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울 수 있을까
집 앞 벚꽃 동산을 거닐었다. 남들은 잘 모르는 나만의 아지트라고 생각하는 곳이다. 벚꽃도 목련도 아직은 봄의 고요 속에 잠겨 있다. 조만간 쏟아지는 봄볕에 꽃망울을 틔우겠지만, 아직은 꽃의 세계를 피우려 끈질기게 에너지를 응집하는 중이리라. 발길 닿는 곳으로 향하던 중에 얼마 전 수목 가지치기를 했는지 잘린 가지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나무의 성장에 꼭 필요한 일이긴 하나, 한 몸으로 이어진 뿌리를 잃고 예고도 없이 타의로 댕강 잘려 나간 가지들은 온통 검은 빛이었다.
그대로 방치된 채 얼마나 지났으려나. 땅 밑 깊이 뿌리를 박고 꼿꼿이 서 있는 나무들과 똑같이 차가운 아침 이슬을 맞고, 점차 따사로워지는 볕을 쬐고, 봄을 알리는 비를 맞았을 것이다. 시선이 닿았을 무렵, 그늘 한쪽에 자리 잡은 가지 더미를 스쳐 지나가다 발걸음을 멈추고 온 길을 되돌아갔다. 가만히 살펴보니 작은 꽃망울이 줄기마다 딱 붙어 있는 게 매화다. 혹시 집으로 가져가 물에 꽂아 두면 꽃이 필까? 무자비하게 잘린 가지를 나는 한 번 더 꺾는다. 줄기가 두껍고 길어서 쉬이 꺾이지 않는다. 물관이 마르지 않았기를 소망하며 그렇게 꽃가지를 한 번 더 반대편으로 꺾는다. 소리 없는 아픔을 손에 꼭 쥐고 집으로 향한다. 어서 가자, 집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주저 없이 되돌아간 건 4년 전 한 조각의 기억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 내 대대적인 수목 가지치기가 있고 나서 댕강 잘려 나간 목련 가지를 보았다. 솜털 껍질에 쌓인 꽃봉오리들이 가지 끝 여기저기 셀 수 없이 붙어 있었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내 낡은 껍질을 거듭해서 떨어뜨리고 따스한 봄볕 샤워를 마쳤을. 마지막 하얗고 단정한 솜털 목필만 벗겨지기만을 기다렸을 목련 나무. 예고된 아름다운 엔딩을 즐기지 못한 꽃가지가 너무도 애잔해 보였다.
집으로 데려가 물꽂이를 해 볼까. 어쩌면 꽃가지가 기다렸을 미래를 만날 수 있을지 몰라. 목련의 신비롭고 고요한 독무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도 있지 않을까. 굵은 가지들은 꽃병이 될만한 곳엔 모두 꽂아 두고, 줄기가 짧은 가지들은 유아용 물약 병에 넣었다. 남은 건 기다림과 인내뿐.
목련 물꽂이를 한 순간부터 매일같이 틈틈이 들여다보던 시간이 켜켜이 쌓여갔다. 어느 날인가 물약 병에 넣어 둔 목련이 솜털을 벗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목련꽃의 고요하고 우아한 파티가 2주가 넘도록 이어졌다. 그때 알았다. 식물의 경이로운 생명력을. 끝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알지만 서두름 없이 자신의 속도대로 때를 기다려 이윽고 꽃을 피워내는 식물의 신비를.
만일 사람이 저토록 흔들림 없는
순수한 추진력에 이끌려
한눈팔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온 존재로 꽃을 피울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을 가지고
꽃을 피울 수 있다면,
불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꽃을
불완전한 것조차 감추지 않는 꽃을.
드니스 레버토프, <꽃 피우는 직업> 일부
류시화 [시를 납치하다] 중에서
톱 가위에 잘린 가지라도 내재된 순수한 힘 하나만으로 주변 상황을 의식하지 않고 차분히 몫을 다하려 애쓰는 모습은 나에게는 없는 DNA였다. 순수한 마음은 시시때때로 풀이 죽어 수그러들기 일쑤였고, 결과와 성장 속도를 견주어가며 나를 낮추곤 했으니까. 그렇게 꽃을 피워내는 직업을 흠모했다. 닮고 싶어도 닿을 수 없는 식물의 놀라운 생장력에 그저 감탄할 뿐. 앓는 소리 하나 없이 각인된 미래의 꿈 하나만을 꽃피우려는 추진력을 아로새겼던 지난 봄날.
그날의 목련을 복기하며 물꽂이 해 둔 매화 나뭇가지를 바라본다. 엊그제, 어제보다는 꽃잎이 살짝 벌어진 것 같고, 엷고 수줍은 연분홍빛의 꽃잎이 보일락말락 움트는 작은 것이 보인다. 꿈틀대고 있는 걸까.
물을 갈아주러 꽃가지를 꽃병에서 꺼내는 순간 가지 제일 끄트머리에 달린 바싹 마른 꽃봉오리들이 투두둑 떨어진다. 나를 만나기 전부터 꽤 오랫동안 말라 있었던 게 아닐까. 맥없이 떨어져 버린 작고 여린 것들이 못내 아리다. 겉은 멀쩡해 보이는 다른 봉오리들도 혹시 속이 마른 건 아닐까. 작은 도움이라도 어떻게든 닿고 싶어 구글 창을 열어 AI에 물었더니 작은 희망이 생겼다. 줄기 끝을 사선으로 살짝 잘라주고 겉이 말라보이면 분무기로 물을 뿌려 촉촉이 해 주고 설탕물이 양분이 될 수 있다는 조언을 쏟아낸다. 무엇보다 향이 좋은 매화가 곧 꽃을 피우기를 소망하는 응원의 말도 남겨주기까지.
가지 끝을 사선으로 자르고 마른 듯한 가지 위로 물도 뿌려주고, 꽃병에 든 물을 버리고 설탕 녹인 물로 새로이 갈아주었다. 아침엔 봄볕을 좀 불러와야겠다. 자, 이제야말로 기다리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