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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Feb 12. 2017

구원의 미술관

1

3년 동안의 프랑스, 벨기에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꼭 1년이 되었다. 1년 전 오늘, 2016년 2월 12일에 이런 일기를 썼다. 


<서울에서 내가 제일 느리다. 지하철 계단을 오를 때도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내가 행인 중에 가장 천천히 걷는다. 10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며 살았던 서울이라는 공간은 늘 숨 가빴고, 나는 늘 종종걸음이었다. 서울은 그대로인데 3년 만에 돌아온 내가 너무 느려서 어리둥절하다. 벨기에에서는 매일 이런 속도로 걸었던 것 같은데. 

"내가 OO에 있을 때는 말이야" "내가 O년 전에는 말이야"처럼 비교의 말을 구사하는 일이, 예전에는 현재에 만족 못하는 투덜이의 몽상, 혹은 지나가버린 과거 한 줌에서 알량한 자존심을 채우려는 꼰대짓인 줄 알았다. 지금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 '또 다른 가능성'. 아주 다양한 일상의 형식과 살아냄의 방식이 있을 수 있으니, 지금 내가 아는 게 결코 전부가 아니니, 조금 더 시야를 넓게 갖자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거는 중이다. 그렇게 몽롱한 상태로 서울 곳곳을 오간 지난 열흘 간 세 개의 정규직 일자리 제안을 거절했다.>


1년 뒤 어느 날, 내가 일기를 우연히 다시 읽고 마구 찔리고 반성하고 자책할 것을 그때의 내가 알았던 게 아닐까. 아, 찔린다. 요즘 나는 서울에서 제일 빠른 사람 시늉을 하며 사는데. 하루하루 쳐내듯 살고 있는데. 책도 많이 못 읽고, 글도 거의 못 쓰고, 감성이라곤 바짝 메말라버렸는데. 단순히 시간이 부족해서라고 말할 수 없는 뭔가의 이유가 있는데, 그게 뭘까 궁리하다 지난달 읽었던 강상중의 <구원의 미술관> 속 한 구절이 떠올랐다. 


"무언가에 감동하는 힘이란 곧 살아가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갈 힘을 잃어버린 사람은 더 이상 그 무엇에도 감동하지 않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무언가를 보고 감동할 수 있다면 그건 살아갈 힘이 되살아났다는 뜻입니다.

감동이라는 것은 제 안에서 자가발전처럼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매개로 하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습니다. 

- <구원의 미술관>, 182쪽"


아, 감동이 고팠던 거구나, 요즘 나. 돌이켜보니 서울에 돌아와 아주 좋은 공간을 얻어 내 책 전시를 열었지만, 지난 1년 간 나는 정작 단 한 번도 전시회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 그림책 강의를 하는 좋은 기회를 얻었지만, 정작 그림책 서점을 서성이며 목적 없이 책 구경하는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다. 멋진 독립 서점에 놓이는 대안적인 잡지를 만들고 있지만, 정작 내가 독자된 입장에서 다음 호가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사랑하는 잡지는 발견하지 못했다. 


3

회사 생활을 하면서 호기심의 촉이 축 늘어지고 내면의 방에 뿌연 피곤이 내려앉을 땐 도망치듯 미술관으로 갔다. 기왕이면 아주 먼 나라에 있는 미술관으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우연히 어떤 그림을 발견하고 그 앞에서 전율하고 생생히 되살아날 힘을 얻었다. 


"하지만 그림은, 이런 평범한 인간에게도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알랑거리며 맞춰주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깊은 부분에 숨어있어 평소에는 자기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감동하는 힘’을 그저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 불러일으킵니다. 그저 눈앞에 ‘있을’ 뿐인 그림. 그러나 우리들이 그것에 가까이 다가서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있음’ 자체로 시각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전부를 흔들어놓는 그림. 

- <구원의 미술관>, 13쪽" 


서울이 어쩌니 속도가 어쩌니 했지만 요즘 일상이 메말라간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무방비 상태로 몸과 마음 전부가 흔들리는 경험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야 한 가득 그림을 담고 싶었던 거다. 미술관 갈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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