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박사의 실험실
2019년 에살렌연구소에 갈 때의 일인 듯싶다.
에살렌연구소는 캘리포니아 빅서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곳에 있는 곳인데
1960년대 이후 전세계의 정신적, 영적, 전인적 성장을 꿈꾸는 전문가들이 모여들어
최신의 연구결과와 이론, 지혜와 통찰을 나누는 곳으로 유명하다.
<신화의 힘>으로 유명한 조셉 캠벨, 게슈탈트 치료의 창시자 프리츠 펄스, 가족치료의 어머니라는 버지니아 사티어 등 현대인들의 심리와 지성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학자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근 10여년째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언젠가 꼭 한번 그곳에 가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치유작업을 하는 이들의 먼 동경 같은 것이었지만,
항상 그곳을 떠올릴 때면 가슴 한 쪽이 설레곤 했다.
물론 구체적인 바람은 아니었다.
2019년 봄, 에살렌연구소의 뉴스레터를 살펴보는데 너무나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다리아 할프린'
애나 할프린의 딸이자, 동작중심표현예술치료의 본산이라 할 타말파 인스티튜트의 수장이 아니던가.
몇 해전 샌프란시스코에서 경험한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는 워크샵에 대한 기억이 다시금 강렬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바로 그녀가 그해 여름 에살렌에서 워크샵을 연다는 소식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는 연구소 홈페이지에 들어가 결제를 해버렸다. 출발까진 석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지방에 가는 것도 아니고, 한창 휴가시즌에 바다건너 그곳까지...
계획적인 사람들이 들으면 식겁을 하겠지만, 주말에 대구쯤 놀러가는 사람하고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가기 전 내 상황은 그리 여유롭지가 않았다.
일은 일대로 쌓여가는데 몸과 마음은 거대한 타이어를 몇개씩 매단 듯 무겁기만 했다.
재깍재깍 출발해야 할 날짜는 다가오고 부담감은 점점 커져갔다.
그럴수록 잰 걸음으로 부지런을 떨지 않고 장거리 여행을 위해 시간을 내어 무엇을 준비한다기보다,
짬이 날 때 슬쩍 슬쩍 한두가지 알아보는 식이었다.
더 정확히는 알아보지 않고 시간을 옆으로 치워두는 상황이다가, 도저히 안 될 때
한두 가지 를 알아보는 것이었달까.
상당한 집중과 시간을 투입해 해외 여행을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과,
눈앞의 산적한 일들에 대한 스트레스가 맞물리니
여행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밀린 일이 되어버린 격이었다.
게다가 예약에 예약을 거듭하는 일은 내가 정말 싫어하고 서투른 일 중 하나였다.
출발하는 날 새벽까지 짐을 싸느라 허둥대다 겨우 비행기를 타야 했다.
비행기만 타면 심장에 모터가 돌아가듯 들뜨던 마음과 달리
솔직히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휴, 이제 좀 쉬겠네 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에살렌을 향해 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동시에 우당탕 계획도 없이, 과정을 즐기지도 못한 채
돈은 돈대로 쓰면서 이 중요한 시간을 잔뜩 지쳐 맞이했다는 데 대한 자책도 들었다.
거대한 도시에서의 며칠을 보내고,
나는 비로소 목적지인 에살렌으로 향할 수 있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도시도 그 거대함과 분주함 속에 꼭 마음이 허전해지곤 했던 것과 달리
에살렌이 있는 빅서로 향하는 차 안에서는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리아와의 워크샵,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 넓은 바다와 맑은 공기..
일주일짜리 워크샵이 다 끝나갈 즈음에야
나는 비로서 어깨에 놓인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저무는 바다를 바라보며 스스로 물었다.
왜 이렇게 늘 허겁지겁 살고 있지?
임시로 후다닥 대충 때우며 살고 있지?
한템포 숨을 고르고 난 뒤에 속에서 조용히 대답이 들려왔다.
두려워서.
무서워서.
눈을 감았잖아.
.....
그런데 마지막엔 다시 꾸역꾸역 눈을 떠서 여기까지 왔잖아.
오긴 왔잖아.
충동-선택불안, 느긋함-속전속결....언뜻 보면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이
내 안에 있는데, 문제를 자꾸 피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두 가지 양상이다.
막상 펼쳐들면 그것은 내가 감당 못할, 숨 넘어가게 힘든 문제가 아니었고,
그저 시간이 들고, 애씀이 필요하지만 어떻게된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에, 헛 하고 놀란 적이 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는데, 왜 처음부터 그리 겁을 먹었지, 그리 겁을 먹어서 오히려 눈을 감아버렸지?
아 내가 문제에 늘상 압도당하는구나, 펼쳐보기도 전에 그 사실만으로 압도되어
되려 눈을 감아버렸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다. 내가 늘 그랬네.
제대로 못할 바에야 피해버리겠다는 마음도 거기에 가세를 했다는 걸.
그때 서서히 다가오는 파도를 보며 다짐했었다.
이제는 문제가 다가오면, 지레 겁먹지 말고 못해도 좋으니
살짝 한 걸음만 다가가서 살펴보자고, 찔끔찔끔, 문제 안으로 들어가자고.
다만 눈은 감지 말자고.
파도가 높다고 눈을 감을 순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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