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박사의실험실
습한 여름 날씨에 축 처지려던 찰나..
오래전 그 여름이 생각났다. 아주 오래전이다.
막 등산학교를 다니며 산의 재미를 알아갈 무렵, 나는 솔직히 바위에는 큰 흥미도 재능도 없었지만 산에서 이루어지는 그 모든 활동에 마음을 빼앗긴 뒤였다. 12년간 학교를 다니며 졸업식 때 한번도 눈물 흘려본 적이 없었는데 단 6주의 등산학교 과정을 마치는 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면 말 다한 것. 코오롱등산학교 정규반이 끝날 무렵, 당연히 아쉬움이 컸다. 그때 등산학교 회지에 실린 암벽반 후기가 가슴을 강타했다. 별을 따는 소년, 장군봉, 설악의 봉우리와 릿지를 누비고, 밤하늘에 뜬 별을 보며 산에서 비박을 하고.... 읽자마자 겁도 없이 여름휴가지를 결정해버렸다! 설악에서 펼쳐질 암벽반으로!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결정이었는지. 같은 조 형님들과 선생님들이 두레박질로 끌어올려 주어야 간신히 정상을 밟는 수준인 내게 고도감이 크고 산세도 험한 설악은 그야말로 넘사벽..그러나 바위 한다는 기쁨보다 산에서 먹고 자고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며 마음을 되돌릴 필요는 없었다.
입교한 다음날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설악의 봉우리를 오르고 내리기 시작했다. 초보도 끼어있지만 어쨌든 대놓고 암벽만 하겠다는 사람들만 모아놓은 코스이니, 쉴 틈이 없었다. 우리 조의 첫날 과정은 직전에 코스가 만들어진 유선대였고, 개척등반을 빼면 우리가 초등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그곳은 악수 등반 중 사망한 두 산악인을 기리는 의미가 담긴 곳이었다.
실컷 겁이 났지만 경험 많은 선생님들과, 열정적인 조원들의 손에 이끌려 무난히 올랐다. 그런데 마지막 두어 피치를 앞두고 있던 크럭스에서 로프가 바위 틈에 끼는 사고로 크게 추락하는 일이 벌어졌다. 15미터쯤 추락하는 아찔한 순간..!
다행히 하늘이 도와 떨어진 지점의 지형이 오버행이라 크게 다치지 않고 등반을 마쳤는데 저날 입은 상처로 얼굴 빼고 온몸에 피멍이 들었다. 오른쪽 다리 종아리는 살이 쓸려나갔지만 긴 바지로 슬쩍 가리고 등반을 계속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고 난 다음날부터 오히려 겁이 사라지고 비로소 로프의 힘을 믿게 되었다. 나름 사고를 당했다고 집에 가지도 않고 몸을 사리지도 않으니 어린 애가 대견하다고 칭찬을 들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바위가 즐거워지거나 선등의 목표 같은 성장의 욕구가 생기진 않았다. 등반 전 아침마다 요가로 몸을 푸는 시간이면 비가 오지 않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여전히 뾰족하게 솟은 설악의 바위는 너무 무서웠고, 나는 그냥 그 시간을 버텼다. 팔다리만으로 힘이 부치면 쌍욕을 해가며 온몸으로 바위를 누르고 재밍을 하며 올라갔다. 설악산은 북한산에 비해서도 바위의 요철이 심해 조금만 힘을 주어 푸시를 해도 손바닥과 손등이 긁히거나 쓸렸다. 등반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 뭣한 엉금엉금, 안 떨어지려는 몸부림 같은 거였달까. 그래서 별명이 ‘온몸으로 올랐네’였다. 볼품없는 폼에 온몸이 멍투성이였지만서도.
아마 그무렵 내 나이쯤의 출연자들이 젊음의 도전을 뽐내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불현듯, 그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그와 달리 몸도 마음도 물에 젖은 솜뭉치 마냥 도통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게 내심 스스로 못마땅했던 것도 같다. 더 이상 오를 힘이 이제 없는 것같다고, 자꾸만 속에서 속삭이는 것도 같다. 그렇다면 다시 내려갈 것인가? 가만 가만 그때로 기억을 되돌려본다. 아득하게 높이 솟은 설악의어느 봉우리에 매달려 있던 시간들을. 그때 넌 그냥 내려갔던가? 혹은, 그냥 손을 놔버렸던가?
피치 중반을 넘겨 자력으로 혼자 되돌아 내려갈 수도 없고, 이미 체력이 바닥인 경우라도, 어쨌든 움직여 올라야 한다. 우두커니 로프에 매달려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저체온증에 걸려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훅훅 더위가 치미던 어느 날, 굴뚝같은 바위 사이에 끼어 오도가도 못하는 나를 끌어올리며 형님들이 말했다. "야! 몸에 힘이 없어도, 일단 너가 움직여야 해! 발로 조금이라도 올라와보려고 움직여야 해. 너가 안 움직이면 우리가 아무리 잡아당겨도 여기까지 너를 끌어올릴 수가 없어. 너가 움직여야, 너를 당길 수 있어!" 온몸이 기진맥진, 난 이미 정신이 나갔고, 나를 끌어올리려던 두 선배들의 손까지 까질 정도였지만 어쟀든 겨우겨우 굴뚝을 벗어났다.
사실 이 말은 그 후로도 크럭스에서 헤맬때면 선배들에게 많이 들었던 이야기다. 아무리 팔과 다리에 펌핑이 와서 오도가도 못해도 내가 조금이라도 오르려고 힘을 내 몸을 움직여야 그 탄력을 받아 선등자들이 내 로프를 당길 때 실제 내가 올라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중력의 당기는 힘을 선등자들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니 쉽게 끌어올리지도 목라고 본인들 체력이 바닥이 돤다. 정신무장의 이야기가 아니라 물리학의 이야기다. 그날 힘에 부쳐하는 선배들 보기가 미안해 내려와 찔금거렸던 것도 같다.
비록 가오는 좀 없더라도 꿈틀꿈틀, 온몸을 동원해서라도, 기를 쓰고. 그렇게 피치를 끝내고 나면 안전한 하강포인트나 탈출로가 나온다.
오래전의 무모했던 투지가 생각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