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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운박사 Feb 22. 2020

Drum your life!

인잇_주름살은 별책부록

  

         

작년 가을 이후 안팎의 여러 변화들로 꽤 팍팍한 일상을 보내야 했다. 그 무렵 비실비실 가라앉던 삶의 에너지를 다시 생생히 차오르게 해준 세계가 있었으니, 바로 드럼이었다. 물론, 내가 연주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시작은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개척하고 있는 이상민이라는 드러머의 연주였다. 이미 ‘천재’로 인정받은 그의 연주 영상과 공연을 우연히 보았는데, 파워풀한 타악의 비트가 주는 원초적인 흥분은 기본이고, 다채로운 리듬과 찰진 사운드는 세포 하나하나를 깨워주었다. 두두둥 심장을 울리는 그의 연주가 한동안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잡식성의 대중음악 애호가로서, 특정 장르나 악기를 파고든다거나 할 만큼 음악에 심취해 본 적 없던 나에겐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공연장에서 밴드의 뒤쪽에 과묵하게 앉아 온몸으로 스네어와 심벌, 탐탐을 두드리는 드러머의 카리스마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적은 많았지만 그때뿐이었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나의 관심은 드럼이란 악기 자체로 확대되어 매일 밤 유튜브를 통해 드럼 장비에 대한 이야기며 국내외 유명 드러머들의 연주 영상을 찾아보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중요한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드러머는 밴드 공연에서도 눈에 띄는 위치가 아니다. 좌우 측면에 있는 경우가 많고, 중앙에 있더라도 무대 전면을 장악하는 보컬이나 기타리스트의 움직임 속에 가려지기 일쑤다. 게다가 무대효과로 조명을 쏘거나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면 거의 안 보일 때도 많다. 보통 사람들도 보컬을 주로 기억하지 드러머를 기억하는 일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드러머는 밴드 연주 전체의 중심이 되는 리듬을 잡아주고 나머지 악기들이 이에 따라올 수 있게 조율하는 실질적인 리더의 역할을 한다. 이상민 씨는 한 인터뷰에서 전세계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모여드는 뉴욕의 음악계에서는 드러머의 자리를 두고 ‘hot seat’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만큼 객석에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실질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드럼을 ‘밴드의 심장’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언젠가 이상민 씨가 한 음악 프로그램에서 디제이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지만, 악기의 특성상 다른 가수의 세션을 하다 보면 전면에 드러날 수 없을 때의 아쉬움이나 자기 음악에 대한 갈증은 없느냐는 것이었다. 이미 그 고민을 넘어선 듯한 답변은 그의 공연에서 재확인할 수 있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인들은 세션을 많이 하게 되는데, 이는 가수이든 밴드이든 누군가에게 선택되어야 하는 일이다. 저도 모르게 타인에게 불려지는 것을 기대하고 점점 집중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칫 그것이 자신의 음악 생활에서 중심이 되기 쉽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 누군가에게 선택당하기 전 내가 그것을 선택하는 일이라고 했다. 설령 내게 선택할 수 있는 힘과 명성이 아직 없을지라도,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닌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단독 공연이든 혹은 누군가를 위한 세션이든 자신이 연주하는 모든 음악은 자기 음악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마침 성공한 뮤지션을 꿈꾸는 앳된 청년들이 많이 와 있던 자리라 그 말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젊은 음악인들 틈에 어색하게 서 있던 나에게도 진한 울림을 남긴 말이었다. 항상 작가의 존재 뒤에 서 있어야 하는 에디터의 역할과 일의 의미가 겹쳐졌다. 그런데 곧 그러한 일의 특성이 에디터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란 점이 떠올랐다. 우리가 만드는 모든 콘텐츠와 상품과 서비스는 늘 누군가의 선택을 전제로 하니 말이다. 


어제는 선택하는 사람이었다가 오늘은 선택당하는 사람으로, 전면에 드러났다가 후면에서 보이지 않은 채로,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진자운동을 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선택하는 경우보다는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채, 두드러지는 곳보다 두드러지지 않는 곳에서. 그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선택을 기다리기만 하는 삶과 그 기다림 속에서도 나만의 비트와 리듬을 만들어가려는 삶은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자리, 어떤 순간에도 자신만의 삶의 드럼을 가장 멋지게 연주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있기에.               


SBS 인잇 https://news.sbs.co.kr/news/contributorList.do?themeId=1000000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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