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디터C 최혜진 Oct 30. 2016

그림책이라는 연결고리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출간 소식  

2014년 11월 3일, 그러니까 2년 전, 벨기에 브뤼셀에 살고 있던 어느 날, 일기장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림책이라는 예술 장르를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끌린다. 가슴이 뛴다.

그림과 글이 서로를 보완하고 협력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효과를 이끌어내는 점.
직관적인 표현 덕에 쉽게 친해질 수 있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작가들의 고민과 통찰력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
희망, 평등, 우정, 연대, 긍정, 용기 등 한때 믿고 따랐으나 어른이 되며 잃어버린 가치와 다시 만나게 해준다는 점.

무엇보다 많은 창작물이 디지털로 변환되는 시대에 절대 치환될 수 없는 종이책의 예술성을 품고 있다는 점, 종이 인쇄물로 가장 끈질기게 살아남는 예가 되리라는 점 등이 자꾸만 나를 사로잡는다. 

프랑스와 벨기에가 세계적인 그림책 강국이라는 사실, 한국 역시 최근 아시아에서 가장 떠오르는 그림책 강국이라는 사실이 내가 모종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명’처럼 느껴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달뜨고 설익은 순간의 흥분일까 걱정되기도 한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지. 일러스트레이터도 아니고, 아동 문학 전문가도 아니고, 비평을 공부하지도 않은 내가 그림책으로 뭘 하겠다는 건지,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은 건지, 편집자가 되고 싶은 건지, 서평가가 되고 싶은 건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봤다. 내 안에서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럴싸한 뭐가 되지 않아도 좋다. 그저 그림책이 좋아서 책을 혼자서 잔뜩 사들인 할머니로 늙어도 좋다. 기꺼이 몰입하고 감탄하고 즐기고 헌신하고 싶은 대상을 발견했다는 사실만으로 황홀하다." 


이 일기를 쓰고 조금 더 본격적으로 그림책에 몰입하고 감탄하고 즐기고 헌신하기 위해 혼자만의 프로젝트 하나를 궁리했어요. 하루에 12시간도 넘게 컴퓨터 앞에 앉아 프랑스와 벨기에의 그림책 작가에 대해 조사하면서 수 천 장의 이미지를 흡입했죠. 머리가 빙글빙글 돌 때까지 작가 한 명 한 명에 대해 알아보면서 A4 25장짜리 <유럽 그림책 작가의 창의력 레슨>이라는 제목의 인터뷰 연재 기획안을 완성했습니다. 



당시엔 어딘가로부터 연재 의뢰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취재에 드는 비용을 대주겠다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네가 취재를 잘 해오면 나중에 책으로 만들어줄게' 같은 약속을 해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30-40년 가까이 작품 활동을 한 해외 거장 작가들이 섭외에 응해줄지, 섭외에 응해준다고 해도 미천한 불어 실력으로 인터뷰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한국에서 그림책은 소수만 알고 즐기는 장르인데, 대중적 인지도가 없는 낯선 예술가 인터뷰를 과연 한국의 독자들이 반가워하며 읽어줄지, 기획안을 만들던 당시엔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그림책을 좋아하는 마음 하나가 너무나 컸어요. 사랑에 빠지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지잖아요. 깊이 누군가를,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엔 정말 커다란 힘이 있습니다. 두려움, 걱정, 떨림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뛰어넘어 자신을 새로운 상황 안에 던져 넣는 힘이 있죠. 


좋아하는 마음이 모터가 되어서 

프로젝트를 현실화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칠 수 있었고, 

미천한 불어 실력을 보강하기 위해 인터뷰 준비를 더 꼼꼼하게 하게 됐고, 

이국에서 기차, 버스, 렌터카를 갈아타며 6708km를 이동하는 동안 지치지 않았고, 

생전 처음 만난 열 명의 유럽 그림책 작가 앞에서 '당신의 예술 세계를 정말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궁금증을 풀어주세요'라고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또 감사하게도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은행나무 출판사와 인연을 맺게 되어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출간할 수 있었고요. 



*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책 정보 보기 : https://goo.gl/S2isy1 


책을 출간하기까지 거친 모든 과정을 돌이켜 볼 때마다 이탈리아 작가 베아트리체 알레마냐가 인터뷰 중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 꿈을 이뤄가는 것은 눈덩이를 굴리는 것과 같아요.
작은 단계들을 하나하나 끈기 있게 거치면 어느새 크게 불어나 있지요." 

눈덩이를 굴리는 것처럼 일이 하나씩 진척되면서 책이 출간되고 크고 작은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초청해주시는 곳들이 있어 강연 계획이 잡히고 있고, 잘 준비해서 선보여야 하는 중요한 전시에도 합류하게 되었고요. 어제는 아트북 라운지 비플랫폼에서 스물다섯 분의 독자들과 만나는 즐거운 시간도 가졌습니다. 



작가와의 만남 자리에서 작가가 저렇게 빵 터져서 웃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독자분들과 격 없이 수다하고 웃고 떠들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2시간 내내 쉴 틈 없이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던 것 같아요.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림책을 좋아하게 된 덕분에 새로이 맺게 된 '관계'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책을 매개로 한국과 프랑스 벨기에를 오가며, 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얼마나 많은 분들과 만날 수 있었는지, 그림책이 얼마나 멋진 연결고리가 되어주었는지 지난 기억을 되새김질했어요. 좋아하는 작은 마음에서 시작해 눈덩이를 굴리는 것처럼 서서히 커져간 일련의 사건들이 여전히 제게는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또 예감하게 됩니다. 2년 전 어느 날 일기에 썼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그림책이 좋아서'라는 작고 단순하지만 뜨거운 마음으로 눈덩이를 열심히 굴리리란 걸요. 


그동안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읽어주시고 생각을 나눠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을 쓴 최혜진

제이콘텐트리m&b에서 10년간 잡지 기자로 일하고 유럽으로 날아가 3년간 살며 ‘유년기와 창의성’을 주제로 유럽 그림책 업계 곳곳을 취재했다. 여성중앙, 네이버 오늘의 책, 국립어린이청소년 도서관 등에 그림책에 대한 글을 썼고, 현재는 매거진 <볼드 저널>의 콘텐츠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책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명화가 내게 묻다><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을 썼다. www.radioheadian.com




매거진의 이전글 작가와의 만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