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에도 필요조건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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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화 재단에서 외고 요청이 들어왔다. 그간 주로 써왔던 명화나 그림책에 대한 글이 아니라 <볼드저널> 편집장으로서 중년 남성의 문화 예술 향유 실태에 대해 써달라는 요청이었다. 자신이 어떤 여가 생활을 즐기고 싶은지조차 생각해본 적 없는 중년이 많고, 여가 생활을 즐기는 경우에도 홀로 시간을 보내는 쪽이 많기 때문에 “함께 나아가는 문화 향유의 필요성”에 대한 글을 싣고자 한다는 설명이었다.
요청 이메일을 읽는 동안 내 마음은 순식간에 여러 자아의 전투장으로 변했다.
새로운 경험은 일단 반기는 '설레발 자아'가 말했다. "와, 잘 됐네. <볼드저널> 편집장으로서 쓰는 외고는 처음이니까 일단 해."
일정표에 코 박고 시간 관리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지도 감독 자아'가 말했다. "너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5월엔 <볼드저널> 마감을 하면서 세미나도 준비해야 하고. 신중하게 생각해. 마감 맞춰 글 쓸 수 있겠어?"
걸핏하면 속 태우는 '걱정 인형 자아'가 결정적 한마디를 던졌다. "중년도 아니고 남성도 아니면서 중년 남성에 대해 니가 뭘 안다고. 그런 글은 다른 사람이 쓰는 게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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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목소리였다. 현대의 아버지를 위한 잡지 <볼드저널>에 처음 합류할 때부터 숱하게 자문했다. 나는 남자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데 내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독자들이 정말 원하고 궁금해하는 콘텐츠를 기획할 수 있을까. 2030 여자들의 일상과 고민이라면 스트리트 뷰로 골목 안까지 속속들이 보여주는 디지털 맵처럼 환한데, 3040 아버지의 일상과 고민에 대한 내 인식 수준은 초등학생이 크레파스로 그린 5 대주 6 대양처럼 덩어리 져 있지 않은가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책 처방>을 연재할 때도 그랬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사건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힘겨워하는 독자가 편지를 보내올 때면 마음을 다해 글로 그를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타인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보태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가 겪은 차별, 그를 짓누르는 실패의 기억, 그의 가슴을 난도질한 폭언을 나는 똑같이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니가 뭘 안다고' 따져대는 걱정 인형 자아가 난동을 한참 부리고 나면 반문이 들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당연했다. 나는 그가 아니니까. 니가 뭘 안다고. 맞다. 난 모른다. 그런데 꼭 같은 일을 겪어야만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건가? 공감이 반드시 같은 성별, 같은 직업, 같은 나이대, 같은 경험을 전제 조건으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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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목적 가득한 전집만 많이 팔리는 한국 그림책 업계, 엄마가 아이의 놀이까지 일일이 기획하고 준비해주는 '엄마표 놀이' 문화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원고를 썼을 때 대다수의 독자들은 글을 반겨주었지만 소수의 독자는 이런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아직 아이가 없으셔서..." "나중에 아이 낳으면 작가님은 어떻게 키우실지 궁금하네요." 예의를 갖춰 에둘러 말했지만 메시지는 명확했다. 한마디로 '육아 경험 없는 니가 뭘 안다고'였다.
<혼자 있고 싶은 남자>를 쓴 선안남 심리상담가를 인터뷰해서 <볼드저널>에 실었을 때도 그랬다. 생애주기별로 남자들이 어떤 압박감을 느끼는지 자세히 알게 되어 좋았다는 평이 다수였지만, 일부 독자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 "여자 상담가가 남자 마음에 대해 얼마나 자세히 안다고..." 오랜 시간 동안 상담심리 공부를 하고 임상 경험도 풍부하고 책을 수두룩하게 쓴 전문가를 향해 세워진 '차단의 벽'의 근거는 딱 하나였다. 나는 남자고, 너는 여자인데 니가 남자인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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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단의 벽은 우리를 고립시킨다. 물론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 사이에서 농밀한 교감이 일어날 확률이 높을지도 모른다. 알코올 중독자의 모임이나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의 모임 등만 떠올려봐도, 아니, 그렇게 멀리까지 갈 것도 없이 일상 속 소소한 수다 속에서도 '나 같은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라고 확인받을 때 우리는 크게 안도한다.
'나 같은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어 다행이다'와 '같은 경험을 안 해본 너는 내 마음을 몰라'는 언뜻 같은 말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앞말은 타인을 향해 열려있으려 하고, 뒷말은 타인을 내칠 작정을 하고 있다. 앞말은 지난 외로움을 드러내고, 뒷말은 속속들이 이해받고 싶다는 기대감과 기대했다가 실망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감춘다.
'같은 경험을 안 해본 네가 뭘 알겠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간 세계는 황량하고 혹독한 곳이 되고 만다. 우린 모두 유일한 존재고 각자의 삶 역시 재현 불가능하므로 이해해 줄 수 있는 타인이 문자 그대로 단 한 명도 없게 된다. 흩뿌려진 섬이 되고 만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나는 어떻게든 연결되고 싶다. 중년에게든, 남성에게든, 아버지에게든. 두 가지 도구를 잘 활용하면 된다고 믿는다. '사건' 말고 '감정'으로 공감대 찾기, 그리고 상상을 허락하기. 타인의 입장에서 그의 마음 상태를 상상해보는 행위를 나 자신에게 허락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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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청받은 외고는 써보기로 했다. 나 아닌 '그들'에 대해 생각하고 쓰는 것을 허락하기로 했다. 일정표에 코 박고 시간 관리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지도 감독 자아'가 부디 잘 일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