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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Apr 11. 2017

쓰기의 '장비빨'

서로의 '쭈구리' 시절을 기억하는 10년지기 A 언니에게 역시 '쭈구리' 시절에 만나 5년째 알고 지내는 B 영상 감독을 소개하기로 했다. 패션 광고 프로덕션을 운영하는 언니는 젊은 포토그래퍼로 빠르게 물갈이되는 업계 분위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10년째 같은 스태프와 쭉 일하고 있다. 실력 있는 영상팀과 잘 인연을 맺어 오래 일하고 싶다는 말에 퍼뜩 B가 떠올라 둘의 만남을 주선한 자리. 


"이 화보는 새로 나온 핫셀블라드로 찍었는데,  다르긴 다르더라고요. 같은 조명에 같은 모델이었는데도 색감이 훨씬 더 고급스럽게 표현돼요. 이러니까 사진가들이 장비 욕심이 날 수밖에 없죠." A 언니의 말에 B 감독이 화답했다. 

"영상 쪽에선 레드 카메라를 주로 쓰지만 그 미묘한 색감 차이 때문에 소니 계열, 캐논 계열... 회사별 카메라를 다 갖출 수밖에 없어요." 


핫셀블라드는 카메라 바디만 6천 만원이었는데 사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 영상 장비 가격은 사진 장비에 곱하기 두 배를 하면 된다는 이야기, 열심히 돈을 벌어서 결국 장비를 사는데 다 바치게 된다는 이야기, 뭐 하는 짓인가 싶다가도 그 장비가 또 비싼 값을 해주니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 등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비싼 장비와 그런 물건을 사용해 화려한 비주얼을 만드는 세계에 대한 말들이 우수수 일어나 얽히고 섥혀서 핑퐁 게임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B 감독이 고개를 돌려 나에게 물었다. 


"요즘 다음 책 쓴다며. 글은 잘 써져요?" 

"아니, 마음처럼 안되네. 부담감 때문인지 진도가 잘 안 나가." 

"어디 여행이라도 가서 써요. 왜 <러브 액츄얼리>에도 나오잖아요. 말이 아예 안통하는 포르투갈에 가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글 쓰는 영국 작가처럼 해봐요." 

"나는 일상에서 벗어나서 낯선 호텔 가서 글 쓰고 그러는게 연장 탓 하는 어설픈 목수 같아서... 글 못 쓰는 애들이 괜히 방 탓하고 책상 탓하고 그러는 것 같거든..." 


얼버무리는 말꼬리를 A 언니가 낚아챘다. 


"장비빨, 그거 있다니까. 여행 가서 쓰면 글도 분명히 때깔이 달라질 거야." 


확고한 선언에 깔깔 웃음이 터졌다. 맞다, 그러네. 맨날 제자리걸음으로 뱅뱅 책상 앞에서 가슴 치는 것보다 장비빨을 믿어볼 필요도 있겠네. 낯선 도시에 가면 기꺼이 호기심의 촉수를 펼쳐서 풍경의 이면을 상상하니까. 피곤이나 귀찮음 같은 건 남 이야기라는 듯 낭만만 챙기니까. 그런 모드라면 글이 써지기도 하겠네. 때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까짓 비행기랑 호텔값 쯤이야, 너스레를 떨면서 푸하하 웃었다. 


더 나은 글쓰기를 위한 장비. 


지난 밤 읽은 책이 남긴 잔향, 

닮고 싶은 마음에 한숨 쉬며 베껴 적은 문장들, 

내가 보고 겪고 생각한 것을 굳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알리고 싶다는 오지랖, 

길가에 쌓여있는 폐지 더미를 빼앗길세라 다급하게 옮기는 리어카 할머니의 굽은 등을 바라보며 그녀의 저녁상을 상상해보는 마음, 

대충 얼버무리자는 내면의 목소리에 아니라고 떼를 쓰고 반대하는 피곤한 태도, 

끈질기게 놓지 말아야 할 왜냐는 질문, 

무엇보다 

쓰지 않는 나보다 쓰는 내가 더 좋다는 어이없을 정도로 맹목적인 믿음. 


이런 장비를 파는 곳이 있다면 정말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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