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번에 이민 와서 첨으로 작심하고 도모한 일은 책모임 조직이다. 이민 초기에 너무 외로웠다. 난 책읽기를 즐기고 수다를 아주 좋아라 한다. 그래서 책모임 이름도 “수다리”다. 나의 아주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기심의 발로로 멜번에 책모임인 ‘수다리’가 탄생했다. 다행히 나처럼 외롭고 수다에 갈증 난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지, 여전히 모임은 잘 유지되고 있다.
수다리 멤버들은 나를 비롯하여 케어러가 절대 다수다. 이미 나처럼 현장에서 일을 하는 멤버, 나의 지칠 줄 모르는 ‘케어러 예찬’ 꼬임에 넘어가 열심히 자격증 공부 중인 멤버, 자격증을 따고 구직 중인 멤버… 언제든 ‘수다리’가 ‘케어러들의 책모임’으로 탈바꿈을 해서 돌봄 노동에 대해 각자의 경험담을 찐하게 털어 놓는다 해도 전혀 낯설지 않을 판세다.
어쩌다 보니 돌봄사, 나도 살아 생전 이런 일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자리를 찾아, 백세 시대에 꼭 반을 살아낸 나에게, 경단녀라는 레벨이 붙은 나에게, 애가 크면서 주체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시간이 되어 버린 나에게, 이민자 여성인 내게 노동을 허락할 만한 일을 찾다 보니 이 자리에 와 있었다. 어이없게도 아이가 어릴 때는 젤 부족한 게 시간이어서 잠만 원하는 대로 자도 소원이 없겠더니, 애가 고작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는데 아이는 성큼성큼 나에게서 독립해 자기의 길을 갔다.
그렇게 찾은 내 직업은 장애인 지원사 그리고 요양보호사. 나는 이 일을 간략하게 타인의 똥을 처리해 주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오해는 금물! 그렇다고 하루 종일 꼭 똥만 치우는 단순한 일로 이 직업이 국한되고 한정된다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이 일은 전천후 만능 기능과 기술이 요구되는 일이다. 먹이고, 씻기고, 갈아 입히고, 운전하고, 어려운 행동이 일어나면 이에 맞춰 대처하고, 이동 시키고, 비언어로 소통하고, 짜증과 화를 내면 받아내고(emotional support), 정확하고 바른 판단을 어려워 하면 곁에서 도와주고,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해도 끊임없이 대답해 주고…
이 일은 한 인간이 그동안 쌓아 온 모든 인생의 경험과 지혜와 노하우를 모두 동원하는 고도의 정신적 신체적 노동을 요하는 직업이다. 처음 막 일을 시작했을 때 내 반 평생의 경험과 지식을 마치 티끌마저도 긁어 모으는 심정이었다. 정리 잘하기, 설거지 잘하기, 정해진 시간 안에 일의 우선 순위 정하기, 상대의 이해 수준에 맞게 대화하기, 요리 잘하기, 운전 안전하게 하기 등…그 동안 내 삶에서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던, 너무나 하찮고 소소하던 모든 기능들이 마침내 빛을 발하는 직업이 이 직업이기도 하다.
“난 비위가 약해서 똥 치우는 일은 못 할 거 같아.”
내 직업 경험담을 듣던 한 수다리 멤버가 말했다. 나의 노동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반응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타인의 똥을 처리해 본 경험이 많나 싶겠지만, 평생 타인의 똥 처리는 내 아들이 기저귀를 차던 몇 년이 전부다.
신기하게도 우리 인간은 누구나 똥을 배출하는데, 모두가 똥을 혐오한다. 나도 ‘비위 약함’을 한 가닥 하던 사람이었고, ‘유별나게 깔끔 떨던’ 약간 재수없는 젊은 시절을 지냈다. 세상에 똥 냄새가 역겹지 않고 똥의 모양과 색이 혐오스럽지 않은 사람도 있나? 심지어 내 자식의 똥 냄새도 역겨웠던 장본인이다.
호주의 장애와 에이지드 케어 분야에서 사용하는 기준, 구글 이미지
똥은 생명이기도 하다. 요양원에서 일해보면 똥이 얼마나 중한지를 이해한다. 아들이 어렸을 때 황금빛 큼직한 똥을 반기듯 황혼에 들어선 어르신들도 그렇다. 요양보호사들은 입주자들이 변을 보면 상태와 크기와 변비인지 설사인지 등을 기록해야 한다. 매일 수시로 물똥을 보는 분, 변비로 며칠 째 변을 보지 못하시는 분 들의 삶의 질은 낮다.
놀랍게도 돌봄을 업으로 삼고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겠다고 결심하자 자연스럽게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가능한 일이 되어 있었다. 특히 호주의 장애인 지원사와 요양 보호사들의 수당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이 나라는 육체 노동의 가치를 저렴하게 후려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육체 노동자들의 위상이 높다. 대우와 처우, 특히 임금을 잘 주면 자연스럽게 위상은 높아진다는 사실을 호주에서 일을 해 보면서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위력이란 실로 대단하다. 일주일 또는 격주마다 꽂히는 통장의 숫자들이 똥에 대한 역겨움과 혐오를 몰아낸다. 더 이상 예전처럼 역겹지도 혐오스럽지도 않다. 돌봄이란 직업은 나를 똥으로부터 해방 시켰으니 실로 위대한 직업이 아닐 수 없다.
내 장애 고객 중에는 태어나서 청소년이 되도록 기저귀를 찬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기저귀를 착용을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들이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된다는 진리를 돌봄을 하면서 깨닫는다. 유일한 소통의 도구라 여겼던 “말”이 더 이상 소통의 도구가 전혀 되지 않는 사람들, 돌이 되면 걷게 된다는 보통의 발달 단계를 밟지 않는 사람들, 두 돌이 지나면 말을 하게 된다는 보편을 박살내고 무덤에 이르기 까지 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 네 살 정도가 되면 기저귀를 뗀다는 정설을 따르지 않고 평생을 기저귀를 차고 살아가는 사람들, 학령기가 되고 학령기를 이미 끝냈어도 여전히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평범성을 벗어난 나의 고객들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나를 옭아맸던 수많은 편견과 낙인과 당위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안목을 깊고 넓게 확장 시킨다. 그들에게서 좀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는 위안을 수시로 받는다. 그들을 통해 내 삶이 깃털처럼 가벼워 질 때가 종종 있다.
오늘 요양원 근무 중에 요양보호사 주나가 화장실을 다녀 왔다. 요양 보호사 동료들이 장난끼를 섞어 묻는다.
“똥 색깔은 어땠어? 크기는? 상태는?”
요양원 입주자들 똥을 치우느라 이마에 땀이 맺힌 요양보호사들이 까르르 웃는다. 그 순간이 참 달다.
*호주의 임금은 월급제는 흔하지 않고 대부분 주별(weekly) 또는 격주(fortnightly)로 지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