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원? 죽는 날까지 현역
내가 아끼는 그녀, J 도 나와 유사한 이유로 이민행을 결정했다고 했다. 이십대에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계속 유지하다 가는 “죽을 거” 같아서 호주 행 티켓을 샀다고 했다. 이십 여년 전에도 지금도 영주권을 획득하기 쉬운 간호학을 공부해서 지금은 오랫동안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천성이 돌봄 자체인 J, 요즘엔 한국에서도 멸종일 듯한 “종가집 며느리” 포스다. 그녀가 놀러 오라고 초대하면 만사 제끼고 쪼르르 한달음에 달려간다. 위장에 추억의 음식들이 채워지는 날인데 마다할 이유 따위? 없다.
어떤 날은 들통 한 가득 육개장이 보글보글 끓고 있고, 어떤 날은 전을 부치고 있고, 어떤 날은 손으로 만두를 빚고 있다. 흠칫 뒷걸음을 치게 만드는 건 그녀 옆에 놓인 김치통에 만두소가 한 가득 담겨 있을 때인데, 인심이 동해 앞바다 보다 후한 J는 그걸 놀러 온 지인들과 같이 빚어서 떠날 때 다 싸서 보낸다. 인심 크기 만큼 손도 크다. 경상도 억양이 강한 J는 대가족에 둘러 싸여 자랐고, 지금도 대가족 문화를 그리워하는데 어쩌다 멜번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덕분에 내가 곁에 붙어 덕을 보고 산다.
J는 주말에는 병원에서 일을 하고 주중에는 나처럼 가정방문 케어러로 일을 한다. 참고로, 호주에서는 간호사, 물리치료사, 언어치료사, 재활치료사 등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기관 안에서 또는 밖으로 나와 커뮤니티에서 일을 한다. 의사 밑에서 일하는 월급쟁이의 개념이 아니란 뜻이다. 간호사들도 에이전시를 끼고 가정방문 케어러 일을 해도 되고, 개인사업자(ABN, Australian Business Number)를 등록하고 독립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 내가 장애지원과 케어러의 일을 에이전시를 끼고, 또는 ABN을 등록하고 개인사업자로 일을 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언니 꿈은 벌써 현실이에요. 호주는 직장에서 나이를 묻지 않잖아요. 본인이 일을 하고 싶으면 은퇴가 어디 있어요?”
Lady’s Night. 오피스에서 일을 하는 S의 생일을 빌미로 여자 셋이 모였다. 멜번 시티의 유명한 타이 레스토랑에서 칵테일을 홀짝이며 수다가 무르익는 중이다. 노란 빛깔의 마르게리타가 담긴 유리잔에 붙은 소금이 일반 소금과 다르다며, 왜 소금이 이렇게 맛있냐며, 흥분해서 내가 이런 말을 던진 듯하다.
“있잖아, 내 소원은 죽는 날까지 현역으로 일을 하는 거야.”
돌봄이 천성인 J는 공감도 잘한다.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고, 노년에 돌봄 제공자가 아니라 돌봄 수혜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의 미래 소원을 위해 그녀는 희망적이기만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자기가 일하는 병원에 76세(호주에서 나이는 만 나이다) 할아버지 간호사가 아직도 일하고 계시고, 더군다나 다리를 절룩거리며 병동을 도는데 돌봄을 받아야 할 사람인지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인지 분간이 안 갈 때가 있는데, 심지어 주 4일 퍼머넌트 파트 타임으로 일을 하고 계시다고 했다. 거기다 확실한 마침표를 찍는다. 나에게 반문따위 하지 말라는 듯이.
“언니도 알잖아요. 호주 사회는 타인의 눈치를 보지도 않고, 쉽게 직원을 못 자르잖아요. 특히 돌봄 영역은 일손이 언제나 부족한 분야인데 언니가 원할 때까지 얼마든지 일할 수 있지요.”
진심으로 죽는 날까지 현역으로 현장에서 일을 하고 싶다. 멜번에 살면서 “직업과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이 거주지를 한국에서 멜번으로 바꾼 변화만큼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한국에서 노동은 하면 할 수록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을 왜곡시키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교사가 너무 되고 싶던 내가 교사가 되자 “은퇴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나만이 아니라, 주변 동료들도 대부분 나와 같은 소원을 품고 사는 걸 보면 나만 “별종”은 아니었던 듯하다. 지금도 한국의 교사 친구들은 “언제 명퇴를 하나?”, “은퇴까지 버틸 수 있을까?” 노동을 서둘러 중단하거나 노동을 그만두는 날만을 꿈꾸며 산다.
마법처럼 호주는 일을 시작하고 현장에 가면 생각보다 더 재미가 있다. 한국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보다 멜번에서 케어러로 일을 하면서 더 전문성을 인정받는 기분이 들고, 나의 노동권을 더 보장받는 기분이 들고, 케어러란 노동자로서 나의 판단과 존엄이 보장 받는 기분이다.
더 이상 나의 노후를 염려하지 않는다.
케어러가 되어 수많은 어르신 고객들을 만나며 역설적으로 나의 노후를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건강에 자신이 있고 재산이 많아서가 아니라, 늙음과 노쇠, 장애와 병듦, 간병과 죽음에 대한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노후의 경제적 준비는 어떻게 하는 것이 현재 나의 처지에서 가장 현명한 일인지도 돌봄일을 하면서 터득했다. 모르는 일은 두렵기 마련이고, 알게 되면 공부하고 준비를 하면 될 일이다.
“가능한 끝까지 노동을 유지하는 일”이 가장 현명한 노후 대비란 사실을 매일매일 확인한다. 하루 종일 방안에서 티비만 보며 인지 기능을 상실해 가시는 고객, 일을 하지 않으니 수입이 줄어 원하는 라이프 스타일대로 살지 못하시는 고객, 일을 하지 않으니 활동성이 줄어 건강 상태가 급락하여 낙상으로 침상 생활을 하시는 고객, 사회적 관계망이 협소해지니 우울감에 시달리며 나만 보면 울먹이시는 고객.
노년기에 적당한 수준의 노동은 종합선물 세트다. 치매 방지, 신체적 건강 유지, 정신적 건강 유지 그리고 노후의 경제적 빈곤 마저도 해결해 준다.
그리하여 오늘도 고객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사뿐사뿐, 가볍다. 내가 옮기는 발걸음과 내 손길이 내 노후 대비라고 생각하면 설렌다. J 말처럼 내 건강만 유지되면 끝까지 현역으로 일할 수 있는 직업, 일의 강도와 시간을 얼마든지 나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조정할 수 있는 직업, 너의 아름다운 이름은 "케어러".
멜번에 와서야 비로소 ‘몸을 쓰는 노동’의 위대함과 한국에서 노동에 대해 품었던 스스로와의 불화와 타협을 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해방’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