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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Dec 04. 2016

작가 의도 알아맞히기

 

1

얼마 전, 한 도서관에서 <명화가 내게 묻다>와 관련한 강연을 했다. 강연 제목은 <흐릿한 나를 선명하게 그리는 명화 문답 일기>였다. 어쩌다 '그림 속 사람'과 대화하는 형식의 책을 출간했는지 설명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동안 내가 '내 마음'과 어떻게 대화해 왔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질문들을 던지며 복잡한 감정을 이해해 왔는지 설명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17년째 써오고 있는 일기의 효능에 대해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그림을 본다는 건 그림이 내 마음에 어떤 느낌을 남겼는지,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지, 어떤 신념을 확인시켜주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면에서 자동적으로 벌어지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강연 들으러 오시는 분들이 이해하실까 고민하면서 강연 자료를 만들었고, 어쩌다 보니 "이 다섯 문장만 있으면 만능키처럼 예술 작품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라고 약을 팔고(?) 말았다.


실제로 <명화가 내게 묻다>를 쓰면서 가장 많이 자문자답했던 다섯 문장이다.

눈으로는 그림을 보면서 내가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파악했고, 그림을 통해 '자유 연상'으로 떠오르는 기억을 곰곰이 돌이켜봤고, 당연하다고 믿고 살았던 신념들 - 이를테면, 초심이 가장 좋은 것이다, 바쁜 건 좋은 거다, 여자에게 화장은 예의다 등 -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그게 진짜 내 신념인지 사회가 주입해놓은 고정관념인지 판단해봤다.


청중과 함께 이 과정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전문 강연자도 아닌 주제에 '실습 활동'까지 진행하려니 간 떨리게 부담스러웠지만, 내가 그림과 대화하며 느꼈던 농밀한 교감의 기쁨을 그분들도 느껴보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먼저 영국에서 농부들의 일상을 즐겨 그렸던 19세기 풍경화가 조지 클라우슨이 그린 '쉼, 휴식'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여드렸다.



강연 초반에 미리 나눠드린 실습지에는 총 25개의 감정 단어가 적혀 있었다. 이 가운데 그림 속 농부가 보여주고 있는 감정에 가장 가까운 걸 골라볼 수 있도록 독려했다. 청중들은 각자 떠오르는 대로 '질문 공식' 속 빈칸에 채워보는 시간을 가졌다.  

어디서도 검증된 적 없는 다섯 개의 질문 공식을 들이미는 '야매 강사'의 요청에 각자의 생각대로 빈칸을 채워가는 청중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머리 위에 먹구름이 한가득이었다. 마이크를 들고 한마디를 덧붙였더니 모두 하하하 웃었다. 한결 밝은 표정으로 슥슥 종이 위에 생각을 써 내려갔다.


"여러분, 그거 시험지 아니에요. 정답 같은 것 없고요. 나중에 해답지도 나눠드리지 않을 거예요."


그림을 보면서 인상, 기억, 신념을 적어 내려 가보는 경험, 그리고 그 끝에 반드시 "나는 왜 그런 인상, 기억, 신념을 떠올렸을까?" 질문해보는 경험을 난생처음 만난 30여 명의 청중과 함께 했다.

진행하는 강연자의 용기 없음으로 청중들께 마이크를 건네 그분들이 그림에서 읽어낸 감정에 대해 나누는 시간은 가지지 못했지만, 내가 왜 <명화가 내게 묻다> 서문에 이런 문장을 적었는지에 대해서만큼은 충분히 설명한 시간이었다.


내가 미술관에서 얻고 싶은 것은 ‘교양’이 아니라 ‘관계’고, 하고 싶은 것은 ‘감상’이 아니라 ‘대화’였다.



2

강연 후 질의응답 시간에 흥미로운 질문들이 쏟아졌는데, 그중에서 유독 이 질문 하나가 내 마음에 콕 박혔다. 아내와 함께 강연장을 찾으셨던 중년 남성분께서 던진 질문이었다.


"저는 보여주신 조지 클라우슨 그림을 보면서 표에 있는 단어 중에 '무기력'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어요. 그런데 화가가 실제로 표현하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닐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오해가 생기는 건데, 이런 오해가 제대로 된 감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질문을 받자마자 이렇게 대답했다.


"음, 저는 독자이자 제 글을 써서 발표하는 작가이기도 해요. 작가 입장에서 먼저 설명드려볼게요. 저는 제 글을 읽는 독자분들이 글에 담긴 제 의도를 알아맞히는지 아닌지 별로 궁금하지 않아요. 화가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요. 본인의 의도를 사람들이 알아맞히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림을 그렸을까요? 작가의 의도를 알아맞히는 것보다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건 작품이 각자의 마음에 남긴 잔상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거라고 저는 믿고 있어요. 어쩌면 제가 많이 뻔뻔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오해 좀 하면 뭐 어때,라고 생각하거든요. (웃음)"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아, 그때 이 말씀을 드릴 걸...' 싶은 생각이 뒷북처럼 떠올랐다. 이 글을 쓴 건 어쩌면 그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3

작가의 의도를 알아맞혀야 한다는 생각 아래엔 감상에 '정론'이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 '정론'은 권위와 지식을 나보다 더 많이 갖춘 누군가가 이미 정해놓았고 난 그걸 알아맞혀야 한다는 생각도.


우리는 미술을 오지선다형 시험으로 배웠다. 미술만 그런 게 아니고 시, 소설, 음악... 모든 예술을 그렇게 배웠다.작가의 의도를 알아맞히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 혹은 알아맞혀야 한다는 강박은 아마도 기억 저편에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오지선다형 시험지의 검은 주술 때문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시어 하나하나에 밑줄을 치고 참고서에 나온 해석을 옮겨 적으면서 암기한 기억, 서양미술사의 주요 작품 제목과 그가 속한 화풍을 달달 외우던 기억이 '예술 작품과 나의 마음 사이에서 농밀하게 피어날 수 있는 교감'을 방해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지식, 물론 중요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어떤 면에서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객관화된 정보와 지식은 검색으로 금세 찾을 수 있는 시대다.

지식을 암기하는 것으로 '머신 러닝'까지 하는 슈퍼 컴퓨터를 이길 순 없다.

그러므로 지식보다 중요한 건 자기만의 관점을 갖는 일이다.

자기만의 관점을 가질 땐, '내가 이렇게 느끼고 생각한다는데 언놈이 뭐래?' 같은 뻔뻔함이 약간은 필요하다. 검증부터 받으려고 하면 아마추어들은 지쳐 나가떨어지니까.

넘쳐나는 정보를 어떻게 취사선택해서 어떤 쾌로 엮어낼지 생각하는 게 훨씬 필요하고, 심지어 그 작업은 암기보다 더 즐겁다.

그렇게 관점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분명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공부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지식은 그 순간에 필요에 의해 쌓으면 된다."


질문해주신 그분께 이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었다. 말주변이 없어서 이렇게 뒷북으로 글을 슬며시 올리지만.



4

구글 아트 프로젝트에서 '실험' 중인 Amit Sood의 TED 강연


이런 생각을 갖는데 막강한 영향을 미친 존재가 있다. 바로 구글 아트 프로젝트 사이트다. 전 세계 주요 박물관의 소장품 수백만 점을 초고해상 데이터로 변환해 아카이빙 한 곳. 사조별, 국가별, 화풍별, 재료별, 색채별로 작품을 분류하고 검색할 수 있는 이곳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일개 한 명의 인간인 내가,

심지어 예술사나 미학 전공자가 될 생각이 없는 아마추어 애호가인 내가,

구글이 쌓아놓은 미술 데이터를 뛰어넘는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자명하다. 구글이 못 하는 걸 하자."


구글이 못 하는 일이 뭘까?

구글은 내가 될 수 없다.

구글은 개인이 될 수 없다.

한 명의 개인을 이루는 건 뭘까? 배우고 익혀 알게 된 지식도 물론 나의 일부겠지만, 아무래도 그보다 더 큰 지분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사소하다고 넘겨짚고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매일매일의 감정, 충동, 감탄, 마구잡이 상상 같은 것들, 그게 나라는 사람의 개인성을 이룬다. 데이터로 변환될 수 없는 작고, 미비하고, 어수선하고, 제멋대로인 감정과 경험, 다짐들이 한솥에서 펄펄 끓다가 나라는 사람의 '관점'을 만드는 것이다.


명화를 도구 삼아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그리고 그걸 적어 내려 가는 일은 미술 비평을 연구하는 분들께 도움이 되라고 하는 일도 아니고, 학계에 지식 한 줌을 더해주기 위함도 아니며, 화가의 의도를 잘 알아맞혀서 그를 즐겁게 해주기 위함도 아니다. 그저 내 솥단지를 달구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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