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멜버른에서 취학통지서를 받던 날

어른들의 상상력이 필요한 순간

by 루아나

'주민등록을 말소하고 올까?'

고민했다가, 단지 '말소'란 단어의 어감이 싫어서 동생 밑으로 나와 아들의 주소를 이전해 놓고 왔다. 어차피 남편은 외국인이라 주민등록에 올라오지도 않으니 처리할 사항도 없었다.


한국의 겨울 방학을 맞아 멜버른을 방문한 조카가 아들의 '취학 통지서'를 들고 왔다. 공문을 읽다 보니 어제가 배정된 학교의 예비 소집일이었다. 한국에서 교육자로서의 경험상, 아이가 배정된 학교의 교사들은 이런 얘기를 나누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아이는 부모가 이혼을 했나 봐. 애가 엄마의 성을 땄고, 주민등록에 아빠는 올라와 있지도 않아(교사 중에 외국인 부모는 법적으로 주민등록 등본에 기재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엄마는 애를 학교에 입학시키지도 않았네. 앞으로 속 꽤나 썩이겠어.'

'우리 가족이 아직 한국에서 살고 있다면 어땠을까?'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다. 아이가 이곳처럼 잘 적응해서 학교 생활을 하지는 못했을 게다.


예비소집일을 포함하여 입학기일 이후에도 연락 두절이나 정당한 사유 없이 학교에 입학하지 않을 경우, '초중등교육법시행령'에 따라 내교요청, 가정방문 실시 및 경찰의 협조 등을 통해 아동의 소재·안전 확인 절차를 실시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조카가 건네 준 안내문의 문구는 이제 낯설게 다가온다. 멜버른에 살면서 아이를 키우고 학교에 보내보면 한국의 행정들이 아동과 학부모에게 얼마나 거칠고 불친절한지를 실감한다. 멜버른에서는 프렙(초등 1학년 전 단계로 한국의 유치원 과정 1년을 초등학교에 편입해서 적응시키는 과정)부터 초등학교에 다닌다.


멜버른에선 이런 협박조의 가정통신문 대신, 입학 전 6개월간 예비 신입생들을 해당 학교에 적응시키는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학교마다 프로그램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Transition Day' 가 매달 한 두 번씩 입학 할 학교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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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입생을 위한 준비 프로그램 예비 초등생을 위한 Transition day 일정표 ⓒ 이혜정



Transition Day를 통해 다음해에 만나게 될 교사는 물론, 친구들의 얼굴과 이름을 익힌다. 체육, 미술, 음악, 제2외국어 교사들과 활동하는 시간, 교장이나 교감과 학교 투어하는 시간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교사들이 아이들과 함께 활동을 하는 동안 부모들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예로, '왜 아이들의 책읽기가 중요한가?', '놀이 교육은 왜 필요한가?','어린아이들의 수학과 언어 교육은 어떻게 접근하는가?' 등에 대한 주제로 전문가를 불러 학부모 강연을 하는 학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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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비 학부모를 위한 transition day 프로그램 ⓒ 이혜정



아동이 학교에 입학할 시기가 되면 교육부(Department of Education and Training) 에서는 각 가정으로 입학에 필요한 다양한 안내문들을 보낸다. 자녀의 첫 학교생활 적응을 효과적으로 돕는 방법에 대한 안내문, 급격한 변화를 피하고 점진적이고 안정적인 방법으로 아동의 입학을 돕는 방법, 예비학부모의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사이트들을 소개하는 내용들이다.



새 학년 첫 등교일, 이곳엔 한국처럼 혼란과 긴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개학을 위한 모든 절차는 학생과 교사가 최대한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배려된다. 개학 첫날은 교사와 스태프만 출근하여 개학 준비를 하고, 둘째 날은 재학생 등교일 , 세째 날은 신입생 등교일로 순차적으로 배정하여 구성원들의 변화에 대한 충격을 최소화 한다. 한국에서처럼 가뜩이나 긴장하고 불안한 어린 신입생들을 운동장이나 강당에 몰아넣고 열리는 개학식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한국 문화에서 기대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합리적인 일 처리와 구성원을 배려하는 문화는 곳곳에 존재한다. 프렙 신입생의 경우엔 등교 첫날, 등교 시간마저 10분 간격을 두고 순차적으로 배정한다. 담임 교사가 학생과 학부모를 일대일로 만나 환영하고 교실을 안내하는 시간이다.


내가 아는 한국의 지인 중에는 겨울 방학 때 초등학교에 입학할 딸을 데리고 배정된 학교를 며칠씩 방문하는 이가 있었다. 교무실에 가서 양해를 구하고 학교의 급식실, 화장실, 양호실 등을 데리고 다니며 입학 첫날 아이가 겪을 충격을 최소한 줄여주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 날아온 아들의 입학통지서를 받고 한국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어른들이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아이들의 길고 힘든 학령기가 조금은 덜 힘들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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