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자가 쓴 리뷰 편지
K에게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이 조각된 동판을 발로 밟으라고, 배교하라고 강요를 받아.
그런데 신기하지.
땅이 질퍽거려 이노우에가 여러 번 뒤뚱뒤뚱 걷는 장면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의 진흙 묻은 발이 동판에 닿아도 동판엔 진흙이 묻질 않아.
어쩌면 일본인들의 '배교하라'는 요구는 아무 소용이 없는지도 모르지.
제목은 <침묵>이지만
장면들은 아우성치고 있어.
기치지로는 여러 차례 배교하고 또 여러 차례 고해를 한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웃는 관객도 여럿이야.
이 와중에도 영화는 유머를 잃지 않네. (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구나.)
그런데 그는 고해를 한 게 아니야.
가족을 살리고 싶어서 배교한 거란 말,
죽어가는 가족을 끝까지 지켜봤다는 말,
다 거짓이었지.
가족은 살지 못했고
불타오르는 가족을 뒤로하고 그는 등을 돌렸어.
거짓 고해.
그의 불안한 눈빛과 몸짓.
살아도 산 게 아니라는 말이 왜 떠오르는 걸까.
그럼 반대로 순교한 마을 사람들은 살아 있다는 건가?
고통 속에서 생생히?
나는 지금 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눈빛만은 기억한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고통스러워했지만
눈빛만은 담담하다. 포기한 걸까. 받아들인 걸까.
하지만 기치지로처럼 불안해하는 넋 나간 눈빛은 아니었어.
반면 자기들 대신 볼모로 잡혀가라고
기치지로에게 윽박지르던 마을 사람들의 눈빛은 어땠나.
죽음이 두려워 타인에게 대신 죽으라 명령하는 사람들.
두려워하는 눈빛.
'그럼 이제 우린 천당에 가는 건가요?'
아이에게 세례를 받게 하며 희망에 가득 차
들뜬 일본인 가족에게
로드리게스 신부와 가루페 신부는 시원한 답을 하지 못했어.
부부는 죽으면 천당에 간다고 믿고 있다.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되고 세금도 없다는 그곳.
과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예수천당 불신지옥일까.
아니잖아. 그건 아니야.
그렇다면 무엇이지?
신부들은 왜 당황한 모습만 보여주고
천당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한 것일까.
우린 신부님들께 기대하지.
우리가 모르는 답을 가르쳐 주시기를.
믿으면 고문당하고 죽게 되는 땅에서
페레이라, 로드리게스, 가루페 신부에게는 그 질문까지도 가혹한 일이야.
코맥 매카시가 쓴 <선셋 리미티드>에서 마지막에 다다라 흑이 말하지.
흑 당신이 왜 나를 거기 내려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해를 못하겠어요. 내가 저 사람을 돕기를 원하셨다면 왜 나한테 할 말을 주시지 않은 겁니까? 저 사람한테는 할 말을 주셔놓고.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흑인이 무릎을 꿇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운다.
<사일런스>를 보고 나자 <선셋 리미티드>의 이 대목이 이해가 간다.
배교하라고 하는 일본인들의 말은 교묘하고 정교하고 설득력이 강하다.
<선셋 리미티드>에서 자살하려던 백의 말이 그랬던 것처럼.
마을 사람들은 이미 여러 번 배교했으나 신부 때문에 저렇게 고통받고 있으니 신부라면 마땅히 저들을 살리기 위해서 배교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
신부들은 '저들의 목숨을 저희에게 맡기지 마소서!' 외친다.
신부들은 반대로 그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일본에 온 것이었는데.
진리를 전하기 위해.
말의 빛.
신자들은 파도에 잠겨 죽고,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려 고문당하고, 펄펄 끓는 온천수로 고문당하고, 참수당하고 불에 타 죽는다.
물론 영화에는 과한 액션도 오락의 자극도 없다.
한국 천주교 성지에 가보면 신자들이 어떻게 박해받고 고문당하고 죽었는지 보여주는
인형들이 있다. 잔인하고 무섭지.
'왜 고통을 전시하는 걸까' 궁금했었어.
눈앞에는 무섭고 낯선 인형들의 모습뿐인데.
신자들이 감내한 고통을 보여주고 싶어서겠지.
하지만 어쩌면 말이야.
박해받는 고통은 그렇게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몰라.
‘이건 형식일 뿐입니다.’ 통역관의 말.
맞는 말일 수도 있어.
시늉일 뿐이야. 예수의 동판에 발을 댔다고 배교한 건 아니지 않나.
그렇지만 그 말이 일본인에게서 나올 때와 다른 이에게서 나올 때
말은 전혀 달라진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마을 사람들이 죽는 게 고통스러워 차라리 배교하라고 말한다.
가루페 신부는 눈앞에서 수장당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헤엄쳐 들어가 함께 죽고 만다.
그렇게 죽었으니 가루페는 순결하다는 통역관의 말.
그 말 안에서라면 가루페 신부의 죽음은 빛을 잃는다.
배교하라는 사람에게서 순결하다는 말 들으려고 죽은 건 아니니까.
일본 통역관이 할 말이 아닌 거야. 그건 거짓이야.
거짓말을 한 기치지로도
동판을 밟고 침을 뱉어서가 아니라 거짓 고해하며 거짓의 삶을 살고 있으므로 배교한 게 아닐까.
‘이건 형식일 뿐입니다.’
반대로 형식이 전부일 수도 있어.
죽은 로드리게스 신부의 손에 십자가가 쥐어지잖아.
그것은 형식이 아니란 말인가.
십자가라는 물건은.
물건에
말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의 문제.
성무일도 독서 기도에서
'숨어계신 내 아버지께.'라는 표현을 들은 적이 있다.
숨어계신 내 아버지께.
아버지는 침묵 속에 계십니까?
침묵은 무력함입니까?
침묵은 전지전능하심입니까?
침묵은 우리의 오해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목소리를 못 듣고 있는 겁니까?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나요?
주님을 해석해야 합니까?
발견해야 합니까?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복음 9.24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살아있다는 것은
깨어있다는 것은
고통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기쁨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