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박사의실험실
개포초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4학년 때 8반, 5학년때 1반이었던 이,용,희라는 친구를 찾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오후 서너시쯤 가슴을 파고드는 이 계절이 오면 저는 종종 용희라는 친구를 떠올립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무척 내성적이고 잔뜩 위축된, 비쩍 마른 아이였습니다. 너무 수줍음이 많아서 1학년 입학을 하고선 학교에서 거의 말을 안 했어요. 배탈이 나서 식은 땀을 흘리면서도 말을 못 꺼내 그만 옷에다 실례를 할 정도였지요.
1학년 말 우리 가족은, 강남 신도시개발 열풍에 올라타 개포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강원도 화천을 지나, 남현동에 살던 저에게 이 거대한 신도시는 왠지 커다란 벽처럼 다가왔습니다. 집에선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고, 연탄을 때지 않아도 되는 신식 새 아파트였지만, 우리집은 여유롭지 않았고 그 정도는 어린 나이에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어요. 강남 8학군에 전학오는 애들로 학급인원이 7-80명이 넘었는데, 부유하고 기세등등한 아이들 틈에서 저는 존재감이 거의 없었습니다. 날로 위축되고 외로웠으니 자연히 성적은 좋지 않았고 그와 함께 학교생활이나 일상생활에서도 적응이 잘 되지 않았어요.
점점 개성이 뚜렷해지는 고학년이 되어선 그런 상황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거나, 인기가 많거나 적거나, 아이들과 잘 지내거나 못 지내거나, 똘똘하거나 아니거나....저는 자연스레 공부를 못하고 그렇다고 예체능을 잘하지도 않으며, 인기가 없으며 친구도 많지 않은 아싸가 되었습니다.
보통 소설에서는 이런 '미운 오리새끼' 같은 주인공들이, 학교나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끊고 열심히 책을 읽고 자기만의 세계를 키워가다, 결국 나중에는...우아한 백조가 된다는.......이런 반전 스토리로 나가기도 하던데, 저는 그 정도로 자의식이 그리 큰 아이가 아니었던가 봐요. 열두살의 저는 시시때때로 서럽고 마음이 시렸습니다. 아직 사춘기도 아닌 아이가, 초가을 찬바람 같은 마음이었달까요.
5학년이 되면서 유난히 우리 반엔 전교에서 인기 많고 공부 잘한다는 애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여자아이들은 패를 갈라서 치고박고, 남자아이들은 누구 누구에게 인기가 많은지로 힘을 겨루는, 사춘기게 갓 들어선 아이들의 정글 같았죠. 그러나 저와는 상관없는 리그였습니다. 발야구를 하면 물로 거칠게 그려놓은 ‘경기장’에는 서지도 못하고 한 쪽 구석에서 뚱하니 부러워하기 일쑤인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 무렵 저보다 세 살 살 위의 오빠는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아 늘 비교가 되곤 했습니다. 이런 정글 속에서 교사의 애정과 관심은 불가능한 것이었겠죠. 급식 당번으로 학교에 온 엄마에게 당시 담임교사는 애가 하도 말을 안 해서 바보인 줄 알았다는 험담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예회가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남학생 여학생 이렇게 두 명의 사회자를 뽑기로 했는데, 예상대로 남자 사회자는 최고로 인기가 많던 윤**가 되었어요. 이제 여자 사회자 차례였습니다. 누가 윤**와 짝을 이룰지. 손을 들고 누구누구 추천을 하는 중에, 갑자기 어디선가 “저는 이, 혜, 진”을 추천합니다, 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를 의심했죠. 애초에 남의 집 행사 정도로 생각하고 심드렁하게 구경하고 있던 찰나라 너무 놀랐어요. 얼굴이 빨개지는 건 물론 심장이 터질 거 같더군요. 황당하게도 어찌 된 영문인지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그만 제가 뽑히고 말았습니다. 하도 이상한 상황이라, 아이들이 장난스럽게 저를 뽑았는지도 모릅니다. 말수도 적은 저에게 이런 큰 역할이 주어진 것 자체가 충격인데 사실 더한 충격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의외의 결과에 학급이 웅성웅성한 가운데, 어쩔 줄 몰라하는데 제 앞에 있던 애들의 말이 저에게 너무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야 머라고? 이혜진? 윤**하고 너무 수준이 안 맞아.”
뒤에 내가 있는지도 신경 안 쓰고 저들끼리 하는 말도 그랬지만, 같이 사회를 볼 윤**의 세상 싫은 표정이 더 상처였습니다.
발표도 제대로 못 하는 내가, 학급 아이들과 부모들 앞에서 사회를 본다니,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부담스러운 일인데, 아이들의 힐난까지 듣고 나니 마음이 더 쪼그라들었습니다. 물기가 찬 것 같았고, 집에 달려가 “엄마! 나 학예회 사회자 됐어!”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은커녕, 창피함이 밀려왔습니다. 김민재아동복 원피스라도 걸치고 머리도 이쁘게 땋고 애들 앞에 서야 할 텐데, 예쁜 옷은 없었어요. 물론 엄마한테 말했다면 김민재아동복은 아니어도 원피스 한 벌이라도 당장 나가 사입혔을 겁니다. 하지만 절대 집에 가서 말하지 말자고 결심한 저는 대신, 의젓하고 언니 같던 금숙이에게 옷을 빌려 입기로 했습니다. 이른 아침 일찍 집을 나서 금숙이네로 향했죠. 금숙이의 셔츠를 빌려 입고 학교로 갔습니다. 형편이 우리 집보다 어려운 금숙이네였으니 그 옷도 학예회 복장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습니다. 심하게 보풀이 일어난 체크무늬 셔츠였지요.
머리끝이 주뼛주뼛하는 가운데 학예회는 끝이 났습니다. 나 혼자 치른 무섭고 외로운 세레모니였습니다. 교실 뒤쪽에 나를 응원해줄 엄마도 없었고 짝궁 사회자인 윤**는 저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는걸요. 조용한 아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타고난 무대체질이었네, 하는 신화는 없었습니다. 큰 사고 없이 끝났지만 큰 인상도 남기질 않았고 저는 다시 주변인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날의 기억이 참 오랫동안 멍울처럼 남았습니다. 스스로 방어할 줄 모르던 내가,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하지 못하던 내가 참 작고 서러웠습니다. 아이들의 수근거림과 윤**의 경멸어린 눈빛....‘나는 수준이 안 된다’는 식의 자기비하가 깊은 무의식에 또아리를 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공부를 제법 하게 된 청소년기에, 스무살에, 서른살에도 가끔 마음에 구멍이 뚤린 듯 아팠습니다, 이 날을 생각하면요.
2019년 어느 날입니다. <당신이 옳다>라는 책을 출간하고 저는 저자이신 혜신명수 샘을 따라 전국의 독자들을 만나는 현장에 달려가곤 했습니다. 공감 받지 못한 존재의 슬픔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이야길 참 많이도 들었습니다. 혜신샘은 그렇게 말씀하셨죠. 사람이 사는 건, 대단한 게 있어서가 아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단 한사람, 내 존재에 눈 맞춰줄 단 한사람만 있으면 살 수 있다. 그 사람이 꼭 내 가족이 아닐 수 있고, 오랜 절친 인증을 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그날도 어느 지방의 한 강연장의 객석에서 그런 대화를 듣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관객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는지 저는 다시, 그 작은 멍울 같던 순간, 열두 살의 학예회 때의 내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습관적으로 늘 그랬던 것처럼 다시 서러움의 회로가 작동하려던 순간, 제 감정의 회로가 살짝 방향을 틀었습니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불현듯 존재감 1도 없던 나를 추천한 그 아이가 생각난 것이죠. 처음이었습니다. 수준이 안 맞다고 대놓고 무시하던 아이들 틈에서 진지하게 내 이름을 호명했던 아이. 그 아이가 바로 용희였습니다.
용희는 2년 연속으로 같은 반이었지만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짝도 같이 한 기억이 없습니다. 용희는 부적응아 같던 아싸인 저와는 달랐습니다. 곰돌이 같이 통통했고 귀염성 있는 얼굴의 아이였습니다. 그렇게 인기가 많거나 하진 않았지만 내내 반장이었고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는 모범생이었어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유순하고 따듯한 아이였던 거 같아요.
참 신기하게도 매번 서러움 자체였던 학예회에 대한 기억이 <당신이 옳다> 덕분에 고마움의 기억으로 바뀌었습니다. 아, 어디선가 나를 따듯하게 바라봐주던 한 사람이 있었구나 하고요. 용희의 그 작은 관심이 너무 고맙게 생각되던 찰나.…..카메라 후레시가 팡하고 터지듯 머릿속에서 한참을 묻어두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용희는 2학기 학예외 때만 저를 추천한게 아니었습니다. 또 한번 저를 불러낸 적이 있었어요.
교실 뒤편에는 달마다 학급신문이라고 하는 것이 걸리곤 했는데 공부를 잘하거나 인기가 있거나 재주가 있거나, 여튼 선생님의 신임과 아이들의 인정을 받은 친구들이 만들곤 했지요. 어느 오후 다음달 신문을 누가 만들까를 토의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용희가 저를 추천한 것이에요. 야, 너 왜 그래! 하는 심정으로 쳐다보았지만 나를 골탕먹이려고 한 일은 아닌게 분명했습니다. 아이들은 저를 힐끗 힐끗 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요. 글씨를 못 쓴다고 교탁으로 불려가 얼굴에 붉은 글씨로 벌을 받던, 숙제도 제대로 못하던 저였으니, 학급신문을 제대로 만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숨겨진 글 솜씨나 미적 감각을 발휘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설프게 흉내낸 신문이 뒷벽에 붙어있던 내내 창피함만 가득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용희가 왜 나를 그렇게 중요한 자리에 두 번이나 추천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놀리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사춘기 소년이 한 소녀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품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비록 ‘알고보니 그 외톨이 소녀는...’ 이러면서 극적인 반전을 만들 만큼 대단한 결과를 내놓진 못했지만, 나이들어 생각해보니 제법 대단한 일을 해냈던 적이 저에게도 있는 것이었죠, 용희 덕분에.
이 기억을 몇십 년만에 되살리곤 신기해하다 그만 콱, 목이 매었습니다. 용희가 추천한 두 가지 일은 공교롭게도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과 닿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학급신문 대신 책을 만들고, 사회를 보는 대신 발표를 하곤 하지만, 저를 살게 하고 성장시켜온 일과 닿아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때보단 훨씬 능숙해졌고 더 이상 어깨들썩하는 서러움에 빠져 있지 않게 누군가는, 삶의 어떤 순간에도, 나를 생각했고, 나를 지켜보았다는 것을 선물처럼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용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난 뒤 눈물의 통로 같던 학예회 때의 기억이 바뀌었습니다. 마치 온열기의 필라멘트가 붉어지며 열감이 올라오듯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용희라는 존재가 생각나며 제 마음이 따듯해졌습니다. 저를 따듯하고 진지하게 바라봐주던 한 사람의 존재를 생각하면서요.
용희에게
용희야, 너가 그때 날 왜 추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아니, 난 지금 20년 넘게 책을 만들고 있고, 가끔 사람들 앞에서 사회도 보고 발표도 하고 그런단다. 제법 잘할때도 있어서 인정도 받고, 마치 꽤 근사한 내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지도 않고 이제는 20년 넘게 나에게 잘 맞는 옷이 되었단다.
너가 나를 잘 알았을까, 아직 피어나지 못했던 나의 소질과 재능을 알아보았던 것일까. 그래봐야 우린 고작 열두살짜리였고 너랑 나랑은 친하게 지낸 사이도 아니니, 아니었을 확률이 높겠지? 그저 우연일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서도 신기하고 그렇단다.
가정을 꾸렸다면 그때 우리만한 아이를 키우고 있을 수도 있겠다. 분명 자상하고 따스한 아빠로, 남편으로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나의 열두살은 온통 시리고 외로운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어.
언젠가 만날 수 있다면, 따듯한 밥 한끼 열두살의 나를 대신해 꼭 사주고 싶다. 정말 고마워. 늘 건강하고 평안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