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설명하지 못할 때,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다.'
-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중
한국 사람을 한 덩어리로 놓고 성별로 먼저 반을 가르고, 그 다음 10대, 20대, 30대… 이렇게 연령별로 뭉텅 뭉텅 떼어 놓고 봤을 때 가장 힘 센 집단은 누굴까? 기업이나 조직에서 결정권을 행사하는 자리에 있고, 소득 수준이 가장 높으며, 어느 상황에서든 발언권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 아마 5060 남성일 것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권력을 가지고 있고, 청년이나 노년보다는 중년이 그나마 덜 소외되었다는 건 온갖 통계가 말해준다. 그러나 ‘자기 언어를 갖기 못할 때 누구나 약자다’라는 문장을 볼 때마다 나는 역설적이게도 몇몇 중년 남성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몇 달 전부터 '어바웃어파더(www.about-a-father.com)'라는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평범한 아버지의 평범한 삶 속에 숨어있는 비범한 아름다움을 포착하겠다는 목표 아래 20대부터 80대까지, 먼지 날리는 공사 현장부터 새하얀 병원 진료실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을 가진 아버지들을 가리지 않고 만나 철푸덕 자리 깔고 앉아 귀찮게 질문을 늘어놓는다. 요즘 힘든 점이 뭐냐고, 아버지가 된 이후에 어떤 생각을 가장 많이 하냐고, 후회 되는 점은 없냐고.
취재원 수가 늘어날수록 희미한 경향이 감지된다. 특히 중년 아버지들이 그렇다. 분명 다른 공간, 다른 상황 안에서 만난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비슷한 발언을 해서 놀랄 때가 많다.
중년 아버지의 입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단골 문장 1번은 “나는 사회적으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인데, 내 이야기 들어서 뭐 해요?”다. 구둣방에서, 경비 초소에서, 택시에서, 생활 전선 최전방에서 선량하게 살아온 서민층 아버지일수록 이렇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이나 ‘자기 이야기’ 할 발언권을 얻을 수 있다는 말 이면에는 전제가 있다. 경쟁에서 이긴 자가 언어도 갖는다. 졌으면 함구한다.
단골 문장 2번은 “요즘 젊은 애들은”으로 시작해서 수다스럽게 끝없이 이어지는 훈계다.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나요?” “왜 그런 생각을 했나요?” 등 본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질 때는 어색해하고 쭈뼛대며 말을 잇지 못한다. 대신 세태에 대한 한탄과 통탄의 말은 강한 어조로 거침없이 이어나간다. 못마땅한 점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비판하는 자신을 만족스럽게 바라본다. 그렇게 자기효능감을 채운다.
"사회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이나 ‘자기 이야기’ 할 발언권을 얻을 수 있다는 말 이면에는 전제가 있다.
경쟁에서 이긴 자가 언어도 갖는다.
졌으면 함구한다."
자기 언어를 갖지 못했을 땐 감정을 말하는 일이 껄끄럽다. 호모 헌드레드 시대에 중년이라 일컬어지는 1955년~1963년 베이비부머 세대는 자신의 삶을 자기만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우는 대신 역할로 스스로를 규정했다.
강력한 가부장제와 권위주의 안에서 가장의 역할, 아버지라는 역할, 직업이 부여하는 역할 등 ‘도리’만 제대로 하면 되는 줄 알았던 시대를 살았다. 아들 도리, 장남 도리, 가장 도리, 상사 도리 등 주변과 크게 다르지 않게, 모나지 않게, 자기 발견은 뒤로 좀 미루고 우선은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숙제들을 처리하면서.
한국이 이토록 공감불능의 사회가 되도록 경쟁적 판을 짜놓은 윗세대 아버지들이 미우면서 동시에 그들이 측은하다. 권력과 여유를 가졌지만 스스로에게조차 소외된 사람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감응하는 감수성을 갖지 못해 표류하는 사람들, 무심함, 무뚝뚝함, 고압적 태도가 남자다움의 상징이라고 배워버린 사람들, 성과주의 틀 안에서만 사고하는 사람들, 일할 때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는 사람들, 여가 시간이 어색한 사람들….
이런 이유에서 중년 남성들이 단순히 아는 문화에 그치지 않고 체험된 문화를 누렸으면 좋겠다. 페터 비에리가 <자기 결정>에서 쓴 것처럼 ‘교양을 쌓는다는 것, 그것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아는 문화’는 지식과 박식함을 위함이다. ‘체험된 문화’는 예술의 힘을 빌어 어찌해 볼 겨를 없이 영향을 주었던 구조적 관념들에 의심의 눈초리를 던져보고 자신을 억압했던 생각의 틀을 해부해 보는 경험을 뜻한다. 맹목적으로 닥치는 대로 살아왔던 시간을 잠시 멈춤하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의 경험와 내적 거리를 두는 작업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소망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누구에게 받은 영향인지 곰곰 생각하고 질문할 때 체험된 문화를 누리는 작업이 시작된다.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의 당연하지 않음을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자기 스스로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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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시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문화 놀이 매거진 POT 여름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