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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운박사 Apr 04. 2022

다정해서 다정한 숙희씨

브라운박사의 실험실


사람도 만나지 않는 엄마가 확진이 되었다.

오미크론이 별 거 아니라지만, 70대 중반인 엄마에게는 치명적일지도 모른다.


"뭐하냐?"

"왜?"

"그냥.."

"수업 들어."


엄마는 자신의 걱정을 한껏 누르고 기다린 뒤에야 겨우 나에게 털어놓았다.  

"나 확진됐어."

"머라고? 어제 병원에선 괜찮다고 했잖어!"

..........

"그러네, 내가 뭐랬어! 증상을 아주 정확히 말해줘야지, 자꾸 괜찮다고 하면 어떡해."


목은 깔깔하지 않은지, 열은 나지 않은지, 밥은 잘 넘어가는지를 묻기도 전에 나는 버럭 짜증을 냈다.

이 엄중한 시기에, 주의사항이나 애써 알려주는 것들을 제대로 듣고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별 거 아니라지만 일주일 격리에 사람에 따라서는 병원에 입원까지 한다는데,

게다가 식사며, 청소며 생활과 집안일은 모두 자기몫인 엄마가 얼마나 걱정이, 불안이 앞섰을지는 살피지 않았다. 나도 걱정돼서 그런 거라고 합리화해봤지만, 그래도 말도 안되었다.

날이 밝아, 보건소에서 온 문자를 확인하는 걸 두고 또 실랑이를 벌인다.


"엄마 그거 문자를 꾹 눌러. 그럼옆에 전송, 머 그런 말이 뜨지?"

"아이고 참, 이거 자꾸 왜 문자가 없어지냐?"

"아니, 그게 아니고!"

"아, 왜 이렇게 안 되지.."


핸드폰 기능에 서툰 엄마를 타박하며 출근길을 서둘렀다.

그 문자가 와야 내가 가서 검사를 받는단 말이야,

그래야 내가 만났던 거래처 사람들한테도 문제 없는지 확인할 수 있단 말이야,

이렇게 셈을 하는 동안, 아픈 엄마는 없고, 오직 오직 내 생각뿐이었다.

그날 PCR검사를 받고 모임과 수업에 빠지게 된다고 서둘러 카톡방에 내 상황을 전했다.


"어머니는 좀 괜찮으세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나는 엄마에게 묻지 않았다. 진심으로, 괜찮은지..

일면식 없는 다른 사람이 건네온 따듯한  안부 메시지가, 딸의 걱정을 빙자한 힐난보다 몇십 배 더 따듯했다. 그제야 미안함이 사무친다.


내일이면 격리가 풀리는 엄마와 전화를 끊고 조금 멍하니 앉아있다. 엄마는 격리 기간 중에도 늘 내 안부를 먼저 물었다. 아마도 함께 식사했던 내가 걱정되었을 텐데, 나는 왜 자기부터 챙기지 않고 내 걱정만 그리 하시는지 되려 목소리를 높이기 일쑤였다. 드시고 싶은 것이라도 좀 사드리려고 집에 다녀온 길, 엄마는 비닐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레 과일이며 먹을거리를 묵직하게 싸서 내민다. 어찌 알까, 자기보다 더 걱정되는 존재에 대한 그 끝없는 마음을, 어찌 알 수 있을까, 감히 나 같은 사람이.


몇해 전 책모임에서 '엄마'에 대한 책을 읽고 쓴 글을 소환해본다.




엄마는 자기 가슴에, 작은 건포도 두 알이 달려있을 뿐이라고 했다.

살집이 붙기 시작하는 중년의 주변 아줌마들과 달리 마른 몸체였고, 얼굴에도 살이 없었다.       

오빠가 그 젖을 다 먹었다고 했다. 원래도 작은 가슴에 들어있던 몇 방울의 젖을,

다 빨아먹었다고. 가슴이 얼얼 아플 때까지.

그래서 나는 젖을 한 방울도 먹지를 못했다.     

그 탓일까.

유년기의 나는, 서러움이 많은 아이였다.

여름에도, 봄에도, 가을 낮의 서늘한 바람 같은 게 뱃속을 휘휘 지나가곤 했다.

먹어보지도 못한 엄마의 젖,

늘 양껏 채워지지 않던 엄마의 정.

서늘했던 유년기에 엄마는, 미움의 대상이었다.     

스무 살을 넘겼을 때, 엄마는 저항의 대상이었다.

나의 자유를 가로막는 철벽이라 생각했다.

12시를 꽉 채워 집에 들어가고 아침같이 나왔다.

선후배 꽁무니를 쫒으며 그렇게 밖으로 맴돌았다.

고운 말 바른 말보다는 가시돋힌 말을 쏟아냈다.     


서른을 넘겨서도 몇 번은 쿵쿵 부딪히고 서로에게 생채기를 냈다.

나이가 스멀스멀 차오르고 결혼의 가능성의 낮아질수록 엄마의 한숨은 깊어졌다.

사랑이 밥 먹여주느냐는 엄마의 힐난에 그래서 당신은 행복했냐고, 그 한마디를 꾹 참았다.

왜, 왜, 내 마음을 그렇게 몰라주냐고,

다른 사람은 다 나를 뭐라 해도, 엄마까지 그러면 어쩌냐고.

난 비정상이 아니라고.      

시간의 약. 엄마의 나 사이에 조금의 간격이 생겼다.

서른을 넘겨 이사를 나오던 날,

엄마는 내가 일하러 간 사이 작은 밭솥, 빨간 냄비 두 개, 세 벌의 수저, 세벌의 밥그릇........

작은 살림살이를 나도 모르게 준비해놓았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던 낯선 동네에 짐을 부리고 다시 엄마를 따라 집으로 왔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간격이 생기고 조금씩 ‘네 안에 나, 내 안의 너’가 편안해졌다.      

며칠 전 어버이날. 어머니와 공원을 걷는다.

“엄마, 내가 집에 오면 좋지?”

“응.”

“왜 좋은데?”

“그냥 좋지, 딸이 옆에 와있으니까.”

우리는 벤치에 앉아, 다정했다. 나의 다정씨. 내 안에 있는 당신, 당신 안에 있는 나.      

엄마가 그러했듯이, 온 존재를 누군가에게 주어본적이 나는 없다.

가장 좋은 것, 가장 많은 것, 가장 비싼 것을 챙겨주는 엄마의 손.

그 와중에도 나는 용돈 드릴 오만 원 권 지폐가 몇 장인지 조심스레 세어본다.

아, 이렇게 일방적인 짝사랑은 없다.      

아직은 꼿꼿해서 너무 고마운 엄마의 등.

헐렁한 외투 속에 숨은 엄마의 몸.

조글조글한 손으로 버무린 엄마의 맛.

루이스 부르주아가 어머니를 떠올리며 마망을 만들었다면,

나는 세 사람 정도 들어가는 검은 가방을 만들고 싶다.

“갸들 먹을 거라, 농액도 안 친” 야채로, 밤낮으로 고으고 볶고 지져서

만든 엄마의 음식이 들어있는 검은 가방이다.      

아, 제발 좀 그만 넣어.

무겁다고. 못 들고 간다니까. 아, 쫌.      

곰팡이가 하얗게 피어도 버릴 수 없는.

넘치고 또 넘치는.     

참 우리 엄마, 1947년생,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숙희라는 여자.

이숙희, 우리 엄마.     

다정해서 다정한 나의 다정씨, 나의 숙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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