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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혜진 Mar 13. 2017

코맥 매카시 희곡 <선셋 리미티드>

무대(세계)는 강제수용소, 감옥, 공동주택

아침에는 아파트 화단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네 사람인지 떠도는 사람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침 일찍 일어난 일이었고 경찰들이 와서 사진을 찍고 천을 덮었다고 한다.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그에게 죽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파트 계단을 내려오는데 계단 끝에 겨울 외투의 모자를 푹 덮어쓴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내가 옆으로 지나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왜 아침부터 계단에 웅크려 앉아 있었을까. 그저 피곤하고 졸렸던 걸까.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그에게 오늘은 어떤 생이 될까. 


모르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 웅크려 살아있는 아침을 가로질러 나는 코맥 매카시의 <선셋 리미티드>를 다시 집어 든다. 표지에는 소설이라고 찍혀있지만 희곡 형식으로 쓰여 있다. 


백은 자신의 생일에 열차 선셋 리미티드에 몸을 던져 자살하려고 했다. 흑이 그런 백을 발견하고 낚아채 살려낸다. 그리고 백을 집으로 데려가 대화를 나눈다. 에피소드보다는 언어가 중심인 작품이어서 처음에 읽을 때는 지루하고 어려웠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 책은 내 책상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백에게 ‘문화적인 것. 책과 음악과 예술’은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과거형이다. 백은 자신이 사랑했던 것들이 아주 약하고 부서지기 쉬웠는데 그걸 몰랐다고, 절대 파괴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고 말한다. 서구 문명은 결국 연기가 되어 나치 독일이 세운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굴뚝으로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백은 문화와 문명이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선셋 리미티드는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달리는 급행열차. 흑과 백이 있던 역에는 정차하지 않고 그냥 통과한다. 정차하지 않을 열차에 몸을 던지는 백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강제수용소가 있는 역에 도착해 열차에서 쏟아져 나왔을 유태인들을 떠올렸다. 세계를 강제수용소로 보고 있는 백은 열차로 뛰어들어 사라져 버리고 싶은 것이다.  


깊은 어둠에 빠져있는 백에게 흑은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는 있냐고, 자살충동을 잠재워줄 약을 복용한 적은 없느냐고 묻지만 백은 친구도 없고 약도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더 이상 친구도 약도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백은 암에 걸린 아버지도 보러 가지 않은 사람. 가족도 그 무엇도 백을 붙잡지 못한다. 죽은 사람은 그저 죽은 사람이길 원한다고 했다. 백은 흑의 집에서 떠나고 싶어 하고 흑은 백을 붙잡으려 한다. 백이 가는 길에 자살하지 않겠다고 해도 흑은 믿지 않는다.  


흑은 아들 둘이 먼저 죽었고 감옥에서 죽을 뻔한 사람. 다른 수감자의 칼에 배가 찔렸었고 흑은 그 수감자의 머리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 놓았다. 그 수감자는 눈알이 하나 없이 절뚝이는 신세가 된다. 흑은 과거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도우려고 한다지만 백은 ‘댁이 하느님을 찾을 수 있도록 같은 처지의 죄수가 절름발이에 애꾸에 반편이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의무실에서 깨어난 흑의 다리에는 족쇄,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고통 중에 또렷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너는 여기 있을 수 없을 거다.’ 

흑은 그때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에 집중한다. 왜 자신에게 말씀하셨는지를 궁금해한다. (그런데 하느님이 '하느님의 은혜'라고 표현했을까? 원문을 확인해봐야겠다.)  


백의 성은 견고하다. 신이라는 관념 자체가 쓰레기 더미에 불과하고 설교의 변증법은 악을 전제로 한다고, 자신은 어둠을 갈망하며 죽음을 달라고 기도한다고 또박또박 말한다. 선셋 리미티드를 선택한 건 마침내 진실과 대면하게 된 것일 뿐 자신은 미친 게 아니라고. 자신의 세계관이 염세적인 게 아니라 원래 세계가 그렇다고도 말한다. 


백은 교수이지만 교수집단을 혐오하고 스스로를 ‘어둠의 교수’라 명명하며 자신의 지성과 판단을 믿는 사람이다. 지식인의 좌절이랄까. 교수집단을 싫어하면서도 자기의 지성과 판단을 믿는다는 건 모순처럼 느껴진다. 집단이 아니라 자신의 개별적 지성을 믿는다는 뜻일까? 백은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인물. 반대로 흑은 공동체에 속하고 공동체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흑은 의무실 침대에 누워있을 때 ‘날 좀 살려주세요.’라고 말했던 일을 이야기하며 사람들 머리에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내릴 수도 있다고 한다. 백을 조금이라도 더 있게 하려고 수프, 빵, 커피도 대접하고 성경도 탁자 위에 올렸다 내렸다 하지만 백의 성은 좀처럼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흑    만일 선생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게 선생이 이미 잃어버린 것 때문이 아니라면, 어쩌면 그건 선생이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것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  (p.125)

                                                                                                                    

(죽음을 바라도록) 꼭 붙들고 있는 게 뭐냐고 흑은 백에게 묻는다. 흑은 그 한 가지를 발견하고 싶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 그것을 근거로 백을 살게 하려고.   


그러나 그 질문에조차 백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게 하나 있다면 포기하는 겁니다.’라고 대답한다. 삶을 포기하는 것. 백은 어둠 쪽에 서 있기를 갈망한다. 흑은 점점 지쳐간다. 백을 붙잡을 말을 찾고 있지만 말로는 도저히 백을 이길 수가 없다. 


마침내, 혹은 어쩔 수 없이 흑은 방문의 사슬을 푼다. (여기서 나는 왜 강제수용소에 도착한 열차의 문이 열리는 게 보일까.) 백은 방에서 나가고 흑은 복도를 바라본다. 흑은 내일 아침, 선셋 리미티드에 뛰어드는 백을 구하기 위해 다시 플랫폼에 나갈 것이라고, 백을 설득할만한 말을 왜 자신에게 주시지 않느냐고 하느님께 울부짖는다.  


흑과 백의 영원한 변주. 이야기의 도돌이표. 세상을 강제수용소로 인식하는 백과 감옥에 있었지만 공동주택에 살며 ‘형제’들을 도우려는 흑. 나는 어둠도 빛도 서로가 없이는 자기 존재가 명징해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래서 백은 어둠으로 가려하고 흑은 빛으로 가려는 게 아닐까. 


코맥 매카시가 그려낸 이 무대에 선셋 리미티드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흑은 백을 구할 수 있을까. 오늘 구했더라도 내일 또 구할 수 있을까. 백은 열차에 뛰어들 수 있을까. 그 열차는 강제수용소에 도착하기 이전의 열차일까, 이후의 열차일까. 그 열차는 백을 싣고 조용히 사라질까. 결국 또 강제수용소에 백을 뱉어내게 될까. 강제수용소의 죽음과 백이 바라는 죽음은 서로 무엇이 다른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아가는 삶과 죽음의 고리 앞에서 나는 질문에 답할 말이 갈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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