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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Feb 23. 2017

콘텐츠 디렉터의 어떤 하루

1

12년 전 오늘도 비가 왔었다. 쏴아 쏴아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가 아니고 추적추적 질척대는 비였다. 나는 동대문에서 촬영 소품을 구입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 있었다. 택시 기사님들이 틀어놓는 라디오는 일상의 배경음 혹은 백색 소음 같은 존재였다. 그냥 거기에 있을 뿐 그 소리들이 어떤 의미를 획득해 내 귓가로 날아드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차창에 희뿌연 김이 서리고 물비린내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택시 안에서 드문드문 이런 말들이 들려왔다. 여배우, 스물다섯, 주홍글씨, 자살... 어느 순간 그녀 이름이 직선으로 날아들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은주.


창밖은 온통 잿빛이었다. 징,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혜진아, 생일 축하해. 올해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내길 바래.> 어떤 사람은 2월 22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나는 태어났다.



2

"디렉터님, 여기 배경색 녹색 계열이 좋아요, 살구색 계열이 좋아요?"

볼드저널 지면 레이아웃 작업하던 디자이너가 물었다. "음, 글쎄. 둘 다 괜찮아. 처음에 일러스트레이터가 잡았던 파란색만 아니면 좋을 것 같아요."


"선배, 문구 상품학 기사 1차 레이아웃 나온 것 좀 봐주세요."

후배 에디터의 요청. "음, 여기 여기 여기 사진을 풀(full) 사이즈로 잡은 페이지 순서를 바꿔보자. 3페이지랑 4페이지 순서를 바꾸고, 하나는 저기 뒤로 보내고."


예정되어 있던 촬영 시간에 사진 스튜디오로 이동하니 이제는 매 순간이 선택이고 결정이다. "기자님, 제품에 그림자가 이 정도 각도로 내려오는 게 좋아요, 아니면 더 쨍하게 찍는 게 좋아요?" "디렉터님, 이렇게 제품들 배치해서 영상 촬영을 할 건데, 어때요? 괜찮으세요?" "여기 이 세팅 컷에서 앵글은 이 각도가 좋아요, 아님 이 각도가 좋아요?" "배경지 색깔은 회색으로 할까요, 미색으로 할까요?"


이럴 때면 무성하게 자란 질문의 원시림에 홀로 떨구어진 낙오자가 된 것 같은 심정이 된다. '나도 사실 모든 잡지 편집의 진리를 다 꿰고 있는 건 건 아냐. 회색은 이런 느낌이라 좋고 미색은 이런 느낌이라 좋은데, 어떻게 하지?' 속마음은 이래도 모든 잡지 편집의 진리를 다 꿰고 있는 것처럼 확신에 찬 어조로, 서슬 퍼런 검을 빼들고 원시림의 나무들을 베어나가는 자세로 단호하게 대답할 의무가 나에겐 있다. 선택을 미루는 편집장만큼 주변인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존재도 없으므로.



3

잡지를 구성하는 글, 헤드카피, 사진, 서체, 레이아웃, 배열... 이런 요소는 취향과 결부되어 선택된다. 그러니까 1+1=2라고 도출되는 숫자의 세계에서처럼 모두가 동의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결론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내 눈엔 예쁜데, 저 사람 눈엔 별로일 수 있다. 편집장은 좋아하는데 모두가 이상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선택할 권리는 편집장이 갖는다. 자문을 구할 순 있지만 마지막 선택은 스스로 해야 한다. 최종 선택은 최종 책임을 의미한다. 순간순간 무성하게 달려드는 질문의 원시림 안에서 편집장이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 그 작은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 한 잡지의 질을 결정한다.



4

어릴 때 나는 내 미적 판단을 잘 믿지 못했다. 색칠하기 놀이를 할 때 분명히 회색과 분홍색이 어울린다고 판단해 칠을 해놓고도 '혹시 이상한가? 나만 이렇게 했나?' 주변을 기웃대던 소심한 아이였다. 내 성장기의 역사는 그 소심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발버둥 친 역사나 다름없다.


오늘 하루 동안 몇 개의 선택을 한 것인지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선택을 했다. 필자가 보내온 원고에서 무엇을 더하고 뺄지, 포토그래퍼가 제시해 준 사진톤의 예시 중 어떤 것을 취할지, 일러스트레이터가 보내온 시안에서 어떤 부분을 수정할지, 영상 디자이너가 녹화한 클립의 어느 지점이 좋고 어느 지점은 별로인지, 후배 에디터 기사의 완성도를 올리기 위해 보강할 점이 뭔지, 보강을 위해 어떤 취재를 더해야 하는지... 오늘 하루 내가 가장 많이 자주 생각했으나 내뱉지 못한 말은 이것이었다. '내 판단이 맞을까? 정말 이게 최선일까?'



5

하루가 갔다. 물비린내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야간 버스를 타고 퇴근을 했다. 버스 안에 있는 모두가 지쳐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타이어가 빗길에 미끄러지며 내는 파열음이 간혹 낮게 울렸다. 사이사이 버스 기사님이 켜놓은 라디오 소리가 웅얼거렸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생일 축하한다. 수고했어, 여러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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