는데 연령 차이가 조금 나는 두 여성분들이 말을 걸어왔다. 


"최혜진 작가님? 저희가 블로그를 구독하고 있어요. 팬이에요. 브런치에 올린 그림책 이야기도, <명화가 내게 묻다> 책도 너무 좋았고요." 


강연 요청 전화를 했던 도서관 교육 담당자님이 상사를 모시고 강연 전에 찾아와 나를 강사로 섭외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시는 건 줄 알았다. 


"블로그에 강연 소식 올리셨길래 만나고 싶어서 서울에서부터 왔어요."


음? 이게 무슨 소리지? 


뒤이어 실제 인사를 하러 오신 도서관 교육 담당자님이 이런 말씀을 전해주셨다. 


"저는 작가님이 그렇게 유명한 분이신지 모르고 섭외를 했는데, (아이쿠,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전화를 상당히 많이 받았어요. (네? 무슨 전화...) 일반인도 들을 수 있는 강의인지 문의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세상에, 이렇게 감사한 일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오늘 강의는 도서관 사서 선생님들을 위한 직무 교육이었다. 참여를 원했으나 하지 못한 일반 독자분들이 계셨다는 말씀이었다. 앞서 인사를 건네 오셨던 두 분은 나의 독자들이었다. 직무 연관성이 인정되어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분들. 



3

두 독자분께서 가장 앞자리에 앉아 '힘내세요!' 하는 응원의 눈빛을 마구 쏘아 보내 주시고, 고개도 끄덕끄덕 호응을 잘 해주신 덕분에 30여 명의 낯선 청중 앞에서 긴장을 내려놓고 준비했던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 


불과 몇 시간 전까지는 부산 어린이집 버스 전복 동영상이 상영되던 내 머릿속은 이제 강연장 제일 앞에서 따스한 표정을 지어주셨던 두 분의 흐뭇한 눈길로 가득 찼다. 


울컥, 저 속에서 뜨끈한 뭔가가 솟아올랐다. 


'아동문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유아 교육 전문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제로 그림책을 만드는 작가도 아닌데. 알아주는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닌데. 세상에, 내가 뭐라고.' 


고마워서 어리둥절했다. 너무 고마워서.


징검다리처럼 이어지는 감사의 끝에 그림책이 있었다. 

아이들용이라고 당연스레 치부해버렸던 내 편견을 깨준 것,  

감탄하는 마음을 회복시켜 준 것, 

오래전에 믿고 따랐지만 어른이 되면서 잊어버린 소중한 가치들-우정, 사랑, 연대, 희망, 긍정...-을 다시 입 밖으로 꺼내게 도와준 것,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과 실제 실행할 추진력을 심어준 것,  

서툰 불어 실력을 무릅쓰고 프랑스 벨기에 아동도서 업계를 취재하게 등을 떠민 것, 

좋아하는 작가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심어준 것, 

그림책 처방 시리즈를 기획하고, 독자들의 고민 편지를 받고,  그분의 마음을 숙고하고, 도서관과 서점 구석구석을 뒤져내 추천 책을 찾아내고, 글을 쓰고, 쓰다 울고, 다시 독자로부터 답장을 받고.. 이 모든 과정을 밟아나가게 이끌어 준 것, 

내 글과 문체를 사랑해주시는 독자분들을 만날 수 있게 이어준 것에 대해 

그림책에게 고마워졌다. 


나는 그냥 그림책이 좋아서라는 단순하고 작은 마음으로 한 발을 떼었을 뿐인데, 

그림책은 나에게 이렇게나 고마운 선물을 한 아름 안겨주었다. 



4

바쁘다는 핑계로 우선순위에서 밀려있었던 <그림책 처방>에 조만간 새 글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연장 맨 앞에서 나를 응원해주었던 그 선한 눈동자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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