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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May 13. 2017

열아홉 번째 일주일

말하자면, 일종의 넋두리 

2017년의 열아홉 번째 일주일이 지나갔다. 한동안 일기를 쓰지 못했다. 일기를 안 쓰는 시기란 보통 두 경우 중 하나였다. 정신이 흐리멍텅해지고 질문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사라져서 기록할 거리를 낚아채지 못하는 경우 아니면 압도적인 일이 벌어져서 그 상황을 살아내느라 기록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 나의 요즘은 두 경우가 반반쯤 섞인 것 같다. 


1

지난 가을부터 <볼드저널>을 만들고 있다. 기획, 취재, 원고 작성, 지면 레이아웃 작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스타일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지만, "그래서 이번 호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게 뭐야?"라는 질문에 즉각적으로 요약된 답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생각을 벼르는 데 가장 많은 에너지를 쓴다. 아니, 쓰게 된다. 잡지를 만드는 방법은 많고 굳이 이렇게 만들지 않아도 되는데 나라는 사람이 그렇게 생겨 먹어서 어쩔 수가 없다. 

종종 혈투를 치르는 기분이 든다. "그래, 이번 호의 야마(핵심 주제, 메시지 등을 의미하는 은어)는 이걸로 잡자." 결정해도 스물스물 다른 목소리가 내면에서 올라온다. '지금 우리 독자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이야기가 맞아?' '정작 궁금하고 갈급한 이야기는 다른 것 아냐?' '네가 짜놓은 배열대로 잡지가 나오면 그런 메시지가 전달되겠어?' (다른 데서가 아니라 내 내면에서) 온갖 검열이 들어오고 의심하고 검증하고 재검토하다가 이게 아닌가 싶어서 다시 원상복구도 했다가 온갖 미친 짓을 하고 나면 정말이지 피곤하다. 이런 발상 과정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라서 다른 사람 눈에는 조용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걸로 보이지만 매일 퇴근길에는 녹초가 된다. 


만드는 사람이 너무 무거워지면 좋을 게 별로 없다. 즐거워하면서 만들어야 독자도 즐거움에 전염된다. 알면서도 생각이 잘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볼드저널>의 타깃 독자인 3040 아버지였다면 고민이 이렇게까지는 길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궁금한 정보가 곧 기획이 되고, 취재의 근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자이고 자녀 양육 경험도 없다. 내 안에 존재하는 모든 공감 능력을 마지막 한 톨까지 모두 끌어모아서 그들에게 감정이입 하는 수밖에 없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이 될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 경험이 내 글쓰기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도. 



2

어제 출판사로부터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4쇄를 찍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렇게나 책이 안 팔리는 시대에 그렇게나 많은 분이 내 책을 소장하고 계신다니 신기하고 감격스러웠다.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는 나에게 다양한 기회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프랑스 그림책전>에 중요한 역할로 참여하게 해줬고, 그 전시를 본 여러 공공문화공간들에서 순회전 요청이 들어와 2018년에도 어쩌면 다양한 형태의 전시를 하게 될지 모른다. 

1:1 인터뷰에 최적화 되어서 4인 이상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입이 잘 떨어지지 않던 나를 그림책 강연자로 만들어준 것도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이다. 책이 나오고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청중을 만났다. 유럽에서 살던 시절에 내가 우러러 보던 그림책 평론가님들, 작가님들과 똑같이 강연 시간을 배정받고 선생님 소리를 듣고 있다. 


이 모든 기회와 변화가 어리둥절 하기만 하다. 새로운 경험은 일단 환영하고 겪고 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제안이 들어오는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데, 어찌 어찌 하다보니 들어오는 일의 난이도가 점점 높아져서 이제는 두 팔 걷어붙이고 제대로 달라붙지 않으면 크게 창피를 당할 일들이 들어온다. 문예지의 원고 청탁, 그림책전 순회전... 이런 건 2014년 가을에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연재를 기획하던 당시엔 생각도 못했던 일들이다. 물론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더이상 '애호가' 수준에 머물 수 없다는 부담과 알 수 없는 서글픔이 공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서 나미콩쿠르가 주최한 <국제일러스트레이터 초청 세미나> Q&A 세션 질문자로 나서서 일을 했다. 운영 본부 스태프가 해외 작가분들께 나를 소개할 때 picture book expert 라고 칭했다. 그 전문가 소리가 어찌나 부담스럽고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애호가가 전문가로 변태하기 위해 필요한 건 뭘까. 아니, 그보다 먼저 애호가와 전문가를 가르는 기준은 뭘까. 


오늘 세미나는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100여 명 이상의 청중 앞에서 진행된 행사였기 때문에 내가 한국어로 질문을 하면 통역가가 영어로 동시 통역을 해주고 답변하는 폴란드, 러시아 작가들은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누수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세미나 중 몇몇 순간은 '저 작가님은 왜 동문서답을 하시지?'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 경험 덕분에 역으로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취재할 때, 내가 얼마나 충만한 경험을 했던 것인지 깨달았다. 30년 40년 경력을 가진 외국인 작가분들과 1:1로 마주하고 앉아서 통역가 없이 직접적으로, 수혈을 받듯, 그들의 창조력을 전달받았던 그 시간들이 굉장히 특별하고 소중했구나 새삼 느꼈다. 그리고 내가 만났던 10명의 프랑스어권 작가님들이 자신이 터득한 지혜를 타인이 이해하기 좋게 정리해서 설명하는 능력도 무척 탁월했었다는 걸 오늘 세미나를 통해 역으로 느꼈다. 



3

내일은 늦가을에 출간을 목표로 하고 있는 <그림책 처방>에 들어갈 글 한 꼭지를 개고해야 한다. <볼드저널> 마감부터 앞으로 약속된 강연들, 원고 청탁들... 머릿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일이 너무 많다. 이렇게 생각이 갈갈이 흩어지고 찢어져서 무슨 좋은 글을 쓰나 울적하다. 사색을 깊이 하면서 나만의 관점을 발효시키려면 어떤 공간 같은 게 필요한데, 그 공간을 가지려면 뭐 하나를 버려야 한다.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나를 볼 때면 김형수 작가가 쓰신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에서 읽었던 아래 구절이 생각난다. 


"닭은 억울할지 모르지만 닭대가리의 지능이 낮은 것은 사실이에요. 이유가 뭘까요? 저는 것을 불치의 근면성에다 두고 싶습니다. 닭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모이를 찾아요. 그래서 발견하자마자 코끝을 맞춥니다. 그리고 콕 찍요. 콕 찍고 나면 바로 다음 모이를 찾아서 뛰고, 또 부리를 일치시켜서 콕 찍지요.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새가 질 때까지, 배가 터지도록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신동엽 시인은 1960년대의 명문이라 할 『시인정신론』에서 '닭의 세계관은 부리와 모이의 크기를 반지름으로 한 원의 크기'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 한 치의 회의, 한 치의 망설임, 한 치의 자기 성찰도 없이 오직 열심히 일만 했던 결과가 '닭대가리'를 만들어요."


요즘 나, 닭대가리가 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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