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워홀 도전기_17
새벽 5시, 늦게 잠들어 퉁퉁 부은 눈을 억지로 뜨며 일어났다.
쌓아둔 옷더미 속에 멀쩡한 옷들을 골라 캐리어에 욱여넣고, 유니온 기차역으로 가는 우버를 불렀다. 기차를 타고 갈 예정이었다. 비행기를 타면 훨씬 빠르게 갔겠지만, 굳이 5시간이나 걸리는 기차를 택했던 건 빠르게 도착하는 것보다, 엉덩이가 저릴 만큼의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여행지를 고르고 예약하는 데 긴 고민이 없었던 것도, 어쩌면 같은 이유였다.
2박 3일. 며칠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기차역으로 향하는 발걸음과 마음이 어찌나 가벼운지. 내가 그동안 이렇게까지 '무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 도착한 토론토 유니온 기차역은 마치 해리포터 속 한 장면처럼 크고, 주황빛 조명이 은은하게 번지고 있었다. 기차역에 홀로 앉아있으니, 예전에 회사를 다닐 때 ktx를 타고 출장을 다니던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 항상 함께 하던 나의 동료들, 그들은 언제나 ”기차에서는 이 음식이지."를 외쳤다. 누구는 양념감자, 누구는 크로켓, 누구는 샌드위치…
그 사람들이 떠오르면서 나도 뭔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 팀홀튼 커피와 음식을 들고 내 옆에 앉았다.
옆에서 전해지는 따뜻하고 달콤한 커피 향에 나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문 연 팀홀튼이 어디에 있어? 나도 먹고 싶어.”
그녀는 바로 앞에 있다며, 지금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얼른 다녀오라고 했다. 나는 후다닥 달려가 바닐라 라테와 도넛 하나를 사서 돌아왔다. 대만에서 온 그녀는 출장으로 토론토에 왔다가 몬트리올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반팔·반바지를 입은 내 모습을 보고는, “기차 안이 생각보다 추운데 카디건 있어? 꼭 입고 타.”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말에 긴팔을 꺼내 들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 내부는 깔끔하고 넓었다. 창문도 넓어 주변 풍경이 막힘 없이 펼쳐졌다. 밀린 드라마를 보고, 게임을 하고, 부족했던 잠도 잤는데도 여전히 기차는 한참을 달리고 있었다. 기차의 느린 속도만큼 주변 풍경도 서서히 변했고, 나는 그 변화에 시선을 두며 천천히 복잡했던 마음을 털어내려고 했다.
그렇게 5시간이 지나니, 몬트리올이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현대식 건물, 오래된 건물이 섞여있고, 사이사이에 있는 빈티지한 벽화가 토론토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몬트리올의 기차역은 뭔지 모를 시골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전반적으로 어둡고 정신 사나운 음식점들이 줄줄이 붙어있었다. 구경할 생각도 없이 바로 밖으로 나갔다. 미터기 계산법도 잘 몰랐지만, 눈앞에 있는 택시에 올라 타 숙소 주소를 불러주었다. 그 짧은 순간에 출발 며칠 전에 함께 일하는 동료가 내게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몬트리올에 간다고 하니 그는 불어를 할 줄 모르면 꽤 차별대우를 받을 거라는 이야기 했었다. 하지만 걱정과 다르게 택시 아저씨는 꽤 착했다. 내가 몬트리올에 머무는 기간에는 꽤 큰 규모의 재즈 페스티벌을 하고 있어 여기저기 길 통제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기사님은 나를 내려주면서 곧장 앞으로 얼마만큼 걸어야 하는지, 건물 어느 쪽에 집 번호가 붙어있는지 등을 설명해 주었다.
숙소가 있는 곳은 힙한(?) 동네인지 술집도 많고 클럽도 많은 번화가에 있었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바로 밖으로 나섰다. 어디를 가야 할지는 몰랐지만,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았다. 챙겨 오지 못한 칫솔과 치약이 필요했다. 큰길을 따라 쭉 내려가다 보니 학생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서커스 공연을 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학교 이름을 보니 National Circus School이라고 쓰여있는 것이 서커스 전문학교인 것 같았다.
한국에서 친구를 통해 '태양의 서커스'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처음 봤던 그 공연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탄탄하게 짜인 스토리, 그리고 사람인가 싶을 정도의 멋진 공연자들, 그리고 매번 감동적인 가수와 무대 연출. 모든 것이 즐겁고 새로웠다. 그때 이후로 태양의 서커스가 한국에 올 때면 항상 같은 친구와 함께 보러 갔었다.
그 '태양의 서커스'가 시작된 곳이 바로 여기 몬트리올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이런 학교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가던 길을 멈추고 자연스럽게 공연을 구경했고 학생들의 실수에도 크게 박수를 치며 응원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이 들이 졸업하면 태양의 서커스에 들어가고 싶어 하겠지.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는 거리를 지나 마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에는 토론토에서는 볼 수 없던 다양한 맥주와 와인들이 끝이 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만족스러운 술을 못 마신 지도 꽤 되었던 터라 더 신이 났다. 하지만 가방 무거워하는 것 싫어하고, 손에 뭐 드는 것 싫어하기에 구경으로 끝을 내고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는 거리로 다시 돌아갔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는 아이스크림 집을 발견했다. 내가 종종 여행에서 하는 것들 중 하나인 '일단 사람들이 줄 서 있으면 뭔지 몰라도 줄 서야지.'를 외치며 나도 함께 줄을 섰다.
메뉴판은 반은 영어, 반은 불어로 적혀있었고 아르바이트생도 날 보자마자 "Bonjour"라고 인사를 했다. 그나마 익숙한 영어로 답하며 남들 한 스쿱 고를 때 나는 두 스쿱을 골라 받았다. 코코넛 맛의 젤라토가 어찌나 맛있던지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길 한편에 나있는 계단에 앉았다. 아래 보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가족끼리, 연인끼리 모여 바쁘게 날씨 좋은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나눠먹는 아들과 아빠의 모습, 뜨거운 햇빛보다 더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 온 가족이 휴가 온 듯한 시끌벅적한 모습, 그리고 엄마의 사진을 찍어주는 딸. 행복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흘러넘친 행복이 잔잔하게 나에게까지 흘려들어옴을 느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었다.
근처에 꽤 리뷰가 좋은 식당이 있어 이른 저녁시간이지만 방문했다. 패티오에 자리 잡고 앉아 음식 메뉴판 보다 먼저 와인 리스트가 적혀있는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혼자기에 눈에 들어오는 병와인을 포기한 채 몇 가지 글라스 와인 리스트를 골랐다. 대략 마음속으로 와인의 순서를 정하며 어울릴 만한 음식을 고르기 시작했다. 기대하며 시킨 첫 글라스 와인을 받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실망감이 몰려왔다. 와인에서 산화된 맛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곧장 서버를 불러 와인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도 서버는 놀라며 바로 움직여주었고, 새로운 병을 가져와 내 앞에서 오픈 후 맛을 보게 해 주었다. 아까랑 다른 맛과 향, 그리고 빠르게 해결해 준 서버의 서비스에 기분이 좋았다.
그곳에서 나는 두 시간이 넘게 앉아 피부로는 뜨겁게 쏟아지는 햇빛을 느꼈고, 귀로는 멀리서 들려오는 재즈 음악소리를 들었고, 눈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혀로는 세 잔의 각기 다른 와인, 그리고 담백한 피자를 즐겼다. 점점 내 마음이, 내 몸이 차분해지고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이 모든 것에 신경을 집중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이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생각했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건 이런 거였지. “
저녁 후, 근처에 있는 카페를 방문했다. 아늑해 보이는 작은 공간, 그리고 주변에 정신 사납지는 않지만 커피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메뉴판에는 반은 영어, 반은 불어로 되어있었고 앞에 있는 사람들 모두 불어로 주문을 했다. 내 차례가 될 때까지도 뭘 먹을지 고르지 못하고 있던 나는 아르바이트생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앞사람 커피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저걸로 줘.”
아르바이트생은 '아이스크림이 들어간 라테'라는 것을 설명해 주고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정말 좋아!”
나는 커피를 받아 앉을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앉을자리가 안 보여 다시 그 친절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앉아서 먹을 자리는 없어?”
그는 바로 앞에 있는 한 여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쟤 내 친군데 쟤랑 앉아.”
그 여성은 분홍색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테이블을 살짝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나 여기 앉아도 돼?” 우리는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무엇을 적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녀가 사용해 적고 있는 언어는 아랍어였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기를 쓰고 있어.”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그녀와 글을 쓰는 것이 불러오는 즐거움과 안정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대화를 시작했다.
그녀는 아랍어, 불어를 위주로 했고,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난 아랍어도 불어도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되지도 않는 서로의 영어실력과 함께 온갖 몸짓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여기서 일을 하고 있는 남성과 장거리 연애를 했고, 얼마 전에 결혼해 이사를 왔다고 했다. 그런 그녀에게 몬트리올의 매력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녀는 지도를 이용해 좋아하는 음식점과 카페들을 소개해줬다. 그렇게 또 한참을 앉아 떠들며 간단한 불어와 아랍어를 배우기도 하고, 지도에 추천받은 음식점과 카페들을 체크했다. 그리고 우리는 인스타를 교환했다. 내가 여기 있는 동안 시간이 맞으면 함께 놀자고 이야기를 하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 꽤나 어둑해진 몬트리올 거리에 비가 쏟아졌다.
촉촉하게 젖어가는 거리가 말라가고 있던 내 마음에도 물을 내려주는 것 같아 시원하게 느껴졌다. 숙소 근처에 다다르자 비가 그치고, 저물어가는 해가 하늘의 색이 변화하고 있었고, 그 밑으로 한 아저씨가 색소폰을 연주하며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이 순간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몬트리올에서의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