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박사의 실험실
왜 나는 20년간 책을 만들고 있나
벌써 자정으로 향하고 있다. 고흥 앞바다도 고요하다. 세상이 모두 숨죽인 이 시간에 오직 우리만 성성하게 깨어있는 것 같다. 사람들의 표정은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고, 어둔 밤을 밝히듯 점점 더 환해진다.
정혜신 선생님의 <당신이 옳다>를 출간하고 전국으로 심리적CPR워크숍을 진행하며 독자들을 만났다. 매번 시간 제약으로 많은 분들의 아픔과 고민을 다 나누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던 차에, 마침 전남 고흥에 열혈독자이자 정혜신 선생님의 오랜 지인분이 운영하는 공간이 있어, 완독자들과 함께 1박 2일간 심리적cpr 워크샵을 다녀오게 된 자리였다. 정혜신이라는 당대 최고의 치유자가 있기에 가능한 시간이었지만 책이 그 귀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매개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했다.
장장 8시간에 가까운 워크샵....몇 시간 자지도 못했지만 다음날 아침에 마주한 독자분들의 표정이 마치 알을 깨고 나온 작은 새처럼, 이전과 다른 느낌으로 생동하고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 웃었다가 울었다가 심각했다가 뿌듯했다가 하는 중에, 나는 맥락 없이 슬쩍 혼자 생각했다. “나 책 만들기, 참 잘했다. 정말 복 받은 편집자다.”
며칠 뒤 늦은 밤 친구의 문자가 도착했다. 이 책 덕분에 무너질 것 같은 시간을 잘 버텼다고, 스스로도 반성하게 되었다고. 좋은 책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그동안 숱한 책을 만들면서도 친구에게 이런 고백을 받아보긴 처음이었다.
책을 쓴 것도 아닌데 이렇게 감사 인사를 받는 일이 잦아지면서 생각했다. ‘책이란, 결국 이래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힘껏, 진심으로 쓰이고 도움이 되는.’ <당신이 옳다>가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아서, 오래전부터 어렴풋하게 마음에 그리고 있던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아서만은 아니었다. 그 전에 한 가지 고백해야 할 것이 있다.
너, 이대로 계속 살아갈 거니?
꾹꾹 연필로 눌러쓰고 지웠다 해서 너덜너덜해진 공책을 들고 나가, 소년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 꿈은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돌봐주는 네일아티스트가 되는 것이에요.” “저는 어릴 때부터 1등만 하려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어느 날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00여 명의 아이들, 100여 가지의 찬란한 꿈들, 그리고 100여 가지의 고민과 상처가 이곳저곳에 흐르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듣고 손으로는 빠르게 기록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마음이 자꾸 한 가지 질문에 멈췄다. “너 이렇게 계속 살 거야?”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꿈과 내일을 생각하고 발표하는 캠프인 링컨학교에서였다. 책의 기획을 위해 취재를 하며 아이들이 스피치 원고를 작성하고 발표하는 과정을 몇 개월간 함께하게 되었다. 계산과 판단이 아닌 순수한 열정과 호기심이 담긴 아이들의 이야기는 일상에 찌들어 메말라가던 30대 중반의 나를 아프게 건드렸다. 나도 꿈꾸던 것이 있었는데, 나도 설레며 살고 싶었는데, 가슴속에 나만의 이야기가 가득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함께 취재에 동행했던 선배가 어느 날 조심스레 이야길 꺼냈다. “혜진씨, 표정이 별로 행복해보이지 않아요. 자기를 좀 살펴야 할 것 같아요.”
쿵, 마음이 내려앉으며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나의 오랜 바람과 지향을 향해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나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산과 마음 공부에 입문하다
지금까지도 스스로 참 잘했다 생각하는 게 20대 후반에 산과 심리학에 입문한 것이다. 둘 다 입문의 강력한 계기가 되어준 것은 바로 책이었다. <등산: 마운티니어링>이라는 어마어마한 등산백과사전을 맡게 되면서 전문 등반을 알기 위해 등산학교에 들어가며 긴긴 산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산은 휴식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전문 등반의 세계에선 기술과 경험이 없으면 목숨도 잃고 마는 잔인한 자연일 뿐이다. 내가 놓친 내용의 오류가 산을 찾는 이들의 안전에 직결된다는 생각에 회사에 장비를 갖다두고 책의 내용을 실습하며 몇 번씩 확인을 했다. 그 과정엔 책의 번역자인 정광식 선생의 노력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산 책이 신체의 건강함을 만들어주었다면, 심리학, 즉 마음에 대한 책은 여전히 축축한 갈등과 슬픔이 남아있던 내 마음에 빛을 가져다주었다. 그동안 도통 이해할 수 없던 나의 마음, 관계에서 오는 상처 그 실마리들을 내가 만드는 책을 통해 치유해 갔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 부분은 저자분들의 강연과 수업에도 참여하며 더 깊이 알아갔다. 그 치유의 과정은 인생의 스승으로 삼고 싶을 만큼 훌륭한 저자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했다. 책을 통해 인생의 좌표를, 스승을, 안식처를 찾은 셈이다.
진짜배기 실용을 꿈꾸다
책을 읽는 과정도 그러하지만 만드는 과정은 더욱 드라마틱하게 새로운 것과 대면하고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을 받는 시간이다. 자신의 생에 대해, 내가 속한 세상의 방향에 대해. 성장과 변화의 앞단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체험하고 반추하는 저자들의 목소리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엄청나게 다양한 경험 속에 나를 담가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을 저자들과 함께 그 주제를 고민하고 원고 속에 담긴 지혜를 따라가는 과정은 엄청난 자극제가 된다. 그러니 편집자라는 직업인이기 전에 자연인으로서 먼저 그 목소리에 반응할 수 없다면 아무리 멋진 디자인과 편집력을 발휘한다 해도 불특정한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쓰일 수 있는 책이란 결국 만드는 이를 가장 먼저 움직이고 도움이 되는 책일 것이다. 나 역시 20여년간 책을 만들어온 과정이 사실 나의 목마름을 해결하고, 나를 치유하고, 나의 성장의 자양분을 만들어온 과정이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심기획’의 일환으로 최근 몇 년간 심리와 교육에 대한 책에 집중해 왔다. 책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재미로, 감동으로, 위로로, 경고로 말이다. 현장에서의 진한 경험과 내공으로, 객관적인 지식과 정보로, 타인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우리에게 쓰일 수 있는 책, 나는 앞으로도 이런 책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